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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99)화 (99/130)

99화

눈만 깜빡거리는 나를 본 그가 한숨과 함께 짧게 혀를 찼다.

“미안. 이런 말을 할 때가 아닌데…….”

나는 답답한 듯 얼굴을 마구 문지르는 라망드의 팔을 잡아 내렸다.

“네가 나한테 하지 말아야 할 말이란 건 없어.”

“…미뉴엘.”

“내가 흥분했을 때는 네가 신성력으로 가라앉혀 줬는데… 나는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내가 가진 힘으로 불을 일으킬 수 있다. 체온을 조절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의 열은 가라앉힐 수가…….

‘어?’

열과 온도에 대해 떠올린 순간이었다. 필라멘트에 불이 들어온 것처럼 불현듯 깨달음이 찾아왔다.

‘십 년 전, 불의 정령석을 빼앗겼을 때 남부 지방에는 한파가 찾아왔다고 했어.’

개비의 저주나, 그저 정령석이 제자리를 벗어났기 때문에 벌어진 이변이 아니라 누군가가 의도했다는 걸까.

그렇다면 불의 정령은 단순히 타오르는 불뿐만 아니라… 열기, 그러니까 작게는 물건의 온도에서부터 크게는 기후마저 건드릴 수 있는 존재라는 건가?

- 드디어!

멍하니 생각에 생각을 이어나가던 나를 일깨운 것은 머릿속이 꽝꽝 울릴 정도로 커다란 개비의 목소리였다.

- 드디어 깨닫다니! 하하하하!

개비의 웃음은 길고도 길게 이어졌다. 머리를 터뜨릴 것처럼 울리는 웃음소리에 귀를 막아봤지만 밖에서 전달되는 소리가 아니라 전혀 소용이 없었다.

“으윽.”

“미뉴엘, 몸이 안 좋아?”

결국 견디다 못한 내 무릎이 훅 꺾이자 놀란 라망드가 얼른 받아주었고, 에사디엔의 것으로 느껴지는 기척도 빠르게 다가왔다.

하지만 머릿속이, 아니 온몸이 개비가 내지르는 소리로 가득 찬 것 같아 다른 사람의 걱정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 불이란 무엇인가? 연소하여 빛과 열을 내는 것이다. 즉 빛도 열도 나의 부산물이며 나의 자식이다. 어째서 불의 신이 없는지 궁금해했는가? 불은 신이 다스릴 수 없는 자연, 이 세계의 근원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알았으니까 제발 소리 좀 줄여……!’

정말이지 죽을 것 같았다. 초대형 스피커 앞에 선 것처럼 온몸이 둥둥 울려서 겨우겨우 부탁했건만 개비는 여유롭게 웃기만 했다.

- 내 말 때문에 네가 괴로운 것 같아?

“너 때문이 아니면 이유가 뭔데!”

짜증이 복받쳐 버럭 외치고 나서야 깨달았다. 개비의 목소리는 어느새 원래대로 되돌아와 있었고, 내가 느낀 울림은 나의 몸 안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의식하는 것과 동시에 모든 괴로움이 멎었다.

밭게 내쉬던 숨을 길게 늘이며 질끈 감았던 눈을 뜨자 세상이, 아니 내가 변해 있었다. 손을 말아 쥐면 전보다도 더 단단하게 힘이 들어갔고 눈은 더 멀리 있는 것까지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개비가 흐뭇한 듯이 말했다.

- 너를 택한 것이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었나 보다, 미뉴엘.

“그걸 지금 칭찬이라고…….”

투덜거리던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심장을 감싼 불의 정수가 확연히 느껴질 정도로 커져 있었다.

“나 무슨… 환골탈태라도 한 거니?”

조금 실망스러웠다. 무협지에서처럼 허공에 둥둥 뜨고 머리 위에는 오색 꽃이 세 송이, 혹은 다섯 송이쯤 피어나는 광경을 기대했건만.

내 생각을 읽은 개비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 원래 네가 살던 세계의 인간들은 대체 무슨 상상을 하며 사는 거야?

갑작스럽게 시력이 좋아지니 머리가 띵했다. 나는 잠시 눈을 꾹 감은 채로 개비의 말을 받아쳤다.

‘아, 왜. 상상이라도 해야 벅찬 현실을 버티지.’

누구나 삶이 힘들 때는 잠시 숨을 돌릴 구멍이 필요한 법이다. 나에게는 그 구멍이 바로 소설이었다.

‘그래서 죽어서도 소설 속으로 들어온 건가.’

쓴웃음을 짓는 내게 개비가 따끔하게 말했다.

- 정신 차려.

‘뭐?’

- 네가 발 딛고 숨 쉬는 곳이 현실이야. 그러니 여기도 더는 상상의 공간이 아니라는 뜻이다.

‘당연한 거 아니야? 현실이 아니었으면 그동안 그렇게 아프지도 않았겠지.’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어쩐지 가슴 한쪽이 뜨끔했다. 어쩌면 개비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았다면 ‘원작’을 신경 써가며 살지도 않았겠지.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내 주위를 둘러싼 채 이마에 ‘걱정’이라고 써둔 듯한 사람들을 한 명씩 바라보았다.

원작에 끼어든 사람이면서도 내 발이 허공에 떠 있지 않은 건 닻이 되어준 이 사람들 덕분이다. 그중에서도 내 구명줄이었던 라망드의 손을 찾아 꼭 쥐었다.

“미안해. 대화하는 도중에 갑자기 이래서.”

“아니야. 뭔가 발전이 있었던 것 같네.”

라망드는 뭐든지 이해한다는 듯한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나는 오히려 그 웃음에서 거리감을 느꼈다.

평소대로라면 시간이 조금 지나 그의 기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줬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이대로 두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고양이들이 돌아와 있었고 이대로 안에 들어가게 된다면 전투는 피할 수 없다. 언제고 최악의 상황이 닥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라망드, 그게 너한테는 안 좋은 일인 걸까?”

직구를 던지자 보랏빛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럴 리가. 난 그저 네가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같아서…….”

조금 조급한 말투로 변명하던 라망드가 일순 말을 딱 멈췄다.

“처음에 얘기하던 주제는 다른 것 아니었어?”

“쳇. 안 넘어가네.”

투덜거리다가 씩 웃어 보이자 라망드도 곧 어깨에서 힘을 빼며 한숨 섞인 웃음을 지었다.

“너는 정말…….”

그때, 성 안쪽에서 화염이 하늘로 길게 뿜어졌다.

화살을 수직으로 쏜 것처럼 솟구치던 불덩어리는 마치 불꽃놀이의 폭죽처럼 성 꼭대기보다도 훨씬 높은 곳에서 터져나갔다.

나는 그 궤적을 하나하나 눈으로 좇았다. 고양이들에게 이야기를 듣는 에사디엔의 머리 위로 붉은 빛이 찬란하게 흩어졌다.

“오스틴이 알고 있어.”

조금 전 갈무리되지 못한 내 기운을 느낀 것이든, 혹은 애초부터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든. 그는 밖에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어서 들어오라고 초대를 한 것이다. 이 불꽃은 그런 의미였다.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를 듣고 라망드가 얼굴을 굳혔다.

“그럼…….”

“라망드.”

그에게 바짝 붙어 선 나는 솔직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엘이 날 속인 건 아직 다 용서하지 않았어. 하지만 기회는 한 번 더 주려고 해. 오해인 걸 안 뒤에도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한 건 내 잘못이니까.”

말로 표현하고 나니 내 생각도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비록 라망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으로 나를 들여다보았지만.

“…….”

“그리고 너랑 난 무슨 능력이 생겼다고 멀어질 사이가 아냐. 넌 내 버팀목인걸.”

부모님과 언니들처럼 나를 조건 없이 지지해 주는 사람. 넘어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사람.

그런 라망드가 만약 내일 당장 사도가 된다고 해도 나는 그와 내가 멀어졌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우리는 가족이니까. 알지?”

지금껏 가족처럼 가깝게 지내기는 했지만, 한 번도 드러내고 말한 적은 없었다.

처음에 내가 예상한 건 ‘뭐 이런 상황에 그런 소리를 해?’ 혹은 ‘너는 낯부끄럽게 그런 말을 잘도 하더라.’ 등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라망드는 좀처럼 대답이 없었다.

슬슬 내가 뭘 잘못했나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되어서야, 조금 물기에 젖은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알지.”

라 첨지, 감동했구나!

그제야 안심한 나는 다짐하듯이 당부했다.

“조심해야 해, 라망드.”

“…그래. 너야말로.”

나는 마지막으로 그의 손을 한 번 더 꽉 쥔 후 에사디엔에게 다가갔다.

이제는 정말로 시작할 시간이었다.

* * *

잠시 후.

비장한 표정으로 개구멍 앞에 선 에사디엔과 테오도르를 바라보며 나는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여기를 통해서 성에서 나왔다고요.”

“그렇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여기로 들어갈 거고.”

“예.”

에사디엔의 답은 확고했지만 사실 우리 부관과 테오도르는 믿음 반 의심 반인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기 고양이 모습이었던 엘에게는 큰 구멍이었겠지만 인간의 기준으로 보자면… 머리를 집어넣다가 끼일 것 같은 크기였다.

여태껏 잠잠했던 클리데인이 속삭였다.

“지금이라도 제가 담을 넘을까요, 아가씨.”

“아니…에요.”

나는 당장 마른세수라도 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최근에 있었던 일들 때문에 막무가내의 아이콘으로 떠오르려 하고 있었지만, 원래의 에사디엔을 생각해 보면 과묵하고 냉철한 데다 실력도 굉장한 기사다.

‘여기가 아니라 문을 부수고 들어간다고 해봤자 우리를 기다리는 건 오스틴의 군사들뿐이야.’

이왕 그에게 들켰으니 우리는 차라리 최초의 목표를 확실히 달성하기로 하고 양동 작전을 수립했다.

개구멍으로 들어가 황제와 황태자를 구출하는 건 에사디엔과 테오도르, 나, 그리고 클리데인.

부관과 나머지 기사들이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을 성문을 치며 시간을 버는 동안 최대한 빠르게 빠져나온다는 계획이었다.

‘에사디엔도 계획 정도는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바라보자 에사디엔은 잘 알아들었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검을 뽑으며 잠시 숨을 몰아쉬더니.

푸욱.

성벽으로 검을 부드럽게 찔러 넣었다.

‘저게 두부야, 돌이야……?’

네, 사람이 성벽을 두부처럼 슥슥 썰어내는 현장입니다.

그건 정말이지 놀라움을 넘어 기괴하게 느껴질 정도로 엄청난 모습이었다.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못하는 사이, 다 자른 조각을 무슨 블록 떼어내듯 옆으로 옮긴 에사디엔이 산뜻하게 말했다.

“다 됐습니다.”

“에사디엔, 지금 그 표정 그대로 날 따라 해봐요. ‘참 쉽죠?’”

“참… 쉽죠?”

“…….”

나는 입을 틀어막은 채 웃음을 꾹 참아야만 했다. 어색한 미소인데도 파괴력이 엄청났다.

특히나 기사들은 마치 밥 아저씨를 만난 것처럼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으로 미루어 볼 때 역시 웬만한 실력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무협지에서 전생했더니 황자가 되었다, 뭐 그런 건 아니겠지?’

하하하. 설마.

얼른 망상을 털어낸 나는 에사디엔에게 엄지를 척 내밀어 보였다. 그제야 그는 비로소 활짝 웃었다.

‘에사디엔은 계획이 다 있구나.’

그걸 이런 식으로 증명하다니. 여러 의미로 대단한 남자였다.

우리는 감탄과 함께 이동을 시작했다. 에사디엔은 자꾸만 흘끔흘끔 뒤에 있는 나를 돌아보았다. 내 뒤에서 클리데인이 경계하며 따라오는 걸 알면서도.

‘뭐, 불안할 만도 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에사디엔이 아는 나는 툭하면 피를 토하고 하루에 백 걸음 이상은 걷지 않는 사람일 테니까.

그런데 이제 각혈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운동 부족인 것은 똑같은 내가 왜 이 ‘침투조’에 포함됐을까?

처음에는 나도 성문을 공격하는 쪽에 있으려고 했지만 눈먼 무기에 다칠 수도 있다며 단번에 기각당했다.

‘그리고 마도구 덕분이지.’

집을 나서기 전에 언니가 챙겨준 부츠는 마치 헤르메스의 샌들, 혹은 슈퍼히어로의 붉은 로봇형 슈트처럼 나를 빠르게 날 수 있게 해주었다.

비록 그 높이가 땅에서 4cm라 난다기보다는 부유에 가깝지만 기사들 사이에서 뒤처지지 않고 기척도 줄일 수 있어 대만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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