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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105)화 (105/130)

105화

불의 벽을 뚫지 못하고 오스틴의 검이 녹아내린 것이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그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요시초, 맛있나?”

“…뭐?”

“그걸 많이 먹으면 인간보다 자연체에 가까워지지. 그렇게 자연에 흡수되면 정령한테만 좋은 일 해주는 거다.”

“웃기시네.”

나도 오스틴 못지않게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비웃었다.

- 그것에 의존하면 너는 네 존재를 잃게 될 거다.

- 혹여나 급하다고 요시초 가루 덥석덥석 먹지 말고.

정말로 내가 내 존재를 잃는 것이 개비한테 좋은 일이었다면 내게 저렇게 잔소리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오스틴이 지껄인 건 하등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우르릉!

그런데 그때, 우레가 울리는 것처럼 심상치 않은 소리가 땅을 뒤흔들었다.

‘시계탑이……!’

요시초를 거듭 들이부은 탓일까, 내 눈앞에 순간적으로 개비의 시야가 공유되었다.

‘라망드.’

라망드가 부관과 함께 다리를 다친 사람을 부축하며 후미에서 대피하고 있었다.

- 이제… 무리야……!

힘겨워하는 개비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리자마자 나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오스틴의 힘을 모조리 빨아들인 뒤 그쪽으로 내달렸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계속 핑핑 돌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제발, 안 돼. 빨리 움직여야만……!’

헉헉 가쁜 숨을 흘리며 양손을 마치 나처럼 휘청거리는 시계탑 쪽으로 뻗었다. 고열로 다 녹여버리면 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손바닥에서는 불티조차 솟아나지 않았다.

“어, 어째서…….”

시계탑은 내가 이유를 찾아낼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휘청거리던 움직임이 더는 반대쪽으로 돌아오지 않더니 꼭대기의 시계 판이 지면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망드.”

주르르, 코 밑으로 뜨끈한 피가 흘렀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훔쳐내자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미친 사람처럼 그쪽을 향해 달리고 날았다. 말을 듣지 않는 부츠 때문에 땅바닥을 뒹굴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라망드!!”

유일한 희망은 시계탑이 무너지며 자욱하게 일어난 먼지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비치던 푸르스름한 빛뿐이었다. 신성력을 발현하면 나타나는 흔적.

그러나 치유 전문인 라망드는 성기사들이 쓰는 신성 방패처럼 물리적으로 신성력을 유지하는 데 서투르다.

“빨리, 개비! 빨리 저걸 치워야… 크헉!”

강한 충격이 옆머리를 쳤다. 내가 잔뜩 흐트러진 동안에 때를 노린 오스틴이 기습하듯이 뺨을 때린 것이다.

짜악!

어찌나 인정사정없는 손속인지 딱 한 대 맞았는데도 몸이 붕 떠서 바닥에 처박혔다.

그러나 추가타가 올 것이 뻔했기 때문에 나는 눈을 똑바로 뜨고 그가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빈틈을 만들 타이밍을 재며.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상태가 좋지 않은데 얼굴까지 맞아서 시야가 정상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해야지.’

안 하면 죽는다. 빗대어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나는 이미 터진 입 안의 여린 살을 까득 물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지금!’

불기둥이 솟구쳤다. 하지만 거리감이 망가진 탓에 타이밍이 빨랐고, 오스틴은 여유롭게 그것을 흡수했다.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겠다고 마음먹은 찰나, 오스틴의 뒤에서 작은 빛이 번뜩였다.

푸욱!

전에 들어본 파열음과 함께 오스틴의 배 한가운데에 검 끝이 불쑥 튀어나왔다.

“에사디엔…….”

후우, 긴장과 함께 팔에서 힘이 쭉 빠졌다.

안 보이기에 알아서 자리를 피했겠거니 했는데 또 이렇게 나타나다니.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번만큼은 너무 고맙고 반가웠다.

‘어떻게 내가 필요할 때마다 이렇게 나타나는 건지.’

신기할 정도였다.

그러나 숨을 돌릴 여유도 그 잠시로 끝이었다. 진드기보다 더 끈질긴 오스틴은 이대로 끝낼 생각이 없었으니까.

오스틴이 덜덜 떨며 품에서 붉은 보석을 꺼내자 에사디엔이 바로 팔을 그었지만, 그가 손아귀 안에서 그것을 부수는 것이 아주 조금 더 빨랐다.

그리고 보석이 부서지자마자 오스틴의 몸은 다시 모래로 화해 사라졌다.

“어디지?”

두리번거리는 내게 에사디엔이 손짓해 알려주었다. 오스틴이 다시 나타난 곳은 쌍둥이 탑의 남은 한쪽.

불길한 예감에 나는 부축해 주던 에사디엔마저 밀쳐내고 거의 엎어지듯이 달렸다.

“안 돼, 이 나쁜 자식아!”

내 외침을 들은 것일까. 멀리서도 오스틴이 씩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그 기분 나쁜 웃음을 지은 채 손가락을 튕겼고, 이번에는 미처 개비가 막을 틈도 없이 탑이 와르르 무너졌다.

라망드의 신성력이 비쳤던 바로 그 자리 위로.

“마법사 불러!”

삐이이, 하는 이명에 섞여서 기사들의 외침이 멀리서 말하는 것처럼 들려왔다.

무릎이 푹 꺾였다. 그 자리에 주저앉은 내 옆으로 에사디엔이 기사들에게 단호하게 명령을 내리며 달려왔다.

“안에서 사제가 버티고 있을 것이다! 바로 치우면 구할 수 있다! 다들 정신 차려!”

어째서일까. 그 말이 끝나자 멀리서만 들리는 것 같던 온갖 소란들이 갑자기 내 곁으로 달려들었다.

덕분에 조금 정신이 든 나는 오스틴이 서 있던 자리를 흘긋 노려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쥐새끼 같아.’

또 어디 숨어서 틈을 노리고 있을지.

하지만 지금 더 급한 쪽은 저 잔해를 치우는 것이었다. 나는 개비가 다시 물리력을 발휘해 돌을 치울 수 있도록 힘을 나눠주는 데 집중했다.

사실 무너진 잔해를 치우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다. 여기가 괜찮아 보여서 뺐다가는 저쪽에 걸친 부분이 와르르 무너지기에 십상이니까.

그러나 다행히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운이 좋았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아래 갇혔던 사람들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라망드의 눈이 나와 마주치자마자,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그의 얼굴에 흰 선이 주욱 그어졌다.

“비아체 부관님이 돌아가셨어.”

비아체…….

‘니콜라스 비아체.’

그래, 그게 우리 부관의 이름이었다.

‘이제는 아가씨께서도 편해지셨으면 좋겠습니다.”

“꼭 그렇게 될 거야. 그러니까 경도 이제는 마음 편하게 가지도록 해.’

나는 멍하게 중얼거렸다.

“니콜라스… 경이.”

이름을 알고 있으면서도 입에 담아보는 건 처음이었다. 왜냐하면 경, 부관, 그렇게 칭하는 것이 어릴 때부터 당연했으니까.

왜 그랬을까?

고맙다고 생각했으면서. 그 사람 덕분에 세상이 아름답다고 느낀 적도 있으면서.

“니콜라스 비아체 경이, 죽었다고.”

다시 한번 소리 내어 말하자 와닿지 않던 사실이 갑자기 현실로 변해 달려드는 것만 같았다.

왜 그 사람이 죽어야 했나, 그렇게 물을 필요는 없었다. 나를 보자마자 울었던 라망드의 모습으로 이미 상황의 대부분이 설명되었다.

짝, 짝, 짝.

침울한 분위기 사이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어느새 홀연히 나타난 오스틴이 뻔뻔한 낯짝으로 말했다.

“아끼는 부하였나 보군?”

나는 가만히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오스틴의 박수 소리를 들은 이후로 이상할 정도로 주위가 고요해졌다. 그가 뭔가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입이 벙긋거리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별로 상관은 없었다.

‘저걸 죽여야지.’

나를 지배하는 생각은 이것 하나뿐이었으니까.

‘응. 저걸 죽여야 니콜라스 경한테 꽃을 바칠 수 있을 것 같아.’

개비와 계약한 뒤로 불이 뜨겁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내 온몸이 불길이 된 것처럼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눈앞을 온통 시퍼렇고 허연 불길이 점령했다.

누군가를 이렇게 죽이고 싶다고 강하게 생각한 건 전생에서도, 이 생에서도 처음이었다.

파괴적인 욕구와 함께 발이 지면에서 떨어져 둥실, 부유하는 것이 느껴졌다.

* * *

- 미뉴엘!

“미뉴엘!”

개비와 라망드가 목놓아 불렀지만 미뉴엘은 전혀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오로지 위만 바라보며 날아올랐다.

마치 화염에 휩싸인 천사와도 같은 모습에 저도 모르게 무릎 꿇은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개비는 그런 것을 비웃을 겨를도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 저 녀석, 지금 폭주 직전이야. 내 힘까지 빼앗아가려고 하고 있어.

5:5의 정비율을 약속한 계약마저 뒤흔들 정도로 거대한 폭주였다.

“그럼 미뉴엘은 어떻게 되는 거지?”

- 인간의 몸으로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이미 과부하 상태야. 더 심해지면 재 한 줌도 안 남을 거라고!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던 개비는 미뉴엘과 오스틴이 격돌하기 시작하자 윽, 하고 신음을 흘렸다.

- 내가 가는 건 무리야. 가까이 갈수록 동화되어 버릴 확률이 커.

불의 정령마저 합세한 폭주라니. 로콰이트 전체가 불바다로 변할 상황을 그려본 라망드가 얼굴을 굳히며 자원했다.

“내가… 신성력을 쓰면 그래도 미뉴엘을 붙들 수 있을 거야.”

-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엘이 가는 편이 낫다고 본다.

에사디엔은 미뉴엘과 대치하는 오스틴의 모습을 분석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었다.

거기에 집중한 탓에 개비의 부름에는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제가 말입니까?”

-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네 피에 뭔가 섞인 것 같단 말이지. 저 불길에 오래 닿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다.

“오래라면, 어느 정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 한 3초?

평소 개비를 존중하던 에사디엔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뭐라 한 소리 하고 싶어진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미뉴엘을 구할 수만 있다면. 그런 잡담을 할 시간도 아까웠으므로 그는 이내 도약해 지붕 사이로 몸을 감췄다.

‘내가 힘을 조절하는 데 실패하면? 파괴왕이라도 되어버리면 어쩌려고 그래요?’

말이야 장난스럽게 ‘파괴왕’이라고 했지만, 그때 지었던 미뉴엘의 표정으로 미루어 보아 분명 자기 자신을 괴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자기 울타리 안의 사람을 잃었다고 스스로를 불태울 정도로 분노하는 이를 과연 괴물이라고 여길 수 있을까.

‘만약 희생된 사람이 나였다면 당신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에사디엔은 잠시 궁금해했지만, 씁쓸함만 남을 뿐이었다. 집착이라는 말이 나오자 희게 질리던 미뉴엘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갈 길이 참 멀군.’

멀기는 했으나 갈림길도, 샛길도 없는 곧은 길이었다. 받아줄 때까지 최선을 다해 마음을 전할 수밖에 없으므로.

오스틴이 감지하지 못하도록 빙 둘러 조금씩 다가가던 에사디엔은 그 생각과 함께 돌연 뛰어올랐다.

콰아아앙!

마치 합을 맞춘 것처럼 미뉴엘의 손에서 뻗어 나온 화염, 마치 거대한 발톱 같은 형상의 그것이 오스틴을 후려쳤다.

살의로 잔뜩 일그러졌는데도 아름답기만 한 하늘색 눈동자를 홀린 듯이 바라보며 에사디엔은 조금 전부터 오스틴의 내부, 핵이 있다고 생각했던 곳을 꿰뚫었다.

* * *

“미뉴엘.”

뭐 타는 냄새 안 나요?

어쩐지 자다 깬 듯 비몽사몽인 상태로 킁킁, 냄새를 맡는 나를 누군가가 자꾸만 흔들었다.

“미뉴엘!”

헉. 정신을 차리고 보자 에사디엔이 내 양어깨를 잡고 있었다.

문제는, 내가 무슨 화염 인간처럼 활활 불타오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타는 냄새는 에사디엔의 손에서 나는 거였다.

“이…거 놔…….”

계속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래서 그런지 불이 영 말을 듣지 않았다. 이제 불길을 없애야 하는데. 하지만 마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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