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미뉴엘!”
테오도르의 목소리였다.
‘해가 진 뒤에 이렇게 갑자기 찾아올 사람이 아닌데?’
일단 다급하게 문을 쾅쾅쾅 두들기는 것부터가 불길했다.
‘…혹시.’
황성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 아닐까.
에사디엔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잠시 얼어붙은 듯 마주 보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제 뒤에 계십시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테오인데…….”
웬 유난인가 싶었지만 나보다 더 팔다리가 긴 에사디엔은 그 말만 남기고 성큼성큼 앞서가 문을 열었다. 건너편에는 굳은 표정의 테오도르가 서 있었다.
“방해해 죄송합니다.”
에사디엔에게 사과한 테오도르는 그의 뒤에 선 내게 눈짓으로 인사하며 빠른 말투로 상황을 알렸다.
“미뉴엘, 황성에 일단의 무리가 들어간 후 모든 문이 잠겼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쭉 끼쳤다.
‘결국 저질렀구나.’
오스틴이 갑자기 개과천선하거나 빙의하길 바라기도 했지만 역시 그런 기적은 일어날 리 없었다.
마감 날은 하루가 48시간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라지만 도리어 평소보다 시간이 빨리 가버리는 것처럼.
그리고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일은 꼭 가장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때 일어났다.
‘하필이면 엄마와 언니가 몬스터 때문에 발이 묶인 지금.’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았다.
‘아니, 사실 북부의 몬스터 건도 놈이 계획한 거 아니야?’
그 얍삽한 것이 우리 어머니를 치워둘 말로 상정하지 않았을 리 없다.
한번 그렇게 생각하자 모든 일이 퍼즐처럼 착착 맞춰지는 것만 같았다.
‘오래전에 사라진 학파에서 쓰던 마법이더군. 주로 연구하던 분야가 현혹, 환시나 저주 쪽에 치우쳐 있었어.’
나를 홀리려던 마차. 브라시다스가 알려준 마법의 정체.
북부의 마을에 나타났던 마법사들.
‘최근 계속해서 기사들을 로콰이트로 불러 모으시는 이유가 뭔지 말입니다. 지금쯤 카르이넨 대공령은 몬스터 처리에 전력을 투입할 때가 아닙니까?’
카르이넨 가문의 기사들이 이동하는 것을 감시하던 군무성의 병력 관리과.
기사를 억류하며 우리를 자극한 것이 시선을 돌리기 위함이었다면? 마법 게이트를 테러하려던 것도, 되면 좋고 실패하더라도 우리를 기만하는 데 쓰려던 작전이었다면.
한고비를 넘기고 안심한 사이 미리 보내둔 마법사들을 이용해서 몬스터를 자극한 거라면?
‘내가 망상하는 거라고 생각해?’
마음속으로 개비를 떠올리며 묻자 잠시 후 가까이에서 따뜻한 기운과 함께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미 거의 확신했으면서 뭘 묻고 그러냐.
…그래도 누군가의 동의를 구하게 되는 건 인간의 본능이나 같은 거다.
민망해져서 헛기침하는 내게 에사디엔이 물었다.
“저도 함께 가게 해주시겠습니까?”
“당연히…….”
테오도르의 표정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단칼에 안 된다고 끊었을 터다.
그러나 그는 ‘존댓말 하는’ 에사디엔을 보며 거의 눈이 튀어나올 듯한 표정을 지었고, 덕분에 나는 에사디엔의 상태가 조금 맛이 갔다는 걸 되새길 수 있었다.
‘자기 입으로 미치기 직전이라고 그랬어.’
곧이어, 다시 에사디엔을 처벌 방에 밀어 넣고 떠날 경우 벌어질 최악의 시나리오가 머릿속에 줄줄이 소시지처럼 떠올랐다.
흑화한 에사디엔이 탈출해 오스틴에게 굽히고 들어간다. → 둘이서 대륙을 통일하고 어쩌고저쩌고……. → 결국 나를 황금 새장에 가두고?!
“그, 그건 안 돼!”
피폐 엔딩은 안 돼!
몇억 분의 일 확률로 금수저가 됐는데 편하게 살기가 왜 이렇게 힘들단 말인가.
새파랗게 질린 나를 에사디엔은 왠지 모르게 감동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저를 걱정하고 계셨던 겁니까, 주… 읍!”
또 ‘주인님’이라는 말이 나올 듯한 낌새에 냅다 에사디엔의 입을 막고 봤다.
하지만 입은 그쪽에만 달린 것이 아니었다.
“역시 황자님을 걱정한 거구나, 미뉴엘.”
무, 무슨 소리야. 왜 ‘본관은 안심했다’ 같은 표정을 짓는 건데?
“그렇지 않으면 황자님의 말씀에 당연하다고 동의할 리가 없지.”
‘당연히’ 같이 가는 게 말도 안 된다는 뜻이었지!
그렇지 않아도 에사디엔을 갈아 마시려 벼르던 오스틴이 아니던가. 그나마 지금까지는 황제와 황태자의 눈치라도 봤지, 이제는 제어구가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에사디엔이 진짜 이상해지는 건 곤란했다.
‘어쩌지.’
망설이는 내 손을 에사디엔이 살며시 쥐어 자신의 뺨에 올렸다.
“믿어주십시오. 꼭 이곳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저는 당신의 엘이니까요.”
“이, 이렇게 불편하고 좁은 곳에 스스로 돌아오겠다니. 그런 말을 어떻게…….”
“시야가 다 닿지도 않을 만큼 넓은 곳보다 아늑한 곳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 말이 꼭, 여기 들어온 후로 쭉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 같아서 가슴 언저리가 욱신거렸다.
이런 기분은 몇 번을 겪어도 불편했다. 나는 그가 뺨을 기대던 내 손을 확 빼내며 짐짓 딱딱하게 말했다.
“어차피 폐하께서 건재하시다면 여기로 돌아올 일은 없을 거예요.”
이번 일을 해결하면 다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황제는 황좌, 에사디엔은 황자궁, 개비는 자신의 집이나 다름없는 정령석으로.
마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에사디엔이 나를 설득했다.
“당신 곁이 제 자리입니다, 주인니…….”
“아아아악!”
나는 거의 발작하듯 에사디엔의 입을 틀어막았다. 누구 반역 죄인으로 만들 일 있나!
하지만 그는 예상했다는 듯 놀라지도 않고 내 손바닥에 쫍, 하고 입을 맞췄다.
“으악!”
이 사람 진짜 왜 이러냐고요! 내가 양손을 아예 등 뒤로 숨기며 물러서는데도 에사디엔은 낮게 웃을 뿐이었다.
“당신에게 입 맞출 수 있어 좋군요. 인간의 몸에도 장점이 있었습니다.”
으아아으아. 대체 어디서 저런 말을 배워 온 거야.
질색하는 나와 눈을 마주친 테오도르는 아예 귀신을 본 듯한 얼굴이었다.
사실 쪼오금은, 그가 이상한 책을 가져다줬던 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걸 보는 순간 의심이 먼지처럼 사라졌다.
“하아.”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에사디엔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 일로 시간을 더 허비할 수는 없었다.
프레세리아에서는 황제가 서거하면 보라색 연기를 피워 올린다.
테오도르가 연기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아직은 황제의 목이 붙어 있는 듯하지만, 오스틴 그 삐딱한 놈이 언제 발작할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좋아요.”
승낙이 떨어지자 에사디엔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절 받아주시는 겁니까?”
“그냥, 당신이 자신만만하게 같이 가겠다고 하니까 샛길이라도 아나 싶어서 데려가려는 거거든요.”
퉁명스럽게 말해 봐도 에사디엔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속없이 좋아하는 모습에 꼭 딴지를 걸고 싶어지는 건 역시 내가 악역이라서인가 보다.
“착각하지 마세요. 아직 다 용서한 건 아니에요!”
“압니다. 이번 기회만큼은 꼭 붙잡겠습니다.”
“그래요. 이 일이 끝나면 꼭 폐하 앞에서 벌을 받도록 해요. 몰래 튀면 내 사재를 다 털어서라도, 대륙 끝까지 사람을 풀어서라도 찾아낼 테니까.”
거친 말투에 에사디엔은 놀랐는지 눈썹을 살짝 들었다가 이내 솜사탕 같은 미소를 되돌렸다.
“도망쳐도 계속 관심을 가져주시는 겁니까?”
“황자님, 진실로 미치셨사옵니까?”
하지만 에사디엔은 예나 지금이나 강적이었다. 내가 이토록 못되게 구는데도 웃는 얼굴에 실금조차 가지 않았다.
“후후. 농담입니다.”
대체 이런 말을 하는 여유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내가 마구 들이댔을 때 에사디엔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당황스러움, 계속해서 벽을 무너뜨리는 상대에 대한 감탄, 그리고 자꾸만 어딘가가 간질거리는 기분.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다가오는 것이 다 노력이라는 것을 알아서. 거부당했을 때 마음이 멍든 것처럼 의기소침해진다는 것 또한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이제는 당신이 싫다고 해도 곁을 지킬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에사디엔이 내민 손가락에, 나는 홀린 듯이 소지를 걸어버렸다.
에사디엔을 데리고 테오도르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쥬엘라 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미뉴엘.”
“언니, 이야기 들었지? 황자님께서 황성으로 들어갈 길을 찾는 데 도움을 준다고 하셨어.”
언니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에사디엔이 우리 집에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부관은 놀란 표정이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내려온 라망드도 내 옆에 선 에사디엔을 보고 의외였는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조금 어색한 분위기 가운데, 나는 언니의 손을 꼭 잡으며 쇼핑이라도 나가는 길인 것처럼 가볍게 웃었다.
“다녀올게.”
“…라망드와 함께 가. 올세 경 옆에서 떨어지지 말고.”
일전에 나눴던 이야기 때문인지, 언니는 조금 목이 멘 소리를 내기는 했어도 내가 황성으로 가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럴게.”
모두가 제자리를 되찾을 기회가 왔다. 긴장 때문에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내게 언니가 속삭였다.
“그분을 믿니?”
짧았지만 걱정이 가득 담긴 말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말을 듣자 긴장이 스르르 풀려서, 나는 감사의 의미로 언니를 가볍게 껴안았다.
“한 번만 더 믿어보려고.”
“네가 그렇다면.”
에사디엔을 탐탁지 않게 여기면서도 언니는 언제나 내 편이었다. 불안하던 마음에 단단한 지지대가 섰다.
가족이란 이런 것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
언니에게서 떨어져 밖으로 나서는 내 옆으로 에사디엔이 금방 따라붙어 나지막하게 말했다.
“곁에 서서 함께 갈 수 있다니 꿈만 같습니다. 이런 게 행복인가 봅니다.”
“…….”
으악. 그래도 나는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시공간이 멈추는 게 아니라 어느 한 점 안으로 오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오죽하면 비장한 분위기였던 기사들이며 부관마저도 에사디엔을 뭐 잘못 먹은 사람 보듯 흘깃댔다.
얼굴이 시뻘겋게 익어가고 있다는 걸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더 견디지 못한 나는 차마 큰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잇새로 작게 외쳤다.
“아, 좀! 작작 좀!”
“너무하십니다. 제가 부끄러우십니까?”
그래요. 너무 그러니까 바보 같아!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이었지만 가까이에서 내 눈을 본 에사디엔은 어느 정도 알아들었는지 마차가 출발한 뒤에도 잔뜩 기가 죽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아, 나 정말.’
나는 마음속으로 혀를 크게 찼다.
에사디엔이 상심했든 토라졌든, 지금 당장 조용하니까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꾸 눈길이 갔다. 가만히 눈을 내리깐 옆모습이 기운 없을 적의 엘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