91화
‘너도 사정 다 알잖아.’
그러자 나를 바라보는 개비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 풍선처럼 볼이 부풀더니 입술이 삐죽삐죽, 눈꼬리는 위쪽으로 실룩실룩.
조금 전 브라시다스와 마주 보며 지었던 초월자의 표정은 어디다 갖다 버린 듯한 모양이었다.
그러더니 빽, 소리를 치는 게 아닌가.
- 가아아아! 갈 거야아아아!
“…….”
이, 이게 무슨…….
‘생떼 부리는 어린애 같지 않다’라고 생각한 지 불과 오 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러기 있기?
“아니, 아예 안 간다고 한 것도 아니고 이 시기만 지나면 가자는…….”
- 그게 언제가 될 줄 알고!
그리고 그다음 말은 내 머릿속에 대고 직접 외쳤다.
- 교단 놈들이 네 사정 봐주면서 일 벌일 것 같아?!
그게, 맞는 말이기는 한데…….
- 갈 거야아아아! 가! 가! 가!
이제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모터처럼 뱅글뱅글 발버둥 치며 도는 개비를 보며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래, 개비는 가. 엄마… 아니 계약자는 집에 있을게.”
그랬더니 이제는 숫제 울며 떼쓰는 것을 넘어 어마어마한 포효를 내질렀다.
- 너랑 안 떨어져어어엇!
“개, 개비.”
깜짝 놀랐다.
그동안 함께 지내기는 했지만 정령석에서 그리 멀리 떨어질 수 없나 보다, 하고 어림짐작을 했을 뿐이지 개비가 스스로의 의지로 나와 있겠다고 말한 것은 처음이었다.
‘자식… 그래도 내가 걱정되기는 하나 보네.’
괜히 찡해져서 코끝을 슥 문지르는데 다음 포효가 귓구멍 깊숙이 박혀들었다.
- 혼자 뒀다가는 홀라당 잡혀가서 내 힘을 쪽쪽 빨릴 텐데 네 어디를 믿고 두고 가! 어떻게 요만큼이나마 되찾은 건데에에에!
“…….”
감동이 사라지는 건 에탄올이 휘발하는 시간보다도 짧았다.
미운 네 살만큼이나 징징대는 개비, 그리고 녀석을 차게 식은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나.
브라시다스는 그런 우리를 흥미진진하게 번갈아 보더니 곧 입을 열었다.
“내가 가면 오가는 데는 시간이 거의 걸리지 않을 걸세. 어딘지는 몰라도.”
- 그렇다잖아!
아니, 가서 발만 한번 담그고 올 거야? ‘개비 왔다 감.’이라고 쓰인 깃발만 꽂고 올 거냐고.
나는 양손을 허리에 올리며 물었다.
“아, 그래. 거기 가서 얼마나 있으시려고?”
- 적어도 일주일은 있어야지!
“휴가 가니?”
한숨과 함께 묻자 발버둥을 멈춘 개비가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이틀을 줄였다.
- 5일?
“더 줄여.”
- 다 필요해서 그러는 건데 너무 짠 거 아니냐, 이 인간아! 어디로 갈지도 모르면서!
모르기는 뭘 몰라?
“히로비외 화산.”
툭 던지듯 대답하자 개비의 눈동자, 아니 눈동자처럼 빚은 동그란 불덩어리가 지진이라도 난 듯이 좌우로 흔들렸다.
- 너, 너도 이제 내 생각을 읽는 거냐? 그런데 이렇게 멀쩡할 수가……?
“뭐래.”
개비 녀석이 생각하는 거라고 해봐야 거기서 거기 아니겠나.
‘나는 네가 일주일에 한 번 화산에 가자고 얼렁뚱땅 계약하려던 것을 잊지 않았단다.’
히로비외 화산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활화산이다.
동부 지방의 끝, 바다를 건너면 섬이 하나 있는데 섬 전체를 차지한 화산이 일 년 내내 분출하는 탓에 사람이 살지 못한다고 들었다.
그런 화산이 있는데 다른 곳을 떠올리는 쪽이 더 이상하지.
“그래도 지금은 안 돼. 5일도 너무 길어.”
- 쪼잔한 인간 같으니라고.
“하아아.”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 개비 어린이. 내 말을 잘 들어봐요?”
화산에 가서 힘을 회복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는 오스틴이 있다. 불의 힘을 탈취한 교단의 수뇌! 나보다 더 불을 잘 다루던 그 자식!
‘곧 놈을 잡아서 힘을 쪽 빨아내면 그 양도 무시하지 못할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그런데 만약 화산에 가 있느라 일이 벌어졌을 때 현장에 있지 못한다면? 만에 하나 놈을 놓친다면?
그보다 더 억울한 일도 없을 것이다.
- 우씨…….
내 말을 완전히 이해한 개비가 심통 부리듯 바닥을 발로 찼다. 나는 그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살살 달랬다.
“이것만 정리되면 브라시다스 님하고 같이 히로비외에 가서 사흘 정도 지내자. 응?”
- 고작 사흘?
또 삐진 척 기간을 늘려보려는 수작에 녀석의 머리통을 붙잡은 손에 힘이 팍 들어갔다.
“보통 인간은 거기서 하루도 못 지낼 거다, 이 정령아.”
- 쳇!
크게 혀를 찬 개비의 모습이 불이 꺼지듯 휙 사라졌다.
다른 소설 보면 정령의 계약자들은 보통 힐링하거나 영웅이 되던데. 나는 무슨 애 하나 키우는 것 같다.
“어휴, 내 팔자야.”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내게 지금껏 지켜보던 브라시다스가 적이 실망한 얼굴로 물었다.
“아무튼 당장은 안 된다는 건가?”
“…네.”
하지만 내게는 그를 금세 즐겁게 할 방법이 있었다.
“대신에 실험을 조금 도와주실래요?”
“실험? 어떤 것 말인가?”
“다른 곳에 불을 옮겨붙게 하지 않고 타깃만 전소시킬 수 있을지 확인해 보고 싶어서요. 그런데 웬만한 마법사에게는 부탁하기 어려워서…….”
“공기도 차단하지 않고 말인가? 자네는 항상 독특한 생각을 하는군. 자, 자. 일단 이쪽으로 오게.”
모든 것은 예상대로.
나는 들뜬 듯 움직임이 빨라진 브라시다스의 뒤를 따르며 씨익 웃었다.
그의 집요하고 반복적인 실험은 분명 힘들고 지치지만 지금은 차라리 모든 힘을 쏟아부으며 집중하고 싶었다. 나를 갈아 넣는 동안은 다른 생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으니까.
에사디엔의 문제도 그렇지만, 라망드와 서먹해졌다고 생각했던 것도 개비와 그랬던 것처럼 나 혼자만 그렇게 여긴 것은 아닐까 싶어져 머리가 복잡하기만 했다.
잠시나마 이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잠시 후.
“흐, 흐어…….”
나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겨우 허리를 짚었다.
각오는 했다만 오랜만에 맛본 브 교수님의 무자비함은 전보다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어 있었다.
“자, 그 상태에서 한 번 더.”
“이, 이건 아까 했잖아요.”
“조금 전에는 바람이 세게 불지 않았나. 바람이 안 불 때도 해야지. 모든 조건이 동일해야 결괏값을 쓸 수 있는 거라네.”
내 무덤을 내가 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바랐던 대로 브라시다스에게 굴려지는 동안은 에사디엔이며 라망드 생각을 깡그리 접어둘 수 있었다.
* * *
“으아. 그래도 힘든 건 힘든 거다.”
전에도 그랬듯 브라시다스는 내가 쓰러지기 직전이 되자 실험을 딱 멈추고 보내주었다.
나는 딱히 몸을 쓰지도 않았는데 어째 욱신욱신 결리는 어깨를 주무르며 아직 돌아오지 않은 클리데인을 찾아 나섰다.
“실험도 꽤 오래 걸렸는데 이상하네. 학교 구경이 그렇게 재미있나?”
나도 마법 학교에 와본 건 딱 두 번뿐이라 이리 기웃, 저리 기웃거리다가 결국 길을 잘못 들었다.
“여기가 어디지.”
살면서 내가 길치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아무래도 정정해야 하려나 보다.
주변 분위기도 지금껏 걷던 곳과 달리 어둑어둑한 것이, 아무래도 사람이 잘 오가지 않는 건물 뒤편까지 들어와 버린 모양이었다.
“교내 방송…은 없을 테고. 아쉬운 대로 브라시다스 님한테 마법이라도 써서 찾아달라고 해야겠다.”
본격, 미아를 찾습니다. 마법 학교 편!
그렇게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돌려 왔던 길을 되짚으려던 때였다.
“…오라고 했잖아. 우리 말이 우스워?”
나직하게 윽박지르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가 또박또박한 말투로 상대를 비웃었다.
“글쎄.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던걸. 내가 왜 너희가 시킨 일을 해야 하지?”
변성기가 오기 직전인 남자아이의 목소리를 내가 들어봤다? 그리고 여기는 마법 학교. 그렇다면 이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팔로스?’
모퉁이 너머로 고개만 쏙 내밀어 확인했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팔로스가 다른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채 서 있었다.
“뭔 헛소리야. 이 자식, 날이 갈수록 싸가지가 없어지네? 하라면 할 것이지, 뭐? 이유? 죽고 싶냐?”
“이유는 중요하지.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거고…….”
그런데 입학식 연회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주눅 든 낌새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쪽 손을 허리에 짚은 모습에서는 여유마저 엿보였다.
“내가 너희 말에 따라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고.”
이내 팔로스는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특히나 너희 리포트를 대신 쓰라니. 내가 잔디 깔아주고 들어온 놈들 과제 대신 하려고 그 어려운 시험을 친 줄 알아?”
와우.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생각했다.
‘여기서도 잔디 깔아준다는 표현을 쓰는구나.’
아니, 이게 아니라.
‘장하다, 대견하다! 우리 팔로스!’
아무리 스승이 대마법사라도 팔로스 본인은 덜 여문 소년인데 저렇게 자신보다 큰 아이들이 못되게 구는데도 할 말 다 하는 모습이라니.
내가 숨은 채 혼자 흐뭇해하는 것을 모르는 팔로스는 더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 딱 잘라 말했다.
“태평하게 어슬렁거리는 누구하고 다르게 난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빠서. 이제 쓸데없는 일로 불러내지 마. 따라와 주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야.”
팔로스를 상대하던 녀석들이 씨근덕거리며 눈을 번뜩였다.
껄렁대며 협박하던 지금까지와는 분명히 다른 반응이었지만 팔로스는 알아채지 못했는지 휙 돌아서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나를 발견하기 전에 그쪽을 들여다보던 얼굴을 잽싸게 빼내 몸을 숨겼다.
‘저놈들이 이대로 단념해 주면 이따가 팔로스 앞에 깜짝 등장해서 맛있는 것 사주고 집에 갈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시시껄렁한 악당들이란 한번 자기보다 아래라고 생각한 먹잇감은 놓치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법이었다.
그 법칙은 이 ‘학교’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어서, 나는 느긋한 팔로스의 발소리에 뒤늦게 겹치는 뜀박질 소리들을 들으며 얼굴을 구겼다.
“왜 경고를 해줘도 흘려들을까.”
분명히 우리 애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는데.
화가 나는 것과 별개로 머릿속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팔로스의 위치를 가늠하고 호흡과 함께 불의 힘을 뽑아내.
딱!
부싯돌처럼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공기 중으로 풀려난 불의 힘이 한 지점으로 날아가 화르륵! 피어오르는 느낌이 선명하게 들었다.
비명과 함께 몇 명인가 쓰러지는 둔탁한 소리도.
“팔로스.”
나는 숨어 있던 벽 모퉁이에서 나와 팔로스의 손을 꼭 잡았다. 아이는 누가 보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누나? 어, 어떻게 여기에…….”
“길을 잃어버렸지 뭐야.”
가볍게 대답하자 그제야 녀석의 얼굴에 웃음이 돌았다. 그러면서도 진짜인지 확인하려는 듯 잡은 손에 힘을 꽉 주는 게 귀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