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나는 마음을 다스리려 노력하며 천천히 말했다.
“최, 최소한 나중에 하면 안 될까요?”
“나중, 언제 말씀입니까?”
“이… 일이 다 끝나면?”
억지로 쥐어짜 낸 대답이었는데도 에사디엔은 만개한 꽃처럼 웃었다.
“기쁩니다.”
“또 뭐가요?”
“제 마음을 표현해도 된다고 허락해 주신 거니까요.”
기운이 쭉 빠졌다. 이 초긍정 회로 앞에서는 더 반박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에사디엔이 내게 빠르게 적응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됐다.
‘익숙해졌다기보다… 포기한 거였구나…….’
업보로다, 업보야.
* * *
황성 문이 굳건히 잠겼고 바깥에는 지키는 사람 하나 없다지만, 대놓고 정문 앞에 마차를 댈 수는 없어서 두어 블록 떨어진 곳에 멈췄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라망드가 내 어깨를 붙잡고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데려가 섰다.
“라망드?”
“황자님을 용서한 거야?”
“용서는 아직 잘 모르겠고……. 기회라도 한 번 더 줘보려고.”
머쓱하게 웃는 나와 달리 라망드의 얼굴에는 웃음기라곤 한 톨도 없었다.
“황자님한테만 너무 무르게 구는 거 아니야?”
나 자신도 좀 그렇게 느끼기는 했지만, 이렇게 타인의 입으로 들으니 타격이 상당했다.
민망한 나머지 우물거리며 ‘너한테도 물러.’ 따위의 말로 넘기려던 때였다. 불쑥 끼어든 테오도르가 나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미뉴엘, 황자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셔.”
“아, 응.”
에사디엔이 할 말이라면 숨겨진 입구에 대한 일일 테니 먼저 대화하던 라망드에게는 조금 미안해도 이쪽이 더 급했다.
라망드에게 눈짓으로 사과하려 했지만 그는 테오도르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길에 은근히 섞인 적개심을 깨닫고 깜짝 놀랐는데, 그를 향한 테오도르의 말투도 못지않았다.
“방해하지 마시죠, 사제님.”
“왜 난 그러면 안 됩니까?”
“최소한 정정당당하게는 하셔야지요.”
라망드가 테오도르를 방해한 일이 있었나?
잠시 생각해 봤지만 전혀 짚이는 부분이 없어 대체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려던 찰나였다. 조금 떨어져 있던 에사디엔마저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게 아닌가.
“아, 당신들. 오랜만이군.”
하지만 에사디엔이 바라보는 곳엔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없었다. 오로지 그 자신의 그림자가 비친 담벼락뿐이었다.
‘아니, 또 왜 저러는 거야……?’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것일까. 두려움에 몸을 조금 떨었지만 곧 에사디엔의 시선이 그림자보다 더 위에 닿아 있음을 깨달았다.
담 위에서는 털이 쭈뼛 선 고양이 세 마리가 동그란 눈을 더더욱 휘둥그레 키운 채 에사디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고양이와 회색 줄무늬 고양이, 그리고 삼색 얼룩 고양이.
그중 삼색 고양이가 슬금슬금 얼굴을 내려 에사디엔의 냄새를 맡았다. 그러더니 화들짝 놀라 그만 담 위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헉!”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그쪽으로 뛰어갔지만, 엘과 달리 이쪽은 정상적인 고양이라서 사뿐히 착지한 뒤였다.
다만 아직도 놀란 마음이 가시지 않았는지 꼬리가 폭발 직전으로 빵빵해져 있었다.
냄새를 맡으려 하자 기꺼이 손을 내준 에사디엔과 달리 먼저 다가온 고양이가 더 놀라는 이 상황, 누가 설명 좀…….
“괜찮습니까?”
에사디엔은 사람을 대하듯 고양이에게 물었다. 그러자 잠시 머뭇거리던 고양이가 입을 열었지만 딱히 들리는 소리는 없었다. 그런데…….
“맞습니다. 그때 당신들이 도와주려 했던 것이 저입니다.”
에사디엔에게는 고양이들의 말이 들리는 건지, 아니 그것보다도 의사소통이 되는 건지 자연스럽게 고양이들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이제는 담 위에 남아 있던 고양이들도 귀를 쫑긋거리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마치 모습이 많이 바뀐 친구를 만난 것처럼.
‘도대체 이게 무슨…….’
에사디엔한테 예전부터 이런 능력이 있었는데 내가 몰랐던 것뿐인가? 아니면 동물로 변했던 일 때문에 생긴 부작용인가?
나는 우두커니 서서 그가 고양이들과 활발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그저 지켜보았다. 지금 다가가 물으면 이 순간의 마법이 깨지기라도 해서 그에게 방해가 될까 봐.
“이 친구들이 안쪽 상황과 함께 폐하와 누님의 위치를 봐주겠다고 합니다.”
잠시 후 다가온 에사디엔의 말에 비로소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말이… 통해요?”
“신기하게도, 예. 그렇습니다.”
“그렇구나…….”
에사디엔 자신도 신기하게 느낀다는 건, 역시 최근에 생긴 능력이라는 뜻이었다.
“저 고양이들은 처음 제가 황성에서 빠져나왔을 때 위험해지지 않도록 뒤에서 살펴주었습니다.”
“마음씨 좋은 고양이들이네요.”
나는 담 위에 쪼르르 앉은 고양이들에게 다가갔다. 도망가지 않을까 조금 걱정했지만 옆에 에사디엔이 있어서인지 얌전히 앉은 자세를 유지해 주었다.
“나도 인사하고 싶은데, 내 말은 못 알아듣겠죠?”
신기함을 섞어 에사디엔에게 묻자 그가 빙긋 웃었다.
“제가 전해 드리겠습니다.”
“…고양이 나라의 외교관이라도 하셔야겠어요.”
“주… 당신이 함께 가주신다면 기꺼이.”
아윽. 한참 전에 한도를 넘어선 당 수치에 나는 그대로 에사디엔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고양이들에게 말했다.
“잘 부탁해요, 여러분. 고양이의 예절을 몰라서 미안하지만… 혹시 좋아하는 고기가 있다면 말해 주세요. 수고해 주시는데 보답을 해드리고 싶어요.”
진심이었다. 무엇보다도 황제와 황태자가 살아 있는지를 알아야 앞으로의 행동 방향이 정해질 것이고, 살아 있다면 어디에 갇혔는지 알아야 구출할 수 있으니까.
개비가 움직이면 오스틴이 바로 알아챌 테고, 그렇다고 기사를 투입하면 희생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에 들킬 위험이 적을뿐더러 들켜도 의심받지 않을 존재들이 움직여준다니 고마울 따름이다.
“야―옹. 아우웅.”
에사디엔을 통해 내 말을 들은 삼색 고양이가 자세를 꼿꼿하게 세우며 길게 냥냥거렸다. 나야 그 뜻을 알 수 없으니 에사디엔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아… 하하. 어른 고양이로서 아직 어린 것의 부탁을 들어주는 건 당연하답니다. 보답은 넣어두라고 하는군요.”
어린것이라니. 에사디엔이? 머리가 띵했지만 처음 엘을 만났을 때는 누가 봐도 작은 아기였으니 그럴 만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왜앵.”
그때 검은 고양이가 짧게 울며 침을 뚝 흘리고는 지레 놀라 입맛을 쩝쩝 다셨다.
그러자 옆에 있던 회색 줄무늬 고양이가 ‘고양이 망신은 혼자 다 시키고 있네!’라고 말하는 것처럼 매서운 펀치를 녀석에게 날렸다.
이후로는 난장판이었다. 펀치를 맞고 뚝 떨어진 검은 고양이가 놀라운 점프력으로 뛰어올라 줄무늬 고양이에게 반격한 것이다.
그 서슬에 휘말려 점잖던 삼색 고양이도 함께 떨어졌고, 더는 누가 잘못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의 난투극이 벌어졌다.
“왜, 왜들 이러는 거죠?”
“검은 고양이가 자기는 고기라면 다 좋다고 했습니다. 회색 줄무늬는 제발 체통 좀 지키라면서 때렸고요.”
“설명해 주는 건 좋은데 일단 말려요! 안에 들여보내야 할 거 아니에요!”
너도 검은 고양이처럼 한 대 맞아볼래요? 라는 뜻을 담아 째려보자 그제야 본분을 깨달은 에사디엔이 어설프게 고양이들을 달래기 시작했다.
“잠깐 진정하시고…….”
하지만 영 듣지 않는 듯한 모습에 지켜보던 내가 덧붙였다.
“우리 집으로 오면 언제든 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 둘 테니까 자유롭게 다니라고 해요. 안 와도 되고, 오고 싶을 때는 오고.”
에사디엔은 하라는 건 참 잘했다. 손등에 할퀸 상처가 나도 아랑곳없이 고양이들을 번쩍번쩍 들어 떼어놓으며 말을 전했다.
“강요하는 건 아니라고……. 예, 그렇답니다.”
그러자 비로소 고양이들이 아웅다웅하던 것을 멈췄다.
그렇다고 바로 출발한 것도 아니었다. 싸우느라고 흐트러진 털을 정돈한 후에야 드디어 고양이 정찰대가 출동했다.
‘어휴, 고양이만 아니었어도.’
답답해도 어쩌겠나. 고양이란 원래 그런 아이들인데.
나는 그저 녀석들이 무사하기만 바라기로 했다.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
귀여운 털 친구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내게 라망드와 부관이 다가와 물었다.
“정찰용으로 고양이를 쓰다니. 제대로 돌아오기는 하겠어?”
“저도 마찬가지로 걱정이 됩니다, 아가씨. 일단 말이 통한다는 것부터… 아, 물론 황자님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믿기가 힘들어서 말입니다.”
에사디엔이 하는 일이라 말을 얹지는 않았지만, 테오도르도 의구심으로 가득 찬 듯해 보였다.
나는 그들의 반응이 더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왜 못 믿어? 신성력도, 마법도, 정령도 믿으면서.”
“그것과 이건 다르지. 네가 예로 든 건 눈앞에 실재하는 힘이잖아.”
번쩍번쩍하는 게 눈앞에서 날아다니면 안 믿을 수가 없긴 하다만, 다른 세계에서 살다 온 나로서는 그거나 이거나 도긴개긴이란 말이지.
“황자님도 우리 앞에서 고양이들하고 대화했어.”
하지만 다들 아직 납득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흠, 하고 팔짱을 끼며 말했다.
“정 그러면 개비한테 물어보지 뭐. 정령은 만물과 소통하는 존재잖아.”
개비야, 개비야. 방금 에사디엔이 고양이들하고 대화한 게 맞니?
마음속으로 묻자 곧장 개비의 답이 돌아왔지만 모습은 드러내지 않은 채였다. 나름대로 녀석도 오스틴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 맞음. 인간들은 쓸데없는 걸 의심하더라.
그렇기는 하다. 그래서 철학이나 과학 같은 학문들이 발전하는 거지만.
아무튼 나는 사람들에게 개비의 답을 그대로 전했다. 부관이나 테오도르는 내 말까지 의심할 수는 없으니 그럭저럭 납득하려는 듯했지만 라망드의 표정은 아직도 좋지 못했다.
정말로 이런 상황은 좋지 못하다. 모두가 큰일을 앞둔 상태가 아닌가.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라망드를 지켜보다가 그가 입술을 벌리자마자 손목을 낚아채 한쪽으로 끌고 갔다.
“라 첨지, 너 지금 엄청 예민해.”
“…….”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응?”
라망드의 시선이 자신의 손목으로 떨어졌다. 내가 잡았다고 아팠을 리는 없겠지만 불편한가 싶어 놓으려는데 그는 되레 떨어지려는 내 손을 붙잡았다.
“왜 그렇게 쉽게 용서해?”
“뭐?”
“황자님은 널 속였잖아. 화난 거 아니었어?”
나기야 났다. 하지만 이건 좋다, 싫다로 딱 잘라 구분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나도 나 자신을 명확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감정이었다.
“라망드, 있잖아.”
크게 숨을 내쉬며 라망드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내 마음이 복잡해서인지, 아니면 그저 밤이라서인지 언제나 명징하게 전해지던 그의 기분을 읽을 수가 없었다. 나는 포기하고 그냥 솔직한 기분을 전하기로 했다.
“사실 나도 지금은 잘 모르겠어.”
“뭘 모르겠다는 건데?”
“에사디엔한테 화가 났지만, 나도 잘한 것만은 아니잖아.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내가 본 것만 믿었…….”
차근차근 잇던 설명을 꽤 격양된 목소리가 뚝 끊고 들어왔다.
“미뉴엘 카르이넨, 너 바보야?”
“…라망드?”
“화가 났으면 화를 내! 왜 다른 데로 생각이 튀는 건데? 네 감정에 솔직해야 할 것 아냐!”
잠시 동안 숨을 참았을 정도로 놀라웠다. 라망드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건 드문 일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