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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93)화 (93/130)

93화

아무튼 클리데인의 이야기는 이랬다.

기사가 된 것은 좋았지만, 첫 근무가 몬스터 토벌도 카르이넨 직계의 보좌도 아닌 상단 호위인 데 클리데인은 적잖게 실망했다.

“지금은 물론 그때의 제가 한심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갓 임관한 어린애의 치기였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알았으니까 빨리 말해요.”

“예…….”

그러다 보니 자연히 훈련에도 소홀하게 되고, 태도가 나쁘니 선배들은 갈구고, 활활 태워지면 스트레스 때문에 술을 마시고, 숙취로 훈련에 빠지고, 그러면 또 선임 기사들에게 혼나고.

‘악순환이었네.’

사람이 이렇게 한번 부정적인 쳇바퀴에 빠지게 되면 그게 잘못됐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좀처럼 끊지 못한다. 그리고 또 그것을 끊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까지 더해지니, 말하자면 총체적 난국이다.

클리데인도 기사를 그만두어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그래도 기사가 되려고 훈련받던 나날을 떠올리며 꾸역꾸역 버티던 중, 그는 카르이넨 상단과 거래하는 소상인의 딸 신시아를 만나게 된다.

“저와는 다르게 일 잘하는 사람이라고 칭찬을 많이 듣더군요. 그런데 분위기라고 할지, 안색이라고 해야 할지. 너무 어두워서 저절로 눈이 갔습니다.”

당시의 클리데인은 몰랐겠지만 지금 이야기를 듣는 우리는 알 수 있었다.

그건 아마도 동질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동질감은 길만 잘 트면 쉽게도 몽글몽글한 감정으로 발전하기 마련이다.

나는 유쾌하게 생각했다.

‘이거 아무래도 쥬엘라 언니가 사람을 잘못 고른 모양이네.’

언니야 장난 겸 선물이라고 했지만 에사디엔의 ‘대체품’으로 마음을 달래라는 의도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애초에 내가 그에게 반한 건 외모 때문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에사디엔에게 느꼈던 설렘이나 흐뭇함 같은 감정들이 클리데인을 보면서는 전혀, 하나도, 설탕 가루 입자 한 개 분량만큼도 생기지 않았다.

이건 클리데인이 내게 대시를 했느냐, 안 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오롯이 내 감정 때문이었다.

‘생긴 게 문제가 아니었나.’

뒤늦게 내가 에사디엔을 왜 좋아했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클리데인의 이야기는 예상대로 핑크빛으로 흘러가는 중이었다.

클리데인이 신시아를 눈에 담은 만큼 그녀도 그에게 신경이 쓰이는 듯했다.

만남이 점점 더 잦아지면서 클리데인은 마침내 그녀에게 부끄럽지 않을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생활 패턴을 완전히 뒤바꾸었다.

술도 끊었고, 지금까지 잘못한 것을 인정하며 선임 기사들에게 반항하는 것도 그만두고 모든 훈련에 성실하게 임한 것이다.

“제가 지금 여기 있는 것도 모두 신시아 덕분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클리데인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환하게 빛났다.

일전에 소중한 사람에 대해 언급했을 때와 똑같은 얼굴. 마법사가 되고 싶어 했다던 사람이 신시아였다는 걸 자연스럽게 유추할 수 있었다.

긍정적인 기운은 우울함이나 슬픔보다 일견 약해 보일지 몰라도 돌아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빠르게 퍼진다는 걸 알 수 있다. 변화한 클리데인과 더불어 신시아의 분위기도 점점 밝아졌다는 걸 보면.

하지만 단 한 가지, 가족 이야기가 나올 때면 신시아는 전보다도 더 어두워졌다고 했다.

“저를 만나면 행복하지만, 본인이 이런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했습니다.”

마치 자신이 그 말을 하는 신시아가 된 것처럼 클리데인은 침울한 얼굴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알고 보니 그녀에게는 동생이 한 명 있었다더군요. 그런데 어릴 적, 신년제 기간에 로콰이트에 왔다가 잃어버렸다고…….”

“아.”

이제야! 팔로스를 보고 클리데인이 놀랐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멀고 먼 길을 돌아온 기분이야.’

그나저나 신년제 기간의 로콰이트라면 ‘인산인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사람이 몰린다고 들었다. 그래서 신시아네 가족처럼 아이를 잃어버리는 집도 꽤 있다고.

로콰이트는 프레세리아 제국이 통일되기 전부터 있던 도시라 계획적으로 구획이 나눠지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점점 더 늘어나는 인구 때문에 성벽 밖으로도 거주지가 우후죽순 생겨 후대에 외성벽을 하나 더 쌓았다고 했으니, 그 복잡한 와중 아이 한 명을 찾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부모님의 일도 있었고, 겸사겸사 아이들에게 신년제를 구경시켜 주려고 동행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잠시 부모님이 거래처를 찾으며 신시아에게 동생을 맡긴 사이에…….”

“인파에 떠밀려서 동생의 손을 놓쳤나 보군요.”

한국에서도 옛날에는 그런 일이 많았다고 들었다.

그런데 소중한 동생을 잃어서 자책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내 생각에 이 일은 신시아의 잘못이 아니었다.

“애초에 애한테 애를 맡긴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신시아 양도 그 당시에는 보살핌을 받아야 할 아이였는데. 안 그래요?”

안쓰러워서 혀를 차며 말하는 내게 꽂히는 시선들이 영 이상했다. 마치 ‘어? 여기서 이런 답이 나온다고? 풀이 과정이… 어라?’라고 생각하는 듯한 눈빛에 나는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왜들 그렇게 봐?”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긴 한데, 네 사고방식은 꽤 특이하다 싶어서.”

라망드에 이어 ‘으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클리데인도 말을 보탰다.

“저도 형제는 없습니다만 주변을 보면 보통 작은아이는 큰아이한테 맡기지 않습니까?”

“글쎄, 난 그런 주변이 없어서 모르겠는걸. 우리 언니들이 날 업고 다니는 모습도 상상하기 어렵고.”

나는 어깨를 한 번 들썩이고는 피식 웃었다.

‘네 생각이 어떻든, 혹은 더 나은 생각이 있든 간에 주변이 이러니 똑같이 따라와.’라는 건, 대부분 자신이 강요하는 줄도 모르고 내뱉는 강요다. 거기에는 모르쇠로 대응하는 게 최고고.

신분제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공작 영애인 덕분에 이런 상황에서 ‘네 생각이 틀렸고 내가 무조건 맞아.’ 하고 우기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는 것만큼은 장점이었다.

“아무튼 이미 일어난 일 가지고 왈가왈부하고 싶은 건 아니에요. 그저 신시아 양이 의도하지도 않은 사고에 아직까지도 짓눌려 있는 게 아쉬울 뿐이지.”

“저도 그게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신시아를 빼닮은 팔로스 군을 봤을 때는 정말이지 구원자를 만난 듯한 기분이었는데…….”

클리데인은 우울해하는 신시아를 떠올리는 듯 자신이 더 어두운 얼굴로 괴롭게 읊조렸다.

‘좋을 때구나.’

상대의 아픔이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다니. 이 둘은 어쩐지 잘될 것 같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진심으로 신시아 양을 좋아하는군요, 올세 경.”

“예? 아…….”

자기가 그런 얼굴을 했다는 사실도 몰랐는지 놀라 고개를 들었던 클리데인은 내 표정을 보고 귓가를 붉혔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음? 갑자기요?”

“실은 호위 기사로 임명되기 전에, 약혼자이신 황자님과 제가 닮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언니가 그런 말까지 하던가요?”

“아, 아니요. 상단주님께서는 그저 아가씨 곁에서 무엇을 경험하든 평생 입 닫… 아니, 반드시 비밀을 유지하라고만 하셨습니다.”

정령이나 현재 상황 때문이었겠지만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노예 계약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을 당할 줄 알고 거기에 오케이를 해?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던지자 클리데인이 씨익 웃었다.

“주군께서는 공정하신 분입니다. 부당한 명령을 내리지 않으시고, 임무를 수행하다 다친 사람은 끝까지 책임을 져주시죠.”

이렇게까지 믿음을 얻다니. 정말 우리 어머니는 대단한 분이시다.

‘그렇다면 나도 앞으로 덜 조심해도 괜찮겠어.’

씻고 자는 시간만 제외하면 항상 붙어 있을 정도로 밀접 경호 중이라 개비나 에사디엔 이야기를 하기가 불편했다.

본인이 우리 집안에 저렇게 충성을 하고, 나도 개인적으로 빚을 지울 생각이니 지금보다는 더 믿을 수 있겠지.

나는 대사제님께 친히 전수받은 상냥한 미소를 한껏 머금으며 말했다.

“올세 경과 신시아 양이 잘되기를 응원할게요. 그렇지, 라망드?”

내 시선을 받은 라망드도 예의 ‘사제 웃음’을 지으며 믿음직하게 말했다.

“그럼. 사랑과 아름다움의 신, 플렌드나 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신시아 양에게 동생이 사라졌을 때의 나이나 인상착의를 물어봐 줄래요? 팔로스가 지냈던 고아원 원장에게 확인해 보도록 할게요.”

“두 분…….”

클리데인은 잔뜩 감동받은 얼굴을 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직 결과를 들은 것도 아닌데요.”

하지만 클리데인은 거듭해서 감사를 표했고, 라망드가 꽤 오래 달랜 후에야 방을 나섰다.

‘앗, 잠깐. 올세 경이 빠져 버리면…….’

라망드하고 나, 둘만 남은 거잖아!

나는 몰래 입술을 잘근거리며 라망드의 옆모습을 곁눈질했다. 조용히 접시만 내려다보는 시선에 나도 질세라 찻잔을 들어 표정을 가렸다.

그러고는 잠시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라망드, 있잖아.”

“저기, 미뉴엘.”

동시에 입이 열렸다.

그 순간 어색함이 깡그리 사라졌다. 우리는 눈을 마주치며 뻘쭘하게 웃었고,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분위기로 라망드가 말했다.

“너부터 말해.”

“응.”

나는 사양하면서 시간 낭비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라망드의 양보를 받아들였다.

“미안했어, 라망드. 이 말을 하고 싶었어.”

“미안했다, 고……?”

라망드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대체 무슨 뜻으로 받아들인 건지 의아해하는 한편, 그가 이 정도로 놀라는 건 처음이라 다급히 팔을 잡았다.

“에사디엔 때문에 너한테 다짜고짜 화냈던 거 말이야.”

“…….”

“이유를 들었는데도, 내가 그 상황이었더라도 말하기 힘들지 않을까 싶었는데도. 그 순간 느낀 배신감 때문에 다른 건 다 지워진 것처럼 화만 냈어.”

이런 상황이 올 때마다 느낀다.

몸은 어른이지만, 아니 이전 생까지 살아온 시간을 합치면 훨씬 더 어른이지만 마음은 놀랄 정도로 미숙해서.

몸만 큰 아이 같다고.

중학생 때 만났던 교생 선생님들은 다 어른 같았다. 열 살 미뉴엘의 몸에 들어와 처음 만났던 언니들, 지금 내 나이 또래였던 언니들도 정말이지 성숙한 어른이었는데.

나는 아직도 아이 같기만 해서.

“그런데 개비가 그러더라. 자기는 아무렇지 않은데 나 혼자 화를 낸 거라고. 애초에 나만 토라지고 속상해했던 거야.”

뿐인가. 외골수에 독불장군이 따로 없다.

“사실 요즘 너하고 사이가 서먹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네가 내 눈치를 보고 있어서였겠지.”

돌이켜보면 에사디엔에게서 돌아서던 날도 그랬다.

에사디엔과 라페슈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머리 뚜껑이 열려버렸다. 이전부터 그가 쌓았던 업보가 있으니 충분히 오해할 수 있었던 상황이기는 했다.

하지만 흥분이 가라앉은 후에도, 에사디엔이 온갖 모습을 보여가며 내게 사과할 때도 나는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미안, 라망드. 아무리 친한 친구라지만 그렇게 대하면 안 됐는데.”

이렇게 돌아보니 내 모습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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