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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96)화 (96/130)

96화

“음.”

황제의 눈썹 한쪽이 위로 솟구치자 시종장은 단번에 그의 심기가 불편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신이 확인하고 다스리겠습니다. 폐하께서는 편히 주무소서.”

“그래. 자네도 들어가 쉬게나.”

하지만 문을 연 시종장을 맞은 것은 바깥에서 대기하던 시종들의 시신이었다. 곧이어 그의 등을 뚫고 나온 검 끝을 보고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퀸튼!”

나이가 지긋해진 후로는 불러본 적 없는 시종장의 이름을 입에 담았으나 이미 절명한 그는 고개조차 돌리지 못한 채 축 늘어졌다.

휙.

시종장의 몸이 내동댕이치듯 옆으로 치워졌다. 그 뒤에서 나타난 얼굴에, 소싯적 산전수전 다 겪었던 황제마저 심장께를 움켜쥐었다.

“내 네가 반성했다고 믿었거늘. 지금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 아들아.”

둘 다 빤히 답을 아는 질문에 오스틴은 피식 웃었다. 황제에게서 물려받은 금발과 황후를 닮은 녹색 눈이 흔들리는 등불을 반사하며 번쩍거렸다.

“황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 아버지.”

오스틴의 등 뒤로 그의 편에 붙은 근위대원들이 도열했다. 어느새 황성 문은 활짝 열린 채 물밑에서 그의 손아귀에 들어간 파벌들의 입성을 환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병사가 들어간 후, 문은 굳게 잠겼다.

* * *

어머니의 집무실에 들어선 나는 작은 문 앞에서 한참이나 망설였다.

“으으으음.”

에사디엔을 한 번 만나기는 해야 하는데, 너무 오래 처박아 둔 뒤에 얼굴을 비추는 게 아닐까 싶어서였다.

“만약 내가 갇힌 입장이었다면… 들어서자마자 먹던 빵을 얼굴에다 던져줬겠지.”

으아아. 그래도 설마 에사디엔은 안 그러겠지. 태생이 악역인 나하고는 다른 사람이니까.

“아닌가? 그러려나?”

아니, 아니지. 애초에 에사디엔이 여기 있는 건 동물인 척 나를 속였기 때문이잖아. 그런데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

…그게 ‘척’한 거라고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 나도 모르겠다!”

갈팡질팡, 문고리를 잡았다 놓기를 반복하던 나는 결국 커다랗게 숨을 몰아쉬며 문을 확 열어젖혔다.

이대로 돌아서면 또 며칠 동안 끙끙댈 나를 안다. 게다가 지금이 아니면 어쩐지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어찌나 세게 문을 열었던지, 나는 무언가에 떠밀린 것처럼 안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아, 노크가 먼저였는데.’

그 생각이 든 건 이미 에사디엔과 눈이 마주친 후였다. 침대 옆에 기대 책을 읽던 그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뉴엘.”

“아, 안 주무셨네요, 아직.”

“해가 진 후에는 시각을 가늠하기가 어려워서. 그러다 보니 바깥이 밝아지면 잠들게 되더군.”

에사디엔은 무덤덤하게 말했지만 듣는 나는 어깨를 움찔 떨 수밖에 없었다.

‘갇혀서 생활 패턴 망가졌다고 항의하는 건가?’

이럴 때는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시험지가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문제] 아래 보기 중 대답으로 옳은 것을 고르시오. (300점)

1. 그래도 사람은 제때 자고 제때 일어나야 합니다.

2. 아주 부엉이가 다 되셨네요. 육해공 다 체험하시려면 다음에는 거북이가 어때요?

3. 소인이 잘못하였나이다. 통촉하시옵소서, 저허언흐아아!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맹렬히 굴려도 답을 고르기가 어려웠다. 빤히 쳐다보는 에사디엔의 시선에 견디지 못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 그, 네.”

내가 택한 답은 셋 중 아무것도 아니었다. 300점이나 잃은 것이다.

‘아니, 그 300점을 누가 주는 건데. 에사디엔이?’

마음이 안정되지 않으니 이상한 생각만 들었다. 나는 고장 난 로봇의 심정을 실시간으로 체험하며 내부를 둘러보았다.

처음 에사디엔이 갇힐 때와는 퍽 다른 풍경이었다.

아마도 건너편에 욕조가 있는 듯한 파티션, 새로 들인 작은 테이블과 의자. 침대 밑 바닥에 깔린 장모 카펫과 그 옆으로 쌓인 책들.

그곳에 시선이 닿은 것을 알아챈 에사디엔이 변명하듯 말했다.

“책 대부분은 테오도르가 가져다주었다. 집사도 요청하는 것은 잘 들어주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마치 내가 그를 걱정했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테오가 방문한 건 알고 있었어요.”

에사디엔의 처분은 상당히 애매했다.

황족이라 심하게 대할 수도 없고, 황제 앞에서 고발하면 처벌이야 받을 테지만 오스틴이 버티고 있으니 지금 당장 그럴 수도 없다.

테오도르의 면회 비슷한 방문을 눈감아 주는 것도 그래서였다.

‘물론 둘이서 작당하고 도망치려 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아서지만.’

대답하며 똑바로 바라보자 에사디엔은 헛기침하며 내게 의자를 권했다.

“일단 앉는 게 어떻겠나.”

그러더니 자신은 침대도 아닌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게 아닌가!

‘헉. 여기가 무슨 조선도 아니고.’

당황한 나는 벌떡 일어나 에사디엔의 팔을 엉거주춤 붙잡았다.

“저보다는 황자님께서 의자에 앉으셔야죠.”

“아.”

에사디엔의 얼굴이 천천히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의아했던 나는 이어진 말을 듣고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바닥이 조금 익숙해져서.”

그래서 책도 다 바닥에 있었나.

깨달음과 함께 바닥이며 소파, 침대 가리지 않고 느긋하게 뒹굴던 엘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직 작을 때 배를 드러내고 사람처럼 차려 자세로 자던 엘. 커서는 거의 침대 길이만 한 몸을 쭉 늘인 채 엎드려 있던 엘.

‘아침에 잠이 덜 깨서, 엘이 침대 밑에 있는 걸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밟아도 신경질 한 번 낸 적이 없었지.’

털을 마구잡이로 쓰다듬어도, 발바닥에 뽀뽀를 해도 그랬다.

그 모습들이 차례로 떠오르자 또 눈물이 고일 것처럼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문제는,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말랑말랑해졌다는 점이었다.

‘큰일 났다. 이 상태면 에사디엔이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할 것 같아.’

당장이라도 도망쳐야 하는데 에사디엔의 얼굴에 엘의 모습이 겹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내 기분을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고는 곧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었군.”

작게 속삭인 에사디엔은 그길로 나를 다시 앉히고는 내 앞에 무릎 꿇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오스틴이 무릎 꿇은 모습은 가증스럽기만 했는데, 에사디엔은… 플렌드나가 ‘처연미의 후광’을 내려준 것처럼 애처로워 보였다.

‘이 사람은 그냥 플렌드나 신전에 귀의하는 게 세상을 위한 일이 아닐까……?’

급기야 내가 그런 생각까지 하는 동안 에사디엔은 진지하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했다. 아니…….”

말끝을 흐린 그가 내 손을 살며시 잡으며 그 끝에 입술을 눌렀다.

“죄송했습니다.”

숨결이 닿은 손가락이 간지러웠다. 그 감각이 팔을 타고 올라가 정수리까지 짜릿해진 탓에 도리어 멍했던 정신이 확 돌아왔다.

나는 단호하게 손을 빼내며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

“왜 사실을 말하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다치고 지친 상태라 그럴 수 있다고 쳐요. 하지만 개비나 라망드를 통해서 알렸다면 난 믿었을 거예요.”

“…….”

“설마 내가 그대로 쫓아낼 거라고 생각했나요?”

거듭 물어봐도 에사디엔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하지만 떨리는 눈동자는 많건 적건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짜증은 좀 냈을지언정 치료 싹 해주고 보송보송하게 돌려보내 줬을 텐데!

지금도 짜증이 나려고 하는데, 응? 문화인답게 가라앉히고 차근차근 말해 주고 있잖은가.

“말이야 바른말이지, 황제 폐하께 데려다드리는 걸 쫓아내는 거라고 하면 안 되죠.”

“아닙니다.”

“뭐가 아니라는 말씀이세요?”

“사실은 계속 엘의 모습으로 살고 싶었습니다. 가능하다면.”

“네에?”

이건 또 무슨 말인지.

동물인 채로 살고 싶었다고? 말도 못 하고, 손도 못 쓰고, 간이 된 음식도 못 먹고, 종일 누워서 노닥거리기만 해야 하는데?

마지막은 내가 추구하는 삶의 형태이긴 하지만, 아무튼.

그러나 충격적인 말은 다 끝나지 않았다.

“내가 엘일 때는 밀어내지 않았으니까요.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사랑해 줬잖습니까.”

“그, 그거야 작고 귀여운 털 친구니까…….”

온몸을 감싼 보들보들한 털에 기다란 꼬리, 뾰족한 귀 끝에 달린 눈송이 같은 털, 동글동글하면서도 앞으로 톡 튀어나온 주둥이와 코까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내가 또다시 엘의 모습을 떠올리며 행복해하는 동안 에사디엔은 잠깐 ‘털 친구?’하고 의아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딱히 묻지 않고 내 무릎에 이마를 댔다.

“지금도, 당신이 그렇게 대해 주기만 한다면 에사디엔이 아니라 엘로 살고 싶습니다.”

그러고는 정말 엘이 그랬듯 나를 올려다보며 자신의 볼을 내 무릎 옆에 살며시 부비는 것이 아닌가.

“뭐, 뭐 하는 거예요? 왜 내 옷에 얼굴을 닦아요?”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너무 늦게 알아챘지만.

“아까부터 존댓말은 왜 쓰시는 거예요?”

그 말에 에사디엔이 대단히 상심한 표정을 지었다.

뭔지는 몰라도 이 뒤에 엄청난 폭탄이 터질 것을 예감한 나는 그의 이마를 턱 짚어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누가 기사 아니랄까 봐 솜씨 좋게 피한 그는 밀려나기는커녕 도리어 자신의 머리를 내 손바닥에 비볐다.

마치 내가 엘의 머리를 쓰다듬는 모습처럼.

‘에사디엔 머리는 처음 만져봐.’

엘의 털보다 조금 더 가늘고 길었지만 부드러운 감촉만은 똑같았다. 멍하니 손에 빛 가루가 묻었나 싶어 내려다보는 내 무릎에 또다시 뺨을 문질러 시선을 끌어당긴 에사디엔이 말했다.

“아양 떠는 겁니다만.”

그리고 아주 잠깐 고민하던 그가 덧붙였다.

“…주인님.”

“……!”

입을 딱 벌리고 굳은 내 머릿속에서 파랑새 친구들이 날아다니며 삼중창을 부르는 것 같았다.

주인님.

주인님.

주인님!

“주… 뭐요?”

“주인님.”

이제는 망설임도 없이 자연스럽게 반복하는 에사디엔의 얼굴은 뭔가 후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니, 사람 주인은 할 생각이 없는데.’

나는 장난기를 쪽 뺀 채 에사디엔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혹시 시야가 흐릿하다거나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은 없나요?”

“…전 미치지 않았습니다.”

이미 정신 상태에 대한 의심에 데었던 에사디엔이 정색하며 부정했지만, 나도 이번에는 그가 미쳤는지 의심하는 게 아니었다.

‘뇌종양 초기 증상인가 싶은 거라고.’

그러나 내 생각을 알 리 없는 에사디엔은 담담하면서도 달콤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미치기 직전일 정도로 당신을 원할 뿐입니다.”

와, 그거참 흑화 직전이라는 뜻으로 들리는데.

나는 가까스로 신음을 참으며 에사디엔에게 붙잡히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가 미치지 않았다면 내가 미칠 지경이었다.

‘대체 왜 주, 조연들이 다 제멋대로 튀어나가지? 탱탱볼로 빚었나?’

라페슈는 테오도르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치트룸으로 가버리질 않나.

테오도르는 결혼은커녕 국경의 수호신이 될 기세고.

에사디엔은…….

시선이 닿자 그가 또다시 웃었다.

“주인님.”

“아, 그 주인님이라는 소리 좀 그만해요!”

소리를 빽 지른 순간 누군가가 문을 두들기며 내 이름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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