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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101)화 (101/130)

101화

“에사디엔.”

“괴로워하시는 것을 이해합니다. 기사들도 겪는 과정이니까요.”

“…….”

“힘도, 무기도 편리하지만 무서운 도구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용한다고 해서 당신도 그렇게 되는 건 아닙니다. 남용하지 않는 데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당신께 알려준 이가 아직 없었을 뿐입니다.”

나는 잠시 에사디엔의 어깨 뒤로 시선을 돌렸다.

그뿐만 아니라 테오도르와 클리데인, 그리고 얼굴에 물음표를 잔뜩 띄운 랑베르 공까지도 거칠 것 없이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내가 힘을 쓰지 않았더라도 이 사람들이 아까의 병사들을 이기지 못했을 리는 없다.

하지만 그 소란을 듣고 병력이 마구 몰려온다면.

‘다굴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괜히 나왔겠어.’

나는 단전에서부터 올라온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에게 생명의 경중을 잴 권리는 없다. 같은 사람이니까.

그러나 또한 사람이기에, 내 편에 있는 존재들에게 무게 추를 두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껏 개비의 힘을 키우고 잘 다루는 것에만 집중했지, 이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곁에 에사디엔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필요한 일이었다고, 나를 붙잡아 준 사람이 있어서.

자신에게 돌아온 내 시선을 알아차린 에사디엔은 빠르게 달리는 와중에도 싱긋 웃음을 보였다.

어두운 와중에도 왜 그 모습은 눈에 쏙쏙 들어와 박히는 것인지. 나는 순식간에 뜨끈해진 얼굴을 푹 숙이며 투덜거렸다.

“그렇지만 내가 힘을 조절하는 데 실패하면? 파괴왕이라도 되어버리면 어쩌려고 그래요?”

괜히 그의 웃는 얼굴을 지우려고 내뱉은 말이다. 하지만 반성의 방에 있는 동안 엄청나게 레벨 업한 에사디엔은 역시 강적이었다.

“그럴 리는 없지만, 만에 하나 그렇게 된다면.”

뭘 생각하는 것인지 잠시 말을 멈췄던 그가 이내 달처럼 창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당신의 선봉장이 될 겁니다.”

“그…….”

말문이 막혀버린 나는 적당한 답을 찾지 못하고 끝내 시선을 돌렸다. 대체 뭐가 이 사람을 이렇게 만든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 * *

랑베르 공은 여전히 궁금한 것이 잔뜩 쌓인 상태였다.

하지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질문을 멈췄던 그도, 내가 황태자가 갇힌 방의 거대한 자물쇠를 손짓만으로 끊어버리고, 그 단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는 것을 보자 기가 찬 듯 아무런 말을 꺼내지 못했다.

뭐, 안에 있는 사람에게 달려가느라 정신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루미에르!”

“여보?”

황태자 부부가 걱정과 반가움, 어색함이 비빔밥처럼 섞인 재회를 나누는 동안.

“어쩐지 저는 벽에 건 풍경화가 된 기분이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성문 쪽에서 싸울 걸 그랬습니다.”

목표 인물 두 명 중 한 명을 구해 안도감이 들었는지 테오도르가 조금 편해진 얼굴로 목덜미를 주무르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곧장 핀잔을 주었다.

“무슨 소리야, 테오? 이제부터 네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데.”

“응?”

“너는 황태자 전하하고 랑베르 공을 모시고 먼저 빠져나가도록 해. 올세 경하고 나는 에사디엔과 함께 폐하를 모시러 갈 거야.”

클리데인은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는 명령을 수행하는 중이고, 에사디엔은 황실 사람들에게 ‘가출했다가 불쑥 돌아온 탕아’ 정도로 비칠 터였다.

“에사디엔이 누님하고 나가면 내내 잔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고.”

그 말을 들은 당사자가 뭐라 말하려 했으나 나는 얼른 고개를 저어 막았다.

나도 평소 호탕한 황태자가 잔소리 머신으로 변신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너무 많은 의외의 모습을 본 뒤였다.

비록 테오도르는 형제가 없었지만 어머니의 잔소리에 대입해 상상했는지 어깨를 조금 떨고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튼 친구라면 덮어놓고 사람 좋아진다니까.

“그럼 그렇게 말씀드리도록 해. 바깥에서 보자.”

회포를 푸는 두 사람을 떠맡기듯 테오도르에게 부탁한 나는 거의 도망치는 사람처럼 나와 황제를 찾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황실에 개비에 대해서 어느 정도로 오픈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언니들이나 부모님과 논의해 본 적이 없다. 그냥 조용히 힘을 되찾은 후 제자리로 보내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게 계약이었고.

그런데 오스틴이 나타나면서 황실에도 알려야만 할 상황이 되어버렸다.

‘사람 좋은 군주라도 힘 앞에서는 물불 안 가리고 차지하려 든다던데.’

십 년 전에야 정령석을 곱게 봉인지로 돌려보내 줬다지만 이번에는 오스틴이 치트룸의 세력까지 끌어들여 황제를 구금한 상황이다. 충분히 그의 마음이 바뀔 수 있었다.

‘어서 엄마, 아빠가 오셔야 할 텐데.’

황실에서 일을 수습하고 나를 소환하기 전에.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갑자기 에사디엔이 멈춰 서며 나는 그의 등에 이마를 쿵 찧었다.

“으억.”

조금 놀랐을 뿐인데 이마를 문지르는 내 양옆에서 에사디엔과 클리데인, 두 사람이 동시에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으십니까?”

목소리를 낮추기는 했지만 사람이 있다면 충분히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쉬잇!”

질색하며 손가락을 입술 앞에 세우자 둘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을 나란히 세워두고 본 건 처음이라 그런지 닮은 얼굴에 기분이 묘해졌다.

그런데 둘을 번갈아 봤던 그 짧은 순간에 에사디엔이 뭔가를 느낀 모양이었다. 그의 눈매가 점점 위로 치솟았다.

“주인님.”

“아, 그 말 좀!”

재빨리 입을 틀어막으려 했지만 에사디엔도 이번에는 순순히 받아주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이리저리 내 손을 피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이 클리데인에게만 붙박였다는 점이다.

“설마 지금 올세 경한테 질투하는 거예요?”

“예.”

망설임 없이 흘러나오는 대답에 클리데인이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본 에사디엔이 살짝 헛기침을 하는 게, 솔직해진 자신을 뿌듯해하는 것이 분명했다.

‘뭐야, 이 잘생긴 바보들.’

어이가 없었지만 내가 거둔 사람들인데 어쩌겠나. 나는 혀를 차며 얼른 사실을 말해 주었다.

“올세 경한테는 연인이 있으니까 감정 낭비하지 말아요.”

그러자 클리데인이 얼른 내 말을 정정했다.

“그, 아가씨. 아직 사귀는 건 아니고 그냥… 좋은 관계입니다.”

사귀는 게 아니었다는 것에 놀라야 할지, 그러면 왜 팔로스를 보고 그렇게 흥분했느냐고 따져야 할지.

내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에사디엔이 끼어들어 잔소리했다.

“마음은 최대한 빨리 표현해야 한다, 경.”

“하, 하지만 차마 결혼하자는 말이 안 나와서 말입니다.”

바로 결혼이야? 교제하자고 고백도 안 하고?

‘신시아 양도 속깨나 썩겠구나.’

나는 일면식도 없는 아가씨에게 공감하며 혀를 찼다. 얼굴이 비슷하게 생기면 속도 비슷한 건가?

그러는 와중에도 에사디엔의 설교는 이어졌다.

“이 사람이다, 싶으면 빨리 고백하고 식을 올려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나처럼 후회하게 될 거다.”

“과연… 고견에 감사드립니다.”

대체 뭐가 ‘과연’인데!

급격하게 피곤해진 나는 둘 사이를 가르듯 손날을 내리치며 으르렁거렸다.

“왜 여기서 연애 상담하고 있는 건데요?”

하지만 에사디엔은 놀라지도 않았다. 아니, 움찔하기는커녕 나를 빤히 보다가 사르르 웃는 게 아닌가.

“설마 지금 올세 경에게 질투하시는 겁니까?”

“미쳤어요?”

0.1초의 딜레이도 없이 정색하자 에사디엔의 어깨가 축 늘어졌지만 나는 그를 보듬기보다 그 어깨를 퍽퍽 쥐어팼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냐고요!”

어머니랑 엘가 언니가 피땀 흘려 키워낸! 우리 기사들이! 밖에서 시간을 벌고 있는데!

자기 부하 아니라고 이러는 거야, 뭐야.

“아가씨, 반역죄로 잡혀가실지도 모릅니다.”

셋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클리데인이 내 손을 막으려 했지만 에사디엔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하나도 아프지 않습니다.”

“하나도?”

나는 음산하게 반문하며 꽉 쥔 주먹 위로 불꽃을 피워 올렸다. 짜증이 머리 뚜껑을 뚫은 이상 반역이고 나발이고 더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내 눈이 맛이 가기 직전으로 번뜩이는 것을 보고서야 에사디엔은 어색하게 웃었다.

“농담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농담도 할 줄 알았던가.

“쳇.”

혀를 차며 불꽃을 꺼트리자 에사디엔과 클리데인 모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예요?”

날카롭게 묻기가 무섭게 두 사람은 하하하, 로봇처럼 웃었다.

“아, 아닙니다, 아가씨.”

“이제 진입하면 될 것 같습니다.”

‘…진입?’

그러면 지금까지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던 게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서였나.

아주 쪼오금 미안해지려던 것도 잠시,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진입하자는 말과 달리 에사디엔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문으로 가요?”

지금 우리가 선 위치에서 보이는 문은 세 개. 하지만 어느 것에도 황태자가 갇힌 곳과 같이 자물쇠가 걸려 있지는 않았다.

“다른 곳으로 들어갈 겁니다.”

다른 곳?

‘벽이라도 부술 셈인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에사디엔이 또 검을 빼 들었다. 그러고는 성벽 앞에서 봤던 광경이 반복되었다.

서걱서걱.

사람 한 명이 빠져나올 정도의 크기로 벽이 잘렸다. 하지만 검을 집어넣은 에사디엔은 그 조각을 빼내지 않고 옆의 벽에 노크를 했다.

똑. 또옥, 또독. 또독.

두들길 때마다 조금씩 박자가 달랐다. 마치 안에 있는 사람에게 어떤 뜻을 전하려는 것처럼.

‘설마, 황제?’

믿기 힘들었지만 그렇지 않다면 에사디엔이 저렇게 궁을 훼손할 이유가 없다. 아무리 폐궁이라고 해도 그렇지.

의아해하면서도 클리데인과 내가 주변을 경계하는 사이에 누군가가 안쪽에서 천천히 자른 벽체를 밀어냈다.

마치 블록처럼 어느 정도 밀려 나온 벽 조각이 기울어지자 에사디엔은 예행연습이라도 한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그것을 등으로 받아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예상대로 황제였다.

“폐하, 고초가 많으셨습니다.”

이 상황에 평소처럼 예를 차린다면 놀리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짧게 무릎만 굽혀 보인 내가 황제의 입을 막은 천을 풀어내는 사이, 에사디엔은 그의 수갑과 족쇄를 잘라냈다.

“고맙구나.”

황제가 내뱉은 첫마디는 그것이었다.

하지만 풀려나서 후련하다든가 오스틴을 벌하겠다는 의지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허탈함과 슬픔이 가득 드리운 분위기에 뭐라 위로할 말이 없었다.

잠시 침묵이 깔린 도중 에사디엔이 스스럼없이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등을 보였다.

“업히십시오, 폐하.”

그 말에 멈칫했던 황제가 이내 피식 웃어버렸다.

“예끼, 이 녀석아. 아무리 내가 늙었기로서니 아직은 업혀 다닐 나이는 아니다!”

“외람되오나 폐하, 저희는 지금 반역자들을 일소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빠르게 폐하를 모시는 것이 목적입니다.”

“걱정하지 말거라. 내 너희들에게 짐이 되지는 않을 테니.”

우둑, 우두둑!

요란한 소리를 내며 몸을 푼 황제가 이어 말했다.

“에디, 너는 여분의 검이 있으면 한 자루 주고, 우리 아가나 잘 챙기도록 해라.”

이 와중에도 에사디엔과 나를 흐뭇하게 번갈아 보는 것이 단단히 오해한 것 같은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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