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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94)화 (94/130)

94화

힘없이 라망드의 팔에서 떨어지는 내 손을 그가 받아내듯 쥐었다.

“나도 생각해 봤어. 내가 왜, 처음 네 방에 있던 괴생명체를 걷어차서라도 쫓아내지 못했는지.”

“왜… 그랬는데?”

이건 나도 궁금했던 부분이라 머뭇거리며 물었다.

에사디엔이 라망드에게 애원했을까? 아니면 내가 괴로워할 때 파혼을 제안했던 게 뒤늦게 후회되서였을까?

여러 가지 가설을 생각해 봤지만 무엇 하나 이거다,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리고 역시, 라망드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답은 상상도 못 한 것이었다.

“너한테 미움받을 용기가 없었어.”

“뭐? 미움?”

“나는 네가 하고 싶어 하는 건 다 따르잖아.”

순간적으로 ‘뭐, 네가?’ 하고 반문할 뻔했지만, 진지한 분위기임을 떠올리고 가까스로 참을 수 있었다.

넘어가 주는 건지, 다행히 눈치채지 못한 건지 라망드는 가만히 말을 이었다.

“너한테 도움이 되고 싶었으니까.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내 역할은 하나였잖아. 네가 회복하도록 돕는 것.”

아니라고, 나한테 너는 수많은 의미를 지닌 사람이라고 반박하려 했지만 라망드는 눈빛만으로 나를 제지했다.

“그런데 네가 이제는 정령과 계약하면서 건강해졌고. 나는 쓸모를 다했어. 그러니까…….”

“라망드!”

그다음 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에 더 견딜 수 없어진 나는 크게 외치며 그의 말을 끊었다.

이렇게 갑자기 라망드가 떠나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

“나, 나…….”

“미뉴엘?”

갑자기 헐떡이는 내 손을 라망드가 꽉 잡았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전속 치료사로 여길 생각은 없다더니. 위선자.’

양심이 속삭이며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 이유가 아니면 라망드는 이곳에 더 머물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친구는 멀리 떨어져서도 서로를 생각하며 위한다던데, 십 년이 지나서 만나도 어제 본 것처럼 편안하다던데 나는 우리도 그럴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나, 다 나은 것 아니야. 개비가, 앞으로 나한테 남은 시간은 5년뿐이래.”

나는 생각보다도 훨씬 더 라망드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보낸 십 년을 지켜봐 준 사람에게.

이 순간 나는 그 사실을 절절하게 깨닫고 말았다.

* * *

‘화해는 참 좋구나.’

서먹해졌던 적이 없는 것처럼 라망드와 차를 마시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편안한 와중에도 불쑥불쑥 치솟는 불안감에 나는 돌연 찻잔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쩐지 조금 불안한데.”

“뭐가? 어지럽기라도 해?”

내 수명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안 뒤로 라망드는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르게 태도가 바뀌었다.

“쉬어야 하는 것 아냐? 가서 누울까?”

얇은 유리로 만든 조형물을 대하는 듯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말했다는 후회와 이러다 언니들이 수상쩍게 생각하는 것도 금방이라는 초조함이 동시에 교차했다.

“야, 평소처럼 해. 당장 안 죽어.”

어금니를 꽉 깨물며 혹시 누가 들을까 싶어 잔뜩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

그런데 라망드의 대답이 없어 바라보자 그가 무척이나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아닌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무자비하게 깨물며 보랏빛 눈을 떠는 모습은 일견 울음을 참는 것 같기도 했지만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너 왜 웃냐?”

“푸하하하핫!”

그제야 라망드가 배를 쥐며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테라스 아래에서 지나가던 하인들이 놀라 무슨 일인가, 하고 올려다볼 정도로 큰 웃음이었다.

“아… 네가 적응 못 하고 이상하게 쳐다볼 때마다 웃음 참느라 얼마나 혼났는지.”

“뭐어?”

그럼 지금까지 하던 공주 대접이 다 장난이었단 말인가!

충격받은 내게 추가타가 날아들었다.

“미뉴엘 카르이넨, 너 바보야?”

“뭐?”

‘뭐?’만 반복하다 보니 정말 스스로가 바보 같기는 했다. 하지만 라망드의 표정은 진지해서, 이번에는 장난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아, 뭔가 더 기분 나쁜데?’

하지만 기분 나쁘다고 할 일이 아니었다. 라망드는 나보다도 더 내 일에 꼼꼼하게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네 말 듣고 바로 개비한테 물어봤어. 그랬더니 전보다 힘이 늘어난 만큼 남은 수명도 늘었다던데. 그리고 개비가 완전히 힘을 되찾으면 너도 평범한 사람들만큼 살 수 있을 거래.”

“아… 그래?”

그런 식으로 수명하고 불의 힘이 정비례할 줄은 몰랐지. 오랜 기간 괴롭힘당했던 기억이 있다 보니 그게 나를 살릴 거라는 생각은 좀처럼 할 수가 없었다.

라망드가 더는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을 감추지도 않고 꾸짖었다.

“‘아, 그래?’라고? 어떻게 자기 상태를 그렇게 몰라? 이 바보야.”

“자꾸 바보, 바보 하지 마!”

“왜, 듣는 바보 기분 나빴어?”

이제 더는 못 참는다!

“야아아! 라망드 플렌드나!”

저 홀쭉한 볼을 호떡 반죽처럼 쫙 늘여놓으리!

하지만 그렇게 다짐하며 벌떡 일어서서 라망드의 얼굴로 손을 뻗는 순간.

따악!

이마에서 맑은 소리, 고운 소리가 울리며 따끔한 통증과 함께 시원한 신성력이 동시에 흘러들어 왔다.

이거야말로 ‘병 주고 약 주고’지.

“우씨… 한 번을 안 져주네.”

나는 이마를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반면 오랜만에 라 첨지다운 면모를 보인 라망드는 씩 웃었다.

“그런데 불안하다니, 대체 뭐가.”

말 돌리는 솜씨도 수준급이라니까. 이래저래 지기만 하는 기분이 들어 부루퉁하게 대답했다.

“엘가 언니하고 엄마가 오실 때가 지나지 않았나, 싶어서.”

“걱정하지 마. 처음부터 기한을 정하지는 않으셨잖아.”

“그랬지.”

하지만 감이라는 것이 있다.

어머니는 최대한 빨리 대공령을 안정시킨 후 오겠다고 했고, 어머니 말이라면 철석같이 믿는 나도 금방 끝나겠거니 했다.

‘아무리 늦어도 저번 주쯤에는 마무리될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늦어지는데도 라망드의 말을 강하게 부정할 수 없는 건, 무슨 일이 있다면 본성에서 사람이든 마법 통신이든 뭐라도 보냈을 텐데 그러질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쥬엘라 언니도 바쁜데 매일 들볶을 수도 없고.’

라망드의 말대로 진정하고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겠다. 엄마도, 언니도 강하니까 걱정할 필요 없을 거다.

그렇게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저녁을 맞았다. 라망드와도 화해했겠다, 나는 이제 슬슬 에사디엔의 얼굴을 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를 몇 번이나 구해 줬는데 그렇게 외면하기만 하다니.’

다시 한번 깊은 반성의 시간을 가지며.

지금까지 있었던 사건, 사고들을 되짚어 보면 내가 에사디엔을 구한 것보다 그가 나 때문에 희생하거나 다친 횟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갑자기 커진 것도 날 구하기 위해서랬지.’

그런데 나는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굴었나.

‘지금 얼굴을 맞대고 있는 이 순간도 싫다고요. 파혼해요!’

‘아무것도 안 느껴져요.’

“으아아아아!”

이건 이불이 뚫릴 때까지 차도 없어지지 않을 부끄러움이었다. 뭐에 취한 것도 아닌데 대체 어떻게 그랬지?

한창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할 때였다. 평소와 달리 다급한 노크 소리와 함께 클리데인이 나를 찾았다.

“아가씨, 내려와 보시라는 상단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언니가 나를 찾는데 저렇게 급히 말한다고? 좋지 않은 예감에 붉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단숨에 식어 내렸다.

잔뜩 흐트러진 머리를 서둘러 정리하고 현관홀로 내려가자 낯익은 사람이 서 있었다. 어머니의 부관이었다.

“경!”

“아가씨,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반가운 마음에 남은 계단을 뛰어 내려가자 부관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 웃음으로 다 가리지 못한 어둠이 보여 불길한 예감은 커져만 갔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누르며 애써 밝게 말했다.

“이제 소탕이 마무리되어 가는 거지? 그래서 경이 먼저 온 거지?”

“공녀님들.”

쥬엘라 언니가 조용히 내 곁으로 다가와 손을 잡아주었다. 부관은 그런 우리를 번갈아 보며 씁쓸하게 말했다.

“주군께서는 오지 못하십니다.”

“아…….”

그 말을 들은 순간 언니가 희게 질린 얼굴로 크게 휘청했다. 반사적으로 언니를 잡아 지탱한 나는 그저 멍하기만 했다.

놀란 머리는 몇 분처럼 느껴지는 몇 초가 지나서야 낡은 컴퓨터처럼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전사는, 아닐 거야. 아니! 전사는 아니야.’

부모님 중 한 분에게든, 아니면 엘가 언니에게든. 만약 토벌 도중 어떠한 변고가 발생했다면 이토록 조용히 말하고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생각한 것을 쥬엘라 언니가 떠올리지 못할 리는 없다. 그 방증으로 언니도 깊게 심호흡하며 이내 꼿꼿하게 자세를 고쳤다.

“먼 길을 왔으니 쉴 시간을 주는 것이 우선이겠네만, 경도 우리 마음을 모르지는 않겠지. 무슨 일인지 자세히 말해 보시게.”

“저는 괜찮습니다. 막내 아가씨 덕분에 마법 게이트로 이동할 수 있었으니까요.”

나는 뻘쭘하게 미소 지었다.

“언니, 그러지 말고 최소한 앉아서 이야기하자.”

“아… 그래. 그러자.”

침체된 분위기 탓에 어깨마저 무거워진 듯했다. 응접실로 가는 길이 황성에 가는 것만큼이나 멀게 느껴졌다.

* * *

식사는 나중에 부관의 방으로 올리라 지시해 두어서 티 테이블 위에는 간단히 말린 꽃을 띄운 꿀차만 올라왔다.

나는 단것을 좋아하지 않아 두어 번 입을 대고 말았지만 북부에서는 꿀이 귀하다 보니 부관은 반갑게 여기며 맛있게 마셨다.

그러나 단것 덕분에 느꼈던 즐거움도 일 앞에서는 금세 사그라드는 법이라, 그는 곧 얼굴을 굳히며 말문을 떼었다.

“몬스터들의 침범이 끊이지 않습니다.”

“평년보다 그 기간이 길어지고 있다는 거야?”

“그렇게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그 녀석들도 싸울 수 있는 개체 수는 한정된 법이라, 언제나 몇 번의 침공으로 적당히 먹을 것을 모으면 물러가곤 했는데 말입니다.”

몬스터가 인간과 말이 통할 리는 없으니 이건 북부인들이 체득한 사실이었다.

겨울이 되면 봄까지 날 식량을 얻기 위해 인간들의 땅으로 내려온다.

몬스터라 해도 본능과 지혜가 없는 것은 아니라 자신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어느 정도 식량을 구하면 다시 산 너머로 돌아가는 것이고.

부관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본래라면 터전을 지킬 비전투원까지 끌려 나오는 것 같달까요.”

겨울마다 밀려오는 몬스터 웨이브는 몇십 년, 아니 이미 몇백 년에 걸쳐 이어져 온, 북부인들에게는 거의 장마나 태풍과 다름없는 현상이었다. 어느 정도 밀려들다가 만다는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 현상이 틀어졌다고? 그렇다면 전과 달라진 것이 대체 무얼까.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곧 한 가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설마 나 때문인 걸까? 정령석이 제자리를 지키지 않아서?”

하지만 부관은 눈썹을 좁히며 바로 부정했다.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이상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만…….”

말끝을 흐리는 그를 언니가 재촉했다.

“우리는 경을 믿으니 어서 말해 보게.”

“몬스터들이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굴고 있습니다. 현장에서 저희는 그리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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