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이미 황제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개구멍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최대한 이탈자가 없도록 주의하기는 했으나 탈출할 길을 코앞에 두고 붙잡히는 것만큼 억울하고 우스운 일은 없으니.
다행히 더 몰려오는 병력은 없어서 모두는 차례로 성 바깥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황제가 기어나갈 때 다들 고개를 돌리고 다른 곳을 본 것이 소소한 해프닝이라면 해프닝이었다.
“마차는 이쪽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에사디엔이 옆에 블록처럼 곱게 세워둔 벽의 조각을 잘 끼워 맞춘 후, 클리데인이 신호하자 근처에서 대기하던 마차가 달려왔다.
이제 여기에 탄 뒤에 플렌드나 신전으로 가기만 하면 되었다.
‘지금쯤 사도님도 이 난리가 난 걸 들으셨겠지.’
카르이넨 대공저가 아니라 신전의 협조를 구한 건, 자칫 우리 가문에서 황제를 구출한다는 명목으로 구류한다고 비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시도 아닌데 황제가 황성 외의 다른 곳에 의탁한다니, 전례가 없는 초유의 사태이니만큼 살얼음판을 걷는 듯이 주의를 거듭해야만 했다.
‘이제 황족들은 빠져나왔으니까 우리 기사들도 물러나라고 해야지.’
황태자의 뒤를 따라 마차에 타는 랑베르 공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을 때였다.
두쿵!
미처 다른 기사를 불러 퇴각 명령을 전하기도 전에, 불의 정수가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에 숨이 멎을 뻔했다.
“허억……!”
- 미뉴엘!
동시에 개비의 다급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 네 친구 사제가 위험……!
나는 개비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테오도르와 기사 한 명을 붙들었다.
“테오도르, 그리고 경. 폐하와 황족분들을 잘 부탁해. 플렌드나 신전까지만 더 힘내 줘.”
“미뉴엘?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성문 쪽이 위험해. 나는 올세 경과 함께 그곳으로 가서 우리 기사들의 퇴각을 지원할 거야.”
“어떻게 너만……!”
“테오도르 트레고스난!”
거의 호통치듯 이름을 또박또박 부르자 따라가겠다고 하려던 테오도르가 말을 멈췄다.
“너도 알잖아. 너는 황실을 지켜야 해. 나는 우리 기사들… 그리고 내 친구를 지켜야 하고.”
“…….”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테오도르를 놔두고 기사의 팔을 꽉 쥐며 말했다.
“잘 부탁해. 그리고 절대로 죽지 마.”
“명을 따릅니다.”
역시 우리 기사들은 명령을 잘 따라준다니까. 씩 웃는 내게 그가 덧붙였다.
“아가씨께서도 무사히 돌아와 주십시오.”
아, 그거야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이었다.
“물론이지!”
더 밝게 웃어 보인 나는 날듯이, 아니 발이 조금 떠 있으니까 말 그대로 ‘쏜살같이 날아가’ 말에 탄 클리데인의 뒤에 안착했다.
“가죠, 올세 경!”
“아니, 아가씨! 갑자기 무슨…….”
“동료들을 구하러! 이랴!”
나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말의 엉덩이를 때렸다. 클리데인은 놀란 것과 별개로 갑작스럽게 출발한 말을 기사답게 잘 몰았다.
말이 속도를 낼 때까지도 에사디엔은 이쪽을 바라볼지언정 내게 다가와 어디 가느냐며 말리지 않았다.
‘다행이야.’
나는 클리데인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약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사디엔이 조목조목 따지면서 조르면 나는 또 홀라당 넘어가서 그를 데려갔을 텐데, 그러다 그가 다치거나 죽으면? 우리 가문은 황제의 분노라는 벼락을 맞는 거였다.
물론 자신을 구출했으니 조금 희석되기는 하겠지만 더는 자식을 잃고 싶지 않다고 직접 말하지 않았던가.
나 때문에 가족들에게 해가 되는 일이 생기는 건 정말로 싫었다.
…나 때문에 에사디엔이 다치는 게 싫은 만큼.
‘그는 황제와 함께 떠났어. 그만 생각하자.’
나는 고개를 한 번 젓고 시시각각으로 가까워지는 불기둥에 시선을 고정했다. 화염은 정말 하늘에 닿기라도 할 것처럼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이 치솟아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잘근잘근 씹던 입술이 터지기 전에 성문에 가까워졌다. 저 멀리서부터 보였던 불기둥에 마음이 급해진 나는 말이 미처 다 멈추기도 전에 뛰어내렸다.
“라망드!”
다행히 마법 아이템 덕분에 땅에 나뒹구는 일 없이 슝 날아가는 내 뒤로 클리데인도 가슴을 쓸어내리며 따라붙었다.
“개비!”
어디 있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는 정령을 부르자 곧바로 어깨 옆에 뜨끈한 기운이 뭉쳤다. 하지만 그뿐, 개비는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말했다.
- 아까 사제가 포위당해서 위험할 뻔했어. 물론 내가 금방 도왔지만…….
“도왔지만?”
어째 말이 찝찝하게 끝났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불기둥이 떠오르며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 이황자한테 걸렸어?”
- …….
대답은 없었지만 따뜻한 기운이 요동치듯 꿈틀거렸다. 긍정이나 다름없는 반응에 나는 피곤한 눈을 문질렀다.
“어쩐지 이쪽이 잠잠해도 너무 잠잠하다 했지.”
- 나는 노력했다고!
“그래, 알아. 네가 잘못했다고 하려는 건 아니야.”
라망드가 무사했고, 개비의 일로 인해서 황제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라망드는 지금 어디 있는데?”
- …저기.
“저기? 그러니까 저기 어디?”
그렇지 않아도 많은 사람이 뒤엉켜 있는데 꿈틀거리는 불기둥 때문에 다들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어서 라망드의 머리카락 색을 구분할 수가 없었다.
개비가 짜증을 내는 건지 머쓱해하는 건지 모를 목소리로 내뱉듯 말했다.
- 저기 불기둥 안에!
“뭐?”
- 불기둥 안에… 기사들 몇 명이랑 같이…….
라망드가 저 안에 있다고? 저혈압이 온 것처럼 피가 발밑으로 쏠리는 느낌이 들어 나는 억지로 주먹을 꽉 쥐며 거의 짜증을 내듯 말했다.
“왜 없애지 않았어?! 어차피 들킨 거!”
- 당연히 처음에는 잘됐다, 싶어서 내가 꿀꺽하려고 했지! 그런데…….
“자꾸 말 끊지 말고 빨리 말해 줄래?”
- 우씨! 내 힘이 역으로 빨리는 것 같아서 못 했다, 이 인간아!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아이템을 조작해 최대한 빠른 속도로 불기둥을 향해 날았다.
“아가씨!”
“올세 경은 다른 기사들을 챙겨줘요!”
동시에 주머니에서 비상용으로 챙겨두었던 요시초 가루를 꺼내 입에 탁 털어 넣었다.
말렸는데도 풋풋한 냄새와 함께 쓴맛이 입 안을 가득 차지했다가 금세 녹아들듯이 사라졌다.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기름을 부은 불처럼 갑자기 덩치를 불린 불의 정수가 모터라도 단 것처럼 빠르게 회전하게 시작했다. 아까보다는 덜했지만 꽤 몸에 부담이 가는 고통이 느껴졌다.
- 야, 그건……!
“어쩔 수 없어, 저걸 없애려면.”
개비가 경고하려 했지만, 정말로 어쩔 수가 없었다. 불의 힘은 큰 쪽이 작은 쪽을 잡아먹으니까. 그래서 개비도 불기둥을 흡수하려다가 포기한 것이다.
‘어떻게 단기간에 힘을 늘린 거지?’
오스틴이 내 배에 칼을 꽂았을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가 피운 불을 개비가 흡수하지 않았던가.
의문스러운 것과 별개로, 요시초로 증폭한 정령력은 짧은 동안에도 여러 가지 정보를 전달해 주었다.
먼저 라망드는 아직 살아 있었다.
‘다행이다.’
그래, 그건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있는 기사 중에는 어머니의 부관도 있었다.
“그래서 남은 기사들이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대치 상태를 지속한 거구나.”
그리고 정령력이 말해 준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도 있었다.
이 불기둥은 내가 보고 오라고 오스틴이 일부러 만든 것이다. 성에 들어가기 전에 쏘아 올렸던 불꽃처럼.
‘초대를 두 번이나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후, 짧게 심호흡한 나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불기둥을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그때.
핏핏! 핏!
갑자기 부츠에서 공기가 빠지는 것처럼 불길한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발을 헛디딘 것처럼 몸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눈이 감겼지만 억지로 뜨며 짜증을 내뱉었다.
“젠장!”
이건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땅에서 약간만 떠서 빨리 움직이도록 만든 물건인데 무리하게 출력을 조절한 건 바로 나니까. 밑에 있던 사람이 잘 피하기를 바랄 수밖에.
나는 떨어지면서도 옆으로 손을 뻗어 불길을 빨아들였다. 라망드가 빠져나오면 허리가 부러지는 정도까지는 어떻게 고쳐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 때문이었다.
‘이 정도로는 안 죽어!’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마다 살아났으니까. 대신 더럽게 아프겠지.
“미뉴엘!”
불기둥이 걷히며 라망드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보라색 눈동자보다 흰자가 더 많이 보일 정도로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하지만 나도 이를 악물며 다가올 충격을 각오하느라 웃어 보일 겨를이 없었다.
“미뉴엘!”
다시 부르는 소리와 함께 라망드가 내 쪽으로 손을 뻗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을 건 것처럼 느리게 보였다. 그의 손끝에서 빠져나오는 푸르스름한 신성력도.
그러나 늦었다는 건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치료나 잘 부탁해.’
그렇게 생각하며 결국 눈을 내리감은 순간이었다.
터억!
둔탁한 충돌음과 동시에 강한 충격이 전해졌다. 악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아팠지만 어디 한 군데가 부러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몸의 감각이 빠르게 돌아오기 시작했다. 기다렸다는 것처럼 귀 옆에서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어?!”
반짝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는 활활 불타는 것 같은 눈을 한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러려고, 혼자 다치려고 저를 두고 가신 겁니까?”
아니기만을 바랐는데.
도대체 왜, 어떻게 에사디엔이 여기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던 나는 그를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왜 여기 있는 거예요? 왜 신전으로 가지 않고……!”
“미뉴엘 카르이넨.”
헉.
착 가라앉은 목소리와 가늘게 뜬 눈이 흉흉했다.
더군다나 에사디엔이 내 풀 네임을 부른 건 처음이라 나도 모르게 입을 딱 다물고는 주변에 다가서려던 적 병사들을 향해 불덩어리를 쏘아 보냈다.
그러자 앓는 소리와 함께 긴 숨을 내뱉은 그가 나를 내려주며 다시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분명히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곁을 비우지 않겠다고.”
“하, 하지만 폐하께서 염려하실 텐데.”
심려가 깊으셔서 당신이 잘못되면 우리 집안도 날아갈지 모른단 말이야.
“괜찮습니다. 만약 가로막으신다면 연이라도 끊을 각오로 요청했으니까요.”
“뭐라, 쿨럭, 구요? 콜록!”
놀라서 헛바람을 들이켠 바람에 목구멍이 매워질 정도로 기침이 나왔다.
황자라는 자리에 그다지 미련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막, 연을 끊는다고 해도 되는 거야?
하지만 에사디엔은 담담하게 내 등을 쓸어줄 뿐이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폐하께서 허락하셔서 여기 있는 것이니까요.”
“아니, 폐하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길 보내! 자식 또 잃고 싶지 않다던 사람 맞냐고!
“허락하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제 모친을 보셨으니, 집착하는 대상이 사라지면 어떻게 되는지도 아실 테니까요.”
“지, 집착이요?”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야? 얼떨떨하게 반문하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집착이란 나만 하는 거니까. 그게 나를, 미뉴엘을 악역으로 만드는 감정인데 왜 에사디엔이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내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