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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92)화 (92/130)

92화

“스승님을 만나러 오신 거예요?”

“그리고 네 안부도 궁금했지.”

“전 항상 잘 지내요.”

“그래?”

하나둘씩 슬금슬금 일어나는 새싹 악당들을 보며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자 팔로스가 멋쩍은 듯 말을 돌렸다.

“방금 그거, 혹시 누나가 한 거예요? 갑자기 등 뒤가 확 뜨거워져서 깜짝 놀랐어요.”

나는 후후 웃으며 대답 대신 살짝 윙크했다. 듣는 귀가 많은데 섣불리 정령 운운하기에는 자리가 좋지 않았다.

그때 넘어졌던 놈 중 한 명이 바닥에 침을 탁 뱉으며 중얼거렸다.

“여자 치맛자락 뒤에 숨어서 실실거리기는.”

얼씨구.

저런 놈들을 보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건지 의아할 따름이다. 분명 어머니도, 여자 형제도 있을 텐데 저런 말을 하고 싶을까?

너무 한심해서 화도 나지 않았다.

“여자가 아니고 어른이지. 머리에 생각 대신 페투치니 말아 넣고 다니는 아가들아.”

화 안 난다고 하지 않았냐고? 안 난 거 맞습니다. 진짜로.

저 무리 가운데 입학식 연회 때 봤던 1호, 2호도 포함되어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그나마 조금 나려고 했던 짜증도 증발해 버렸다.

“하긴. 너희한테 무슨 잘못이 있겠니? 다 어른 보고 따라 하는 건데. 그렇지?”

“무슨…….”

“팔로스 뒤에 누가 있는지 잘 생각한 뒤에 입 놀리라고, 좋은 말로 타일러도 듣지 않으면 뭐. 다른 방법이 있겠어?”

생글생글 웃으며 이런 녀석들이 가장 무서워할 법한 말을 던져줬다.

“애들을 잘못 가르친 어른을 불러서 조져야지.”

인생을 살다 보면 ‘한 번 더’ 오는 기회라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알게 될 때가 있다.

이 애들은 그 기회를 걷어찼고, 그 대가로 제멋대로 살아온 지금까지와 달리 앞으로의 인생은 소금밭 위 가시밭길이 될 것이다.

“자, 잠깐만요!”

팔로스의 손을 잡고 단호하게 돌아서자 몇 명이 그제야 존댓말을 쓰며 다가왔다. 꽤 억울하다는 얼굴이었지만, 말했잖은가? 한 번 더 준 기회를 걷어찼으면 끝이라고.

“거기서 한 발짝만 더 움직이면 쥐도 새도 모르게 불태워 버리는 수가 있어.”

진심을 듬뿍 담아 싸늘하게 뇌까렸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놈들이라도 그건 모를 수 없었던지 따라오는 발소리가 뚝 끊겼다.

그 상태로 잠깐 말없이 걷던 팔로스가 내게 물었다.

“농담이죠, 누나?”

“뭐가?”

그 아이들 부모를 부른다는 거, 아니면 불태우겠다는 거?

“제가 듣기로는 왠지 누나가 아까 그 애들을 퇴학시킬 것 같아서요.”

“아무리 이사장이라고 해도 학생 콕 집어서 내보내는 짓은 좀 그렇지 않니?”

괜히 그 애들을 동정하는 여론도 생길 수 있고. 완고한 교수들은 배움의 전당에서 용납할 수 없는 짓이라고 화를 내겠지. 빠르기야 하겠다만 피곤해지는 길이었다.

“다행이다.”

팔로스가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며 웃었다.

“저 때문에 누나가 나쁜 사람이라는 말 듣는 거 싫어요. 누구보다도 좋은 분인데…….”

“아하하.”

살면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악역으로 살고 싶지 않았을 뿐. 그래도 어린애가 이렇게 말해 주니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그리고 대단한 분인 것도 알아요.”

“응?”

대공가 직계인 건 원래 알았으면서 새삼스럽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팔로스가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마법 게이트 관리소에서 큰 사고를 막으셨다면서요. 스승님께서 몰래 말씀해 주셨어요.”

“아… 하하. 어쩌다 보니.”

그냥 내가 편하려고, 내가 척진 관계 때문에 한 일인데 이렇게 반짝이는 시선을 받아도 되는 건가. 양심이 콕콕콕 찔렸다.

‘아무래도 다음 계획은 말하면 안 되겠는걸.’

감히 우리 팔로스를 괴롭힌 애들의 부모를 불러서 작신작신 밟아주고. 당연히 갑자기 개과천선할 리는 없으니 집안 말아먹게 해주려던 계획은 혼자만 알기로 했다.

‘늦게라도 정신 차리고 공부하면 장학금 받고 마법사 되는 거고, 아니면 지금까지와는 딴판인 인생 사는 거지.’

못된 생각을 접어놓고 나는 좀 더 자연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아까 그 녀석들 말고, 지내는 데 불편한 점은 없니?”

“네. 공부도 재미있고… 다 정말 좋아요. 사실 대부분은 공부하느라 바빠서 다투고 그러지 않거든요. 저 애들이 이상한 거예요.”

혹시라도 학교에 대한 인상을 나쁘게 가질까 봐 볼까지 붉혀가며 변호하는 모습에 나는 크게 웃으며 팔로스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그래,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학교에 적응을 잘한 것 같아서. 그리고 실망한 것 같지도 않아서.

상급 학교에 진학하면 꿈과 희망만 펼쳐질 거라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렇게 생각하는 내 손을 팔로스가 흔들었다.

“진짜로요.”

“믿어. 그래도 연락은 자주 해줬으면 좋겠어.”

조금 전 일도, 내가 우연히 발견하지 않았으면 팔로스는 그 애들에게 얻어맞고도 끝까지 내게 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후원자랍시고 돈만 내밀고 너무 방관했나 싶어 한 말인데 팔로스는 미어캣처럼 안절부절못하며 변명했다.

“네? 저, 전 누나가 귀찮으실까 봐…….”

이런 말에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가 어른다운 대답이었겠지만, 나는 아직 어른이 덜되었는지 장난기가 슬그머니 올라왔다.

“네가 공부하느라 바쁜 게 아니라?”

“아니에요!”

“아까는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쁘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런 애들한테 빼앗기는 시간이 아까운 건 당연하잖아요. 누나한테 낼 시간은 있다고요.”

멘트 보소.

‘몇 년만 더 지나면 로콰이트의 아가씨들이 보낸 연서가 매일같이 날아들겠는걸.’

잘생겼지, 똑똑하지, 대마법사의 후계자지. 제법 남주 재질 아닌가. 반듯하게 자랄 팔로스를 상상하며 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고마워. 다 커도 그 마음 변하면 안 된다?”

“당연히 안 변하죠!”

“그럼 뇌물로, 오늘 누나가 맛있는 거 사줄게.”

뭐 먹을래? 하고 물어보려던 참이었다. 저쪽 멀리서, 드디어 관광을 마쳤는지 클리데인이 뛰어오며 우렁차게 외쳤다.

“아가씨!”

“저 사람은 누구예요?”

빠르게 가까워지는 그를 보며 눈썹을 조금 찌푸린 팔로스가 물었다. 티 내지 않으려 하지만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내 새로운 호위 기사야.”

“아…….”

나와 마주 잡은 손에서 힘이 살짝 풀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서로의 얼굴이 점점 더 명확하게 보일수록 팔로스의 한쪽 눈썹이 높게 치솟았다.

이상한 점은, 클리데인도 뭔가 세상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존재를 본 것처럼 놀라 우뚝 멈춰 섰다는 것이다.

‘둘 다 왜 이래? 아는 사이였나?’

고개를 갸웃하는 내게 팔로스가 빠르게 물었다.

“저 기사님이요. 누나 약혼자… 삼황자님하고 닮았는데 저분도 황자예요?”

“아, 아니야. 그냥 닮은 사람이야.”

“파혼할 거라고 했으면서 닮은 사람을 호위 기사로 들였다고요?”

윽. 역시 똑똑한 애라 그런가 단번에 정곡을 찌른다. 나는 쓰린 명치를 문지르며 변명했다.

“내가 고른 사람이 아니란다……. 우리 언니가 지명해서 그만.”

그러는 사이 다시 발을 뗀 클리데인이 우리 앞에 도착했다. 그는 아직도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내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팔로스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정말 이상하네. 이럴 사람이 아닌데.’

클리데인과 보낸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아도, 무슨 일이든 두 번 묻지 않고 차분하게 처리하는 사람이었는데.

“저기, 올세 경? 그렇게 보면 아이가 놀라요.”

팔로스는 너무 애 취급하는 게 불만인 듯 살짝 입술을 내밀었지만 클리데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사과했다.

“미안하다. 혹시 이름이 뭐지?”

팔로스가 나를 흘긋 올려다보았다. 괜찮다는 의미로 살짝 고개를 끄덕여주자 그제야 녀석이 대답했다.

“…팔로스라고 합니다.”

“내가 후원하는 아이예요, 올세 경. 대마법사님의 제자이고요.”

그러니 혹여나 평민이라고 무례를 저지를 생각은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눈치 빠른 클리데인은 금방 알아들었다.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아는 사람과 너무 닮아서, 혹시나 관계가 있나 싶은 마음에.”

아, 이런. 아무래도 클리데인은 팔로스가 그냥 평민이라 성이 없는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귀가하는 길에 대해 따로 말해 줘야겠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순간, 팔로스가 이보다 더 선명할 수 없을 정도로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저는 고아원에서 자랐어요. 사람 잘못 보신 것 같네요.”

“……!”

잠시 팔로스를 바라보던 나는 그만 힘없이 웃어버렸다.

팔로스와 같은 나이였을 때의 나는 저렇게 당당하지 못했는데. 사춘기의 한가운데였다며 자신을 변호했지만 녀석이 대견한 건 대견한 거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클리데인의 표정은 그 말을 듣고 나서 더더욱 굳었다.

* * *

약속한 대로 팔로스에게 맛있는 식사를 대접한 뒤 집으로 돌아온 나는 클리데인과 둘만 남자마자 운을 뗐다.

“도대체 무슨 일이죠, 올세 경?”

“무슨 말씀이신지요, 아가씨. 제가 결례를 저질렀습니까?”

어느새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클리데인은 차분한 낯으로 물었다.

“팔로스 말이에요. 그 애하고 닮은 사람이 있다는 게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요. 경이 아무것도 아닌 일에 그렇게 행동할 리도 없고.”

“…….”

“그렇게 많이 닮았나요?”

잠시 망설이던 클리데인은 곧 마음을 굳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같은 판으로 찍어낸 것처럼 닮았습니다. 하지만…….”

그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라망드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미뉴엘, 잠깐 시간 있어?”

“아, 지금은…….”

그렇지 않아도 개비의 말을 듣고 난 후 라망드와 이야기를 해보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클리데인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타이밍에는 좀.

하지만 의외로 클리데인은 아무렇지 않게 라망드를 받아들였다.

“괜찮습니다. 사제님께서 함께 들어주시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미처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라망드가 싱긋 웃으며 들어왔다.

“고맙군요, 올세 경.”

“별말씀을.”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에 앉는 모습에서는 조금 전의 조심스러움 따위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이가 없어서 웃는 내 손등을 라망드가 토닥토닥 두들겼고, 뭐라 한 소리 하려던 순간 그가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분위기가 심각하네.”

이 녀석, 내 표정을 보고 타이밍을 맞춘 게 분명했다. 얄미워서 째려보면서도 나는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오늘 마법 학교에 다녀왔는데, 올세 경이 팔로스를 보고 깜짝 놀라더라고. 그 이유를 물은 참이야.”

“그렇군.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편안하게 말씀해 보세요.”

고개를 끄덕인 라망드는 당장에 신도들을 만날 때 짓곤 하는 인자한 표정과 나지막한 목소리를 장착했다.

본모습을 아는 나는 그걸 볼 때마다 그랬듯 소름이 돋았지만 클리데인은 그 분위기에 용기를 얻었는지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사람을 만난 건 처음 기사가 되었을 때였습니다.”

아니,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건가요?

그냥 팔로스가 누구와 어떻게 닮았다는 이야기를 할 줄 알았던 나는 조금 당황했다.

그러나 라망드는 어떤 기색도 내비치지 않은 채 클리데인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고요한 그의 옆모습을 보며 나는 몰래 생각했다.

‘역시 사제가 천직인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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