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104)화 (104/130)

104화

오죽 놀랐으면 뒤로 물러서다가 발을 헛디뎠다. 비틀거리는 내 어깨를 단단히 붙든 에사디엔이 티 나게 말을 돌렸다.

“제가 오지 않았으면 크게 다치셨을 겁니다.”

“괜찮아요. 숨만 붙어 있으면 라망드가 살려줄 테니까.”

그러니까 내 걱정은 말고 지금이라도 신전으로 가라고 하려던 참이었다. 에사디엔이 또 흉흉해진 눈으로 으르렁거렸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십니까?”

“아니, 왜 화를 내요?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제가 다쳐도 그러실 겁니까?”

“내 몸하고 황자님 몸하고 같아요?!”

“당연히 다릅니다! 당신이 훨씬……!”

점점 언성이 높아지는 사이를 가르고, 조금 전 내가 쏘아 보냈던 것을 돌려보낸 것처럼 똑같은 크기의 불덩어리가 날아왔다.

“조심해요!”

오스틴이 근처에 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재빨리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그러고는 역시나 내가 아니라 에사디엔 쪽을 향하는 그것을 흡수했다.

아니, 했는데?

파앙!

공기를 찢는 매서운 소리와 함께 에사디엔의 검이 불을 갈라버렸다. 장갑 끄트머리가 찢어지지는 않았나 싶을 정도로 내 손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쳐서!

‘으, 아…….’

허공에서 뚝 떨어지는 것보다 손을 벨 뻔한 것이 더 무섭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파르르 떨리는 손끝을 갈무리하는 내게 에사디엔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왜 자꾸만 감싸려고 하십니까. 제 몸 정도는 제가 지킬 수 있습니다.”

잔소리하며 내 손을 자기 것처럼 끌고 가 살피는 모습에 괜히 눈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굴러다니는 눈동자를 내버려 둔 채 솔직히 사과했다. 그처럼 뛰어난 기사를 감싸려고 했으니 자존심이 상할 법도 했다.

“그, 그러게요. 미안해요.”

“…….”

에사디엔은 내가 사과한 것이 의외라는 듯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그 표정 그대로 하는 말이라는 것이.

“그러면 돌아가서 입을 맞춰도 되겠습니까?”

펑!

분명 그런 소리가 났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는 척수 반사에 가까운 속도로 에사디엔을 확 밀쳐내며 소리쳤다.

“시끄러워요! 미쳤어, 정말!”

사람들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다니까!

에사디엔의 뒤에서 이번에는 채찍처럼 불길이 날아들고 있었다. 그를 밀어낸 뒤 그대로 그것을 빨아들이며 혀를 찼다.

‘드디어 등장인가.’

아니나 다를까 불길이 걷히자 오스틴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요란하게 나를 불러댄 것 치고는 늦은 등장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까딱,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그가 나른하게 말했다.

“그래. 좀 닥쳐라, 동생아.”

오스틴의 성질머리를 생각하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예쁜 초록색 눈동자가 주위를 훑었다. 그가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엉망진창이군. 전투 상황에도 사랑싸움도 하고. 아주 한가해, 응?”

“그런 거 아니거든…요!”

발끈한 내게 에사디엔도 동조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분을 너무 사랑해서 감히 싸울 수 없습니다.”

예?

입을 딱 벌리며 돌아보자 에사디엔은 예의 싱그러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하하…….”

나는 마른 웃음을 흘리며 그냥 오스틴에게만 집중하기로 했다.

말을 말아야지.

내가! 그냥! 말을 말아야지!

속이 부글거리는 건 오스틴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가 벌레를 보는 것처럼 병사들을 내리깐 눈으로 훑으며 혀를 찼다.

“아둔한 것들은 어쩔 수 없구나. 저것들을 찔러 죽여버릴 것이지 그 꼴을 그냥 보고만 있었더냐?”

“그…….”

“염병을 떠는 꼴에 정신을 빼놓느라 적이 썰물처럼 사라지는 것도 몰랐느냐.”

오스틴이 기사들을 질책하는 동안에 슬쩍 주변을 살피던 나는 웃음을 꾹 참았다.

에사디엔과 내가 빽빽 소리치며 시선을 끄는 동안에 카르이넨 가문의 기사들은 거의 대부분 뒤로 물러나 역으로 적들을 포위하듯 자리한 상태였다.

‘에사디엔은 이걸 의도한 거였나 봐.’

그것도 모르고 짜증을 냈다고 생각하니 조금 미안해졌다. 누그러진 얼굴로 에사디엔을 보자 그는 다시 싱긋 웃으며 검지로 자신의 아랫입술을 톡톡 두들겨 보였다.

뽀뽀 못 해서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나.

‘의도한 거 맞아? 그냥 이상한 사람인 거 아니고?’

내 눈빛이 점점 차갑게 굳어가자 에사디엔은 조금 상심한 듯이 천천히 손가락을 옮겨 볼을 톡톡 두들겼다.

널따란 어깨를 가진 성인 남자가 할 법한 행동은 아니라 질색하려던 찰나, 어쩐지 그의 뒤로 지금은 있을 리 없는 늘씬한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물론 내 상상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한번 상상하고 나니까 이제는 금빛 머리카락 위로 털 송이가 달린 뾰족한 귀마저 보이는 듯했다.

그랬더니 맙소사. 입맞춤을 조르는 저 행동마저 귀여워 보여서 그만…….

“푸훗.”

참았던 웃음을 내뱉고야 말았다.

“웃어?”

도깨비처럼 눈을 희번득하게 뜬 오스틴과 시선이 마주친 뒤엔 싹 사라졌지만 말이다.

‘저게 확 돌아서 적이고 아군이고 다 태워버린다고 난리 치면 어쩌지.’

요시초를 섭취했기 때문에 지금은 내 힘이 우위에 있기는 해도, 모든 사람을 지킬 수 있느냐고 한다면 자신이 없었다.

오스틴을 경계하며 입술을 꾹 물던 나는 다음 순간, 아예 거꾸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이건… 오히려 기회일지도 몰라.’

이 모든 일을 단순하게 끝낼 수 있는 기회!

짧은 순간 계산을 끝낸 나는 고개를 꼿꼿이 세우며 대답했다.

“네, 웃었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웃기면 좀 웃을 수도 있지!”

차라리 당당하게 나가자 오스틴은 조금 당황한 듯 한쪽 눈썹을 구기며 반문했다.

“뭐?”

“웃음을 금지하다니! 사랑과 아름다움의 이름으로 황자님을 용서하지 않겠다! 그러니 일대일로 한판 뜨시죠.”

당황한 건 오스틴뿐만이 아니었다.

“미, 미뉴엘? 갑자기 그게 무슨!”

에사디엔도 이상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지만 나는 그를 돌아보지 않은 채 뒤로 손을 휘휘 저으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여긴 난장판이 될 테니까, 첫 폭발이 일어나면 곧장 사람들을 이끌고 빠져요.”

거의 잇새로 중얼거린 수준이었지만 에사디엔이라면 들었을 거라고 믿고, 오스틴을 향해 천천히, 그러나 당당하게 걸었다.

“덤비시라고요. 황자씩이나 되어서 설마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영애 상대로 꽁무니 빼지는 않으시겠죠?”

빈정거리며 옆으로 쭉 뻗은 내 손 위로 불길이 화르르 일어나 몽둥이인지 검인지 모를 형태로 잡혔다.

그걸 본 오스틴이 피식 웃었다. 입술을 쓱 핥은 그의 눈이 다시 번뜩이기 시작했다.

“진심이시다, 이거군.”

오스틴의 몸이 좌우로 흔들거린다 싶더니 픽 꺼지듯이 제자리에서 사라졌다.

- 위!

나는 개비의 외침에 따라 양손을 머리 위로 뻗어냈다.

콰앙!

힘과 힘이 맞부딪치며 어마어마한 소음과 바람이 일었다.

오스틴은 살기 어린 웃음을 입가에 물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그의 눈을 직시한 덕분에 그와 비슷한 표정을 지은 내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역시 아까운데, 그냥 나와 결혼하지 그러나?”

“하하. 그냥 죽어.”

실이 엉키면 자른다.

무리가 문제를 일으키면 머리를 자른다.

생각해 보면 간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간단한 일을 실현하기가 왜 이리도 힘든지.

내가 불로 공격하면 오스틴은 모래로 덮어버리고, 오스틴이 칼을 휘두르면 나는 그의 내장을 노렸다.

단숨에 피를 끓여버리고 싶어도 오스틴 또한 불의 힘을 다루니 여의치가 않았다. 그가 뿜어낸 힘을 흡수하며 요시초의 효과가 사라진 빈자리를 채우고는 있었지만 슬슬 몸에 과부하가 걸리는 느낌이다.

‘뭔가… 한 방이 필요해.’

그때부터 나는 큰 공격을 자제하고 힘을 차곡차곡 모았다. 하지만 이때다 싶어 그를 떨쳐내고 모아뒀던 힘을 뽑아냈을 때는 왼쪽 관자놀이 부근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날아들고 있었다.

“읏!”

가까스로 몸을 젖혀 피하기는 했지만 도중에 가로막힌 힘은 도리어 나의 내부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올라오는 핏덩어리를 겨우 내리누르는데 오스틴이 연이어 공격하며 코웃음 쳤다.

“마법사들이 보통 이렇지. 큰 마법을 준비하느라 목이 날아가는 걸 모른단 말이야.”

마법사가 뭐! 왜!

팔로스 생각이 난 탓에 나는 오스틴의 검 끝을 겨우겨우 피하면서도 울컥해서 입술을 비틀었다.

내 얼굴을 본 오스틴이 움찔했지만 이미 내 왼손에 들린 단검이 그의 옆구리에 박힌 뒤였다. 아슬아슬한 상태로도 그에게 바짝 붙어 틈을 노린 보람이 나타난 것이다.

“기사들은 보통 그런가요? 약해 보이는 상대 앞에서는 방심해서 목이 날아가는 걸 모르나 보죠?”

“글쎄?”

오스틴이 뱉은 말을 따라 하며 배배 꼬았지만 그는 실실 웃을 뿐이었다. 꽤 깊은 상처를 입었는데도. 일부러 박았던 단검을 뽑기까지 했는데!

심장이 뛰는 박자가 불안하게 튄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오스틴의 머리카락 끝이 먼지처럼 파스스 흩어지기 시작했다.

“설마…….”

하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모래바람이 된 오스틴은 땅으로 꺼진 듯이 사라졌다.

“개비, 어디 있는지 알겠어?”

- 저기 탑! 탑이야!

개비가 말하는 탑이란, 지금껏 우리가 싸우고 있는 성 북문 앞에 자리한 쌍둥이 시계탑이었다.

문제는 오스틴과 내가 격돌하기 시작하자 놀란 거미 새끼들처럼 달아난 오스틴 쪽 병사들과 달리, 우리 기사들은 상태를 정비하며 혹시라도 다시 들이닥칠 반역자들을 대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그 시계탑 아래서.

‘기사들이 가진 수호부가 저 높은 탑이 무너지는 걸 지탱할 수 있을까?’

긴 전투를 거쳤으니 적어도 반은 사용되었다고 봐야 했다.

눈앞에 참상이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거의 비명처럼 외쳤다.

“안 돼! 개비, 막아!”

- 너는? 지금 너도 힘에 부치는가 본데!

불이라는 자연의 힘으로 불태우는 건 쉬워도 무너지는 걸 막는 등의 물리력을 행사하기는 힘들었다.

그나마 개비는 정령이기 때문에 시도할 수 있지만, 불바다를 만드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망설일 시간조차 아까웠다.

“저쪽이 더 급해!”

이미 시계탑 한쪽의 아래쪽이 휘청거리고 있었다.

개비는 혀를 쯧, 하고 차며 사라졌다. 나도 지친 다리를 이끌며 그쪽으로 뛰는데 개비가 흔들리는 탑을 받치기 시작했는지 힘이 쭈우욱 쓸려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허억.”

잠깐 눈앞이 깜빡거리며 다리에서 뼈가 사라진 것처럼 몸이 휘청거렸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하필이면 그 와중에 뒤에서 모래끼리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났다.

파스스으…….

코끝을 스치는 먼지 냄새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지금 이 상태로 공격당하면 개죽음이다.’

나는 앞뒤 가릴 것 없이 요시초 주머니를 또 하나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수요일 오후 네 시쯤 단 걸 잔뜩 먹은 것처럼 즉각적으로 눈이 번쩍 뜨였다.

현기증이 일 정도로 힘이 차올랐다가 또 개비 쪽으로 쭉 빠져나가 어질어질했지만 이를 악물며 의지를 일으켰다.

화아악!

내 의지에 반응한 불이 벽을 이루어 등 뒤를 지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