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나와 언니는 잠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전선에서 직접 칼과 손톱을 맞대는 기사들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어머니도 그들의 느낌을 무시하실 분이 아니었다.
“그리고 다소 수상한 점이 있습니다. 북쪽 끝 마을 주민이 말하길, 일전에 마법사 로브를 입은 자들이 찾아와 산을 넘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고 합니다. 정말로 누군가가 산을 넘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만…….”
만에 하나 그들이 몬스터에게 무슨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대로 봄이 올 때까지 싸우게 된다면 우리 기사들과 몬스터가 공멸하게 될 수도 있다는 예측에, 엘가 언니가 소수의 정예를 이끌고 마침내 산 너머 몬스터들의 본거지로 향했단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손가락 끝이 노랗게 질릴 정도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깎아지른 듯 험준한 산세 때문에 한여름에도 눈이 녹지 않고 발을 들이면 살아 돌아오는 사람이 드문 그곳에. 우리 언니가.
“그 때문에 대공께서는 자리를 비우실 수가 없어졌습니다. 하나 이쪽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니 저라도 가 있으라 하셨습니다.”
“…….”
방금 들은 말 때문에 쥬엘라 언니와 내가 입을 떼지 못하자 부관이 흐릿하게 웃었다.
“물론 제가 주군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서둘러 그에게 말했다. 누구보다 그가 좋은 사람인 걸 아는데 상심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냐. 경이 와줘서 정확히 상황을 알 수 있게 됐잖아. 그리고 아까 언니가 말했듯 우리는 경을 믿어.”
다만 엘가 언니의 안부, 그리고 부관의 빈자리로 조금 더 고생할 어머니가 걱정될 뿐이었다.
‘다른 부관들이 있기는 해도 이 사람이 가장 오래 함께했으니까.’
그래서 믿고 우리를 지키라 보내신 거겠지.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어, 경. 엄마가 오실 때까지 잘 부탁해……. 되도록 조용히 지나가기만 바라고 있지만.”
“저도 진심으로 그러기를 바랍니다, 아가씨.”
인사한 부관이 응접실에서 나가자마자 쥬엘라 언니는 스르르 쓰러지듯이 내게 기댔다.
언니는 언제나 도도하고 꼿꼿하지만 그건 가족이라는 단단한 지지대가 내부에 꽂혀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 지지대가 불안해지자 언니도 동요를 좀처럼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언니는 농담처럼 웃었다.
“진짜 다 컸네, 우리 아기.”
“그러엄.”
나 스스로는 덜 자란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언니에게 지지대가 될 수 있다면 여유 있는 척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상단에는 아직 별일 없지?”
“응. 아무래도 해외에서 오래 지낸 탓에 제국의 상계까지는 발이 닿지 않은 모양이야.”
그나마 다행이었다. 카르이넨 상단이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이기는 하지만 다른 거대 상단들이 마음먹고 손을 잡는다면 고전할 수밖에 없다.
그런 최악의 상상까지 했던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 미뉴엘.”
“응?”
언니는 어느새 멘탈이 회복되었는지 예의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엄지를 들었다.
“지난번에 네가 말했던 집안들의 채권을 다 매입해 뒀어. 언제든 말만 하렴.”
팔로스를 만나고 왔던 날, 갱생의 여지가 없는 녀석들의 집안을 미주알고주알 언니에게 이르기는 했다. 그런데 벌써?
놀라움과는 별개로 그 말을 듣자 입가에 사악한 웃음이 마구 번져나갔다. 이제 그 사람들, 채권을 모조리 카르이넨에서 쥐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꽁무니에 불붙은 것처럼 달려오겠지.
‘아, 역시 악역 노릇 하는 게 제일 재미있는 것 같단 말이야.’
기다려라, 불량 학생들아. 너희의 공부를 향한 의지를 확인해 주마.
하지만 사건은 숨 돌릴 틈이 없이 일어나는 법이라, 정의 구현하는 악역 놀이는 잠시 접어두어야만 했다.
* * *
늦은 시각 일을 마치고 침실에서 잔을 기울이던 황태자의 손이 딱 멈췄다. 곁에서 시중을 들던 후궁, 군나르 엠브로세티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전하?”
“조용히.”
한마디로 군나르의 입을 막은 루미에르는 언제나 손 닿는 곳에 두는 검을 빠르게, 그러나 조용히 집어 들었다.
‘이상하군.’
조금 전 분명히 바깥에서 사람이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기사였는지 견갑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피곤에 전 루미에르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수상쩍을 정도로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다.
루미에르는 자신을 침입자라고 가정하고 상상했다. 보통 이런 경우, 단번에 목표를 처리하기 위해 문 뒤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랑베르는… 아.’
가장 먼저 자신의 남편이자 근위대장인 랑베르 공을 떠올리던 루미에르가 짧게 혀를 찼다.
군나르가 후궁으로 들어온 뒤 랑베르와 그녀의 사이는 농담으로라도 좋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 일로를 걸었다.
다만 각자의 위치가 있으니 서로 아슬아슬하게 감정을 외면하던 어느 날, 도화선이 다 타버린 폭탄이 폭발하듯 그들은 엄청난 부부 싸움을 했다.
그 뒤로 감정을 가라앉히겠다며 근신을 겸해 랑베르는 본가에 머무르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닥치니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바로 랑베르였다. 예쁘장한 후궁이 아니라.
루미에르는 갑자기 살벌해진 그녀의 기세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군나르를 보며 그가 얼마나 전력이 될지 가늠해 보았다.
그리고 그 답은.
‘짐이군.’
마른 근육이 잡혀 있기는 하지만 굳은살이 하나도 없는 손바닥, 길고 여리여리하기만 한 손가락.
그러나 일단 자신의 사람이 된 이상 방치할 생각은 없었다. 무려 3층에 위치한 침실에서 창문을 통해 뛰어내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내 뒤에 있어라.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서지 말고.”
“예, 예.”
군나르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입을 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주 끄덕여주던 루미에르는 잊었다는 듯 덧붙였다.
“비명 지르지 말고.”
기사가 아니면 의외로 피에 면역이 없는 남자가 많다는 사실을 루미에르는 경험으로 알았다. 비명이 들리면 정말이지 온 신경이 다 거슬렸다.
군나르가 다시 한번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루미에르는 여유롭게 검을 한 바퀴 돌리며 손목을 풀었다.
콰당탕!
이때만 기다렸다는 듯 문을 부수고 뛰어 들어오는 암살자를 루미에르는 단숨에 해치웠다. 아무리 그녀가 풍류를 좋아한다지만 황태자 자리는 카드 게임으로 부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습격이 너무 쉽게 지나간 탓일까. 루미에르는 그녀답지 않게 방심해 버렸다.
“놀랐겠구… 헉!”
얇은 밧줄이 뒤에서 소리도 없이 다가와 검을 내린 루미에르의 목을 졸랐다.
“죄송합니다, 전하.”
발버둥 치던 그녀는 나지막한 사과를 듣고 밧줄의 주인이 군나르임을 알게 되었다.
“큭, 네가, 어째…서.”
하지만 대답 대신이라는 듯 더욱 옥죄는 밧줄의 힘에 눈앞이 핑그르르 돌았다.
이유를 듣지 못한 채 정신을 잃고 쓰러진 루미에르를 군나르가 번쩍 안아 들었다. 그녀가 가늠했던 것과 다르게 강한 힘이었다.
“당신은 제게 잘 대해 주셨습니다.”
황태자이니만큼 다소 거만하기는 했지만 좋은 사람이었다. 군나르는 아버지의 하렘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나는지 잘 알고 있었으므로 루미에르의 관대함에 감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군나르는 치트룸인이었다. 오스틴의 말을 떠올리며 그는 루미에르를 향한 미안한 마음을 지웠다.
‘치트룸도 프레세리아처럼 온화한 태양 아래서 번성할 수 있다.’
불덩어리 같은 햇볕,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사막이 아니라 농사지을 수 있는 기후, 정착할 수 있는 땅이라니.
치트룸의 그 누가 그 말을 듣고 거부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10년 전, 프레세리아 남부 지방에 눈이 내렸을 때 일시적이나마 치트룸의 온도가 엄청나게 내려갔다는 기록도 있었다. 아니, 왕실에는 아직도 그날을 기억하는 자들이 많았다.
군나르도 그중 한 명이었다. 어릴 적이었지만 맨살에 닿은 공기가 서늘하게 느껴졌던 감각은 지금도 잊을 수 없었다.
당연히 치트룸 왕은 손을 잡자는 오스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지금 군나르가 루미에르의 후궁으로 들어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왕족이라면 누구나 나라를 위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겠지요.”
죄송합니다.
마지막으로 중얼거린 군나르는 이내 그를 찾아온 사람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잠시 그가 황태자궁에서 기다리던 그사이, 황성 곳곳에는 불이 밝혀졌고 여기저기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이쪽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걷던 군나르가 드디어 멈췄다. 벽을 감싼 담쟁이마저 말라붙어 을씨년스러운 폐궁 앞이었다.
루미에르 황태자는 그곳에서도 가장 안쪽에 유폐되었고, 그녀가 갇힌 방에는 커다란 자물쇠가 달렸다. 군나르는 망치로도 쉽게 부술 수 없을 커다란 자물쇠를 한동안 내려다보다가 돌아섰다.
* * *
변고는 황태자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황태자가 침입자를 맞았던 바로 그 시각, 황제가 머무는 본궁에서도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슬슬 교대 시각이군. 오늘 바로 귀가하나? 아니면 같이 한잔……?”
이제 곧 퇴근이라며 함께 경계를 서는 동료에게 웃으며 말하던 병사가 눈을 크게 떴다. 가슴 부근에 지져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며 곧 숨이 벅차올랐다.
“자네, 왜…….”
“미안하게 됐네.”
그가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것은 사랑하는 가족이 아닌 뻔뻔하게도 사과를 입에 담는 무표정한 낯짝이었다.
그런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본궁 바깥쪽에서 벌어진 소요는 서서히 중심부까지 번져 곧 황실 기사단, 로열 가드들도 알아채게 되었다.
로열 가드의 단장은 마침 딸의 생일이라 휴가를 낸 참이었다. 대신해서 자리를 지키던 부단장이 긴장한 내심을 숨긴 채 침착하게 지시했다.
“무슨 일인지 확인하도록. 나머지 인원은 경계 정도를 올린다.”
“예!”
하지만 병사들에게 벌어진 일은 로열 가드들 사이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식사하고 훈련했던 동료의 습격에 많은 대원이 당했다.
다만 기사의 훈련은 그리 녹록하지 않아서 재빨리 반격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 무슨… 너희는 황제 폐하를 모시는 자의 긍지도 없는 것인가! 당장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어차피 방위군이 들어오면 너희에게 승산은 없다. 그러니 목숨이라도 건지려거든 지금 당장!”
그러나 황성 안에서 검을 빼 들었다는 것은 이미 반역을 뜻했다. 그리고 반역자에 대한 처벌은 가문의 멸족이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 먹히지 않을 회유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한 명의 희생이라도 더 막기 위해 부대장은 들끓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가 지키는 문에서 세 개의 문을 더 거쳐야 황제의 침실이 나오지만 조용한 밤에는 소리가 더 잘 퍼지는 법이다. 잘 준비를 마친 황제의 귀에 마침내 소란이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