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하지만 미처 아니라고 부정하기도 전에 황제에게 서슴없이 검을 건넨 에사디엔이 내게 몸을 숙였다.
“무, 뭐, 왜요?”
불과 몇 분 전까지 껴안고 있었는데도 갑자기 에사디엔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침이 꿀꺽 넘어갔다. 막상 그는 지금껏 보였던 유혹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는데도.
“펜던트의 검을 빌려주시겠습니까?”
“네?”
황제는 ‘여분의 검’을 달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에사디엔은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의 검을 건넸다.
“폐하께서 카르이넨의 검을 쥐시는 것보다는 제가 드는 편이 그나마 낫습니다.”
“아하.”
아무리 총애하는 신하라고 해도 가문의 상징인 검을 황제가 직접 휘두르는 건 조금 그렇지.
바로 납득한 내가 펜던트를 떼어내 커다랗게 만드는 동안 덤덤하게 있던 에사디엔이 기습하듯 속삭였다.
“저도 정식으로 카르이넨의 검을 휘두를 수 있으면 좋겠군요.”
카르이넨의 검이라고 하면 보통은 가문의 기사들을 생각하겠지만, 이렇게 생긴 검을 다룰 수 있는 건 카르이넨의 성을 받은 사람, 그리고 대공인 우리 어머니가 직접 검을 하사한 몇몇 고위 기사뿐이다.
그러니까 에사디엔은 우리 기사단장이 되고 싶다, 혹은 나와 결혼해서 카르이넨 가문의 사람으로 살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에사디엔에게서 용서해 달라, 옆에 있게 해달라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청혼을 할 줄이야.
힘이 풀린 탓에 손아귀에서 검이 쑥 빠져나갔다. 그러나 에사디엔은 예상했다는 듯 부드럽게 검 손잡이를 받아 쥐고는 더더욱 나지막하게 속삭이며 웃었다.
“빨리 그날이 오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고는 내가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황제의 앞에서 길을 이끌기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에사디엔의 멀쑥한 뒤통수를 노려보며 따라가는 것뿐이었다.
‘설마 기사단에 입단하려는 건 아니겠지?’
진짜 청혼이라고 해도 이건 프러포즈로 쳐주지 않을 거다.
…라고 생각하던 나는 아까보다도 더욱 놀랐다.
‘이러면 안 되잖아. 용서도 다 안 했는데 너무 쉽게 넘어가는 거 아니야?’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마음먹고 유혹하는 에사디엔은 실로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하기야 나는 그가 내게 관심이 1그램도 없었을 때에도 반했으니 이런 상황에 내 귀가 덤보처럼 펄럭거리는 것도 이상한 일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너무 쉽게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렇게 내가 속으로 몰래 구시렁대는 동안, 우리는 한 무리의 병사들과 맞닥뜨렸다. 폐궁 경계 임무의 교대 시각이 지난 모양이었다.
나는 하던 생각을 다 접고 바짝 긴장했지만 에사디엔과 클리데인은 내가 나서야 할 상황을 만들지 않고 재빨리 그들을 ‘정리’했다.
그걸 지켜보며 조금 허무해졌다. 아까 내가 직접 손을 쓰면서 느꼈던 가책은 쓸모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기사들도 겪는 과정이니까요.’
에사디엔은 그렇게만 말했지만 생각해 보면 기사들이야말로 죽음을 가장 가까이 둔 사람들이었다.
우리 어머니도, 엘가 언니도, 그리고 에사디엔도 다들 각자의 이유를 가지고 타인의 생명을 거두는 것이다.
‘상대가 몬스터든 인간이든 서로 목숨을 걸 뿐. 그 끝에 패배가 찾아오더라도 결과를 받아들인다. 책임감은 수많은 목숨을 휘두르는 자가 당연히 짊어지는 것이니…….’
그래. 어머니의 말씀은 엘가 언니뿐만 아니라 나도 새겨야만 했다. 원하든 원치 않았든 개비의 힘을 받았을 때부터 그래야만 했다.
목숨을 걸고 싸우고, 목숨을 걸고 지킨다.
그렇게 다짐하고 나자 머리가 가벼워지는 동시에 가슴 한쪽이 묵직해지는 상반된 느낌이 들었다.
침을 꿀꺽 삼키며 양손으로 가슴 가운데를 꾹 누르는 나를 보며 황제가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유혈이 낭자한 광경에 내가 놀란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내 실력이 어떠하냐, 아가! 아직 녹슬지 않았지?”
…에사디엔에게 업히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증명하려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젊은 시절의 위명이 어디로 사라진 것은 아닌지 정말로 그의 실력은 에사디엔이나 클리데인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깔끔했다. 조금 전까지 묶여 있었으면서도.
나는 진심을 담아 양손의 엄지를 척 올리며 활짝 웃었다.
“폐하, 나이스 샷!”
황제의 거동이 불편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상당한 전력이 되어서, 이대로 빠져나가기만 하면 된다고 다소 방심한 탓일까.
순조롭기만 했던 탈출로에 커다란 문제가 생겼다.
“잠시 멈추겠습니다.”
빠르게 달리던 에사디엔이 갑작스럽게 멈추며 가까이 있던 건물 뒤로 모습을 숨겼다.
아니, 황제와 클리데인의 표정이 점점 굳는 것으로 보아 나에게만 갑작스러운 모양이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되는 거였는데!’
대체 뭐지.
불길한 예감을 애써 지우며 귀를 기울이자 어렴풋이 병장기가 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우리 말고 병사들과 싸울 사람이라면… 혹시.’
먼저 탈출하려던 황태자 일행이 들켜 전투를 벌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저기에는 엘가 언니와 비등하다는 랑베르 공도 있고, 테오도르에, 무위가 대단하다는 황태자도 있다. 그쪽이 질 것 같지는 않으니 우리는 황제를 대피시켜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에사디엔과 눈을 마주했다. 그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짧게 끄덕였지만 우리가 엉거주춤 일어서기도 전에 황제가 묵직한 음성을 냈다.
“루미에르가 저곳에 있느냐.”
“폐하.”
“너희가 나를 구하고 루미에르만 놔둘 리가 없지.”
머뭇거림 없이 일어선 황제는 우리를 내려다보며 황명을 내리듯 단호하게 말했다.
“나만 데리고 가겠다는 생각은 말거라.”
“폐하!”
“자식을… 또 잃을 수는 없다.”
저건 오스틴을 자식으로 생각하지 않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황제가 오스틴을 프레세리아에 다시 부른 것은 슬슬 철이 들었을 테니 기회를 주겠다는 뜻이었을 텐데.
‘그 자식이 에사디엔에게 암살자를 보낸 일. 황태자가 지금껏 황제에게 고하지 않았을 리 없어.’
하지만 오스틴은 그 기회를 뻥 차고 이를 드러냈다. 황제로서도, 아버지로서도 용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황제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도 ‘황제’로서는 좋지 않은 선택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뭐, 그렇다고 해도 어쩌겠나.
“폐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딱히 다른 선택지도 없다고 생각한 내가 냅다 대답했다. 그러자 멍하니 황제를 보던 에사디엔이 토끼 눈을 뜨고 나를 돌아보았다.
“이제 와서 다른 출구를 찾기도 어렵잖아요. 성문으로든, 그… ‘샛길’로든 나가야 하는 건 똑같으니까.”
황제 앞에서 대놓고 ‘개구멍’이라는 단어를 쓰기 뭐해서 에둘러 말했지만 에사디엔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누님을 돕는다고 하더라도 샛길로 폐하를 먼저 보내드린 뒤여야 합니다.”
아무렴 적이 더 많은 성문보다는 개구멍이 훨씬 낫지. 하지만 그렇게 황태자를 미끼로 쓰는 게 황제는 싫다잖아.
“여기서 그리 멀지도 않잖아요. 돌아간다고 해도 발견될걸요?”
“…….”
“아까 황자님도 느끼셨겠지만 폐하께서는 강하시잖아요.”
나는 에사디엔의 손을 쥐었다. 동시에 눈으로는 다른 뜻을 전달하며.
‘여차하면 내가 힘을 쓸게요.’
에사디엔은 이것도 알아들었음이 분명했다. 곧고 긴 눈썹이 파르르 떨렸으니까.
구겨진 미간에 걱정이 잔뜩 올라와 있었다. 황제와 황태자, 그리고 나에 대한 걱정이.
잠시 이를 악물었던 그가 내 손을 놓고 황제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명을 따릅니다.”
“그래. 그럼… 이만 가자꾸나.”
우리는 아까보다도 더 주의를 기울여 조용히 이동했다. 일행 중 세 명이 기사이니만큼 기습의 효과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가, 너는 절대로 나오지 말거라!”
황제의 당부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세 사람은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새에 사라졌다가 저만치에서 나타났다.
그들의 칼질 한 번에 미처 뒤쪽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병사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더할 나위 없이 성공적인 기습이었다.
덕분에 황태자 일행과 적이 아슬아슬하게 대치하던 상황을 무너뜨리고 단숨에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몸을 숨긴 채로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생각을 바꿔서 이쪽으로 오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잖아.”
황태자 일행을 포위한 병력은 한눈에 머릿수를 세기도 힘들 만큼 많았다. 아무래도 그들이 들킨 후 폐궁의 상황을 확인하려 파견한 병사들이 중간에 우리와 마주쳤던 모양이었다.
황태자 일행의 실력이 하나같이 좋다고는 해도 세 명이서 감당할 수 있는 적은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일반인도 아니고 군사 훈련을 받은 병사이니까.
그래도 실력자가 세 명인 것보다는 여섯 명인 것이 훨씬 나아서 적은 차근차근 정리되고 있었다.
나도 황제나 황태자의 시야에 닿지 않는 적이며 전장을 이탈하려는 자들에게 몰래몰래 급성 고열을 걸어 한두 명씩 쓰러뜨렸다.
물론 에사디엔은 혼전의 와중에도 그걸 귀신같이 알아채고 이쪽으로 슬쩍 시선을 줬지만.
“후후.”
씩 웃으며 엄지를 들어 보이자 별다른 반응 없이 옆에서 달려드는 적에게 검을 꽂았다. 그러나 물 흐르듯이 돌아서는 그의 입가에는 작은 웃음이 분명히 매달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났더니 괜히 뺨이 간질간질해지면서 헛기침이 나왔다.
“어흠. 에이, 참…….”
벌레라도 물렸나 했지만 눈이 쌓이는 겨울이다.
나는 괜히 한 번 얼굴을 문지르고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바깥에 있을 우리 기사들도 중요하지만 이 사람들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조차 없었으니까.
그러나 적이 눈에 띄게 줄어들면서부터는 몰래 힘을 쓸 수도 없었다. 점점 더 뻘쭘해지기만 하던 중, 드디어 황태자가 마지막 병사를 붙잡았다.
“이자는 데려가 심문한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에사디엔과 클리데인이 이쪽으로 뛰어왔다.
클리데인이야 목적이 명확했다.
‘제가 아가씨에게서 떨어졌다는 것, 상단주님께는 비밀입니다!’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었으니까.
‘당연히 비밀이지, 바보.’
나도 쥬엘라 언니에게 잔소리 듣는 건 싫었다. 게다가 눈치를 보면서도 내 곁에서 버티려는 클리데인을 끝내 저쪽으로 보낸 건 바로 나였다.
그런데 에사디엔은 왜 뛰어오는… 어어?!
“꺅!”
에사디엔은 내게 아주아주 가까워졌는데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부딪치는 줄 알고 반사적으로 눈을 꽉 감았지만 커다란 손과 단단한 팔이 낚아채듯 껴안는 느낌과 함께 발밑이 붕 떴다.
“어……?”
그제야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에사디엔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듯 시무룩하게 말했다.
“제가 주인님을 다치게 하겠습니까?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왜 또 주인님이래요…….”
나는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달리는 에사디엔의 품 안에서 머쓱하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