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대량 생산이 안 된다는 게 아쉽네.’
마법에 문외한이라 이 작은 부츠에 경이로울 정도로 많은 기술이 집약되어 있다는 정도로밖에 설명할 수 없지만, 슈퍼히어로 슈트의 발 부분만이라도 만들어내기 힘든 것과 비슷하다고 이해하기로 했다.
아무튼 마도구의 힘을 빌려 이동은 원활했고, 성문으로 보내둔 개비도 간간이 불꽃을 쏘아 보내며 적을 견제하고 있었다.
‘아직은 순조로워. 이렇게 운이 따를 때 어서 나가야 할 텐데.’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앞서 나가던 에사디엔이 갑자기 몸을 숙이며 주먹 쥔 손을 들어 보였다.
생각대로 성문 쪽에 대응 병력이 몰리기도 했고, 고양이들이 기대보다도 더 상세히 알려준 덕분에 지금까지는 별달리 경계할 것 없었는데.
새삼스럽게 긴장해서 침을 삼키는 내 뒤로 스산한 바람이 스쳤다.
동시에.
“윽.”
짧게 삼킨 신음이 울렸다. 깜짝 놀라 돌아보자 클리데인의 목젖 아래 시퍼런 칼날이 드리워져 있었다.
‘방금 그게, 바람이 아니라 칼이 날아드는 거였단 말이야?’
발이 떠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데도 꼴사납게 주저앉지 않았으니까!
몇 번이나 위협을 받아봤고 실제로 찔리기까지 했는데도 왜 이렇게 무서운 것인지. 그 이유는 긴 칼날을 따라 올라간 시선이 상대의 얼굴에 닿았을 때에야 알 수 있었다.
“랑베르 공?”
언제나 엘가 언니와 막상막하의 검 실력을 자랑한다는, 황태자의 남편이자 그녀의 검. 하지만 현재는 절찬 별거 중이라던 그 사람이었다.
“누군데 쥐새끼처럼 숨어 다니느냐.”
참 나. 아무리 우리가 검은색으로 옷을 통일했다지만 자기도 자객 뺨칠 정도로 입었으면서.
그런데 그렇게 자객처럼 얼굴을 꽁꽁 싸매면 뭘 하나. 특징인 연보랏빛 눈동자와 은색 속눈썹, 그리고 눈썹 아래 긴 흉터까지 보이니 알아보지 못할 것도 없었다.
랑베르 공은 우리가 후드를 벗자 깜짝 놀라 검을 치웠다.
“황자님, 그리고 카르이넨과 트레고스난의 영랑들이 어찌 이곳에…….”
“형님과 같은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에사디엔의 말에 랑베르 공이 조금 멋쩍은 듯 시선을 피했다.
‘별거 중이라더니. 아내를 구하려 홑몸으로 이렇게 달려올 정도라면… 소문이 와전된 걸까?’
게다가 에사디엔이 랑베르 공을 매형이나 ‘공’으로 칭하지 않고 친근하게 부르는 것으로 보아 둘의 사이도 꽤 가까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에사디엔의 말에 더 대답하지 않고 나를 돌아보았다. 명백한 회피였다.
“그런데 이 사자 굴에 연약한 카르이넨 영애를 데리고 들어오시다니요. 지금이라도 내보내야 합니다. 정말로 위험합니다.”
저기요, 지금 당사자가 여기, 당신 눈앞에 있는데요.
손을 흔들어봤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왜 저렇게 유난이람.’
속으로 구시렁댔지만 이어지는 말에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영애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잘렸다가는 엘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이황자님을 밀어내겠다는 핑계로 황성을 통째로 불태울지도…….”
아아, 언니. 내가 없는 곳에서까지 이토록 팔불출력을 뽐냈을 줄이야.
뻘쭘하게 눈썹을 문지른 나는 다시 후드를 뒤집어쓰며 최대한 담백하게 말했다.
“공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는 덜 걸리적거릴 겁니다.”
“아니, 영애. 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물론 알죠. 걱정하실 일도 없을 거예요.”
랑베르 공에게는 후드에 가려지지 않은 하관만 보이겠지만 나는 여유롭게 빙그레 웃었다.
공은 그런 나를 걱정스럽게 봤지만 에사디엔과 테오도르마저 나를 두둔하고 나섰다. 그러자 그는 누군가가 다치기 전에 일을 끝내자며 빠르게 출발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형님. 그쪽이 아닙니다.”
금방 에사디엔에게 제지당해 버렸지만.
“위치를 아십니까?”
“형님께서는 어디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사람은 자신이 틀렸다는 생각이 들면 자연스럽게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랑베르 공도 마찬가지라서 천천히 대답하는 그의 상체가 조금 뒤로 빠졌다.
“일단 황태자궁부터 확인해 보고자 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그곳이 누님께서 공격당한 곳인 듯합니다. 지금은 폐궁에 갇혀 계신 것을 보면.”
“그걸 황자님께서 어찌?”
“조력자가 있었습니다.”
에사디엔이 미소 지었다. 정보를 전해 주자마자 그의 이마를 솜방망이 같은 앞발로 톡 치고는 바람처럼 자리를 떠나 버린 고양이들을 떠올리는 것이 분명했다.
반면 랑베르 공은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눈을 커다랗게 떴다.
예의를 모르는 사람은 아니라 금세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지만, 그 모습을 똑똑히 본 나로서는 색다른 감상이 들었다.
‘에사디엔이 웃는 것에 벌써 익숙해졌구나, 나도.’
그의 웃음은 그가 하는 말만큼이나 달콤하다고 생각하며 앞선 등을 따라 날아가다 보니 절로 시상이 떠올랐다.
사랑은 솜사탕.
너무나 달콤해.
잠깐의 달콤함에 취한 죄로
솜사탕 씻은 너구리처럼
허탈해졌네.
‘오… 나 의외로 시에 소질 있는 듯.’
자화자찬하며 2절도 지어볼까 생각하던 중이었다. 개비의 격한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 지금 내 정신이 오염된 듯. 넌 절대 문학에는 발 들이지 마라.
‘말이 심하시네. 그쪽 상태는 어때?’
- 안 좋아. 전면전을 하려고 온 게 아니라 이쪽의 수가 부족하잖아. 빨리 안 끝낼래?
‘일단 증원 신청해.’
- 부관이라는 녀석이 벌써 했지.
‘알았어. 조금만 더… 사람들을 지켜줘.’
시는 이미 머릿속에서 싹 사라졌다. 나는 우리 기사들을 특진시켜 주고 싶지, 조의를 뜻하는 검은 리본을 달아주고 싶지는 않단 말이다!
“서둘러야겠어요. 문 쪽이 아직은 버티고 있지만 언제 위험해질지 몰라요.”
다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속도를 올렸지만 영문을 모르는 랑베르 공은 우리와 함께 달리면서도 경악한 목소리를 냈다.
“설마 북문을 치던 것이 카르이넨 가문의 기사들이었나? 나중에 반역이라고 공격당할지도 모르건만!”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해드릴게요!”
무례인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급해 어쩔 수 없었던 나는 랑베르 공의 등을 쭉쭉 양손으로 밀었다.
하지만 폐궁에 가까워질수록 경계는 점점 더 삼엄해졌다.
“정말 여기 가둬두었나 보군요. 감히…….”
랑베르 공이 분한 듯 이를 갈았다.
몇 대 전인가의 황후가 외도를 의심받고 유폐되었던 궁.
그녀가 훙서한 후에는 밤마다 억울함을 호소하려는 원혼이 나온다는 소문이 돌며 아직도 좀처럼 황실 사람들은 가까이 가려 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교계와 가깝지 않은 나조차도 몇 번이나 들어본 이야기인데 이곳 사람들은 어떻겠나. 평소라면 순찰도 억지로 돌았을 것이 분명한 폐궁의 모퉁이마다 병사가 서 있었다.
‘원래는 언니가 챙겨준 아이템 2탄, 투명화 망토를 써서 안으로 샤샤샥 잠입하려고 했는데.’
하지만 상황은 첩보물을 찍을 정도로 여유롭게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가뿐히 원래 계획을 접어두고 물었다.
“저 병사들, 황성 수비군이 맞나요?”
“아니, 황실군의 휘장을 달지 않았다.”
“그렇다면 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왔다는 무리겠군요.”
망설일 이유 따위는 없었다.
나는 눈을 번뜩이며 짧게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작은 소리와 동시에 오스틴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작고 가늘게 나뉜 불의 기운이 가닥가닥 병사들에게 날아갔다.
잠시 후, 병사들이 조금씩 휘청거리더니 시간이 약간 더 지나자 한두 명씩 주저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조금 뒤에는 손에서 놓친 창이며 검이 떨어지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후우.”
긴장이 풀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떠올리고 바로 실행에 옮긴 거라 잘 먹힐지 확신이 없었는데 생각보다도 효과가 좋았다.
“주… 미뉴엘, 당신이 한 겁니까?”
눈썹을 좁힌 채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에사디엔은 당장에 내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질문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운 말투였다.
‘이래서 눈치 빠른 꼬맹이(?)는 싫다니까.’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랑베르 공 앞이라고 ‘주인님’이라고 부르려다가 참은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맞아요.”
“불씨가… 보이지 않았는데.”
나는 조금 웃었다.
열을 나타내는 수치를 온도라고 한다. 그리고 인간의 몸의 온도, 그러니까 평균적인 체온은 약 36.5도이다.
체온은 조절 중추 덕분에 항상 비슷하게 유지되는데, 그 범위를 벗어나 39도쯤 되면서부터는 활동하는 데 상당한 지장이 생긴다.
그래서 나는 저들의 체온을 확 높여 버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효과가 너무 빨리 나타나서 나조차도 놀랄 지경이었지만.
“…불태우는 것 말고도 방법은 있으니까요.”
에사디엔과 테오도르, 클리데인은 성문 밖에서 라망드가 ‘발전이 있었다’고 말한 것을 들었다.
따라서 이번에도 자연스럽게 ‘뭔가 정령의 힘을 이용한 것이겠거니’ 하고 알아서 납득했지만 랑베르 공은 아니었다.
“아니, 카르이넨 영애. 모르는 사이에 마법사가 되기라도 한 건가?”
“급합니다. 설명은 나중… 어?”
아까와 같은 답을 하던 나는 순간적으로 움찔, 몸을 굳혔다. 쓰러진 채 신음하는 병사들에게 시선이 간 탓이었다.
‘내가…….’
그제야 비로소 벼락을 맞은 것처럼 제정신이 돌아왔다.
아무런 가책도 없이 다수의 사람을 쓰러뜨리다니. 지금껏 누군가를 공격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당방위였다.
‘내 기사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야.’
퍼뜩 그 생각이 들었지만 전생에서부터 자리 잡은 윤리 의식도 비난을 늦추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해한다고 네 기사의 피해를 막을 수 있을 거라 장담하나? 만일 그렇다 한들 네가 무슨 권리로 타인의 목숨을 쥐락펴락하려는 거지?’
그 와중에 뇌리로 개비의 웃음소리마저 울려 퍼졌다.
- 잘하고 있어! 불을 다루는 자라면 가로막는 걸 없앨 줄도 알아야지. 하하핫!
마치 성인식 날로 되돌아온 것처럼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멀게만 느껴지는 가운데…….
“미뉴엘.”
내 팔을 강하게 붙잡는 감촉과 함께 빙글빙글 돌던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에사디엔.”
입을 열자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에사디엔은 진지한 얼굴로 그런 나를 단번에 안아 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
정신이 막 돌아온 탓에 뭐 하는 거냐고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눈만 동그랗게 뜨는 내게 그가 조용히 속삭였다.
“잘하셨습니다. 그리고 필요한 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