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정신이 드십니까?”
“놔요.”
목이 깔깔했다. 그러나 불이 에사디엔의 팔까지 번지려는 것이 눈에 들어오자 목이고 뭐고 다 머리에서 날아갔다.
나는 다급하게 몸을 버둥거리며 외쳤다. 아니, 이 사람은 뜨겁지도 않은가!
“엘! 이거 놔! 빨리, 엘!”
“미뉴엘, 돌아온 것 맞습니까?”
“그래!”
그러니까 제발 놓으라고 울기 직전인 상태로 말하던 나였지만, 뒤늦게 제정신이 돌아오면서 불에 대한 통제력도 서서히 되찾게 되었다.
“어흠.”
민망함도 돌아온 게 문제였지만. 마침내 불을 모두 꺼트린 나는 목을 가다듬으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황자님. 이제 괜찮아요.”
에사디엔은 그제야 천천히 뒤로 주저앉았다. 그러면서도 그런 모습을 보인 것이 부끄러운 듯이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다행입니다.”
빈혈이라도 생긴 걸까. 그 모습을 정면에서 봤더니 눈앞이 핑 도는 것 같았다.
눈을 세게 감았다가 뜬 나는 딱딱하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뒤로 넘어갈 것 같아서였다.
“그거, 그거 빨리 치료해야 해요.”
화상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건데. 저 곧고 예쁜 손에 화상을 입다니. 저 손에 화상 자국을 남길 수는 없는데…….
“누가, 빨리 신전에 황자님을……!”
정령 때문에 생긴 흉터는 신성력으로 사라지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에사디엔은 정령석을 직접 만진 게 아니니까 괜찮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과 함께 사람을 불렀다.
하지만 목소리를 높이자마자 그때만 기다렸다는 듯 의식이 깜깜하게 꺼져버렸다.
마지막으로 보였던 시야에 모래바람이 스쳤다는 것만 기억에 남았을 뿐이다.
* * *
사제의 인도에 따라 참석자들이 차례로 헌화를 시작했다.
우리는 니콜라스를 위한 짧은 추모식을 가지는 중이었다. 정식 장례식은 시국이 다소 안정되면 북부에서 치를 예정이다.
‘미안해. 고마워. 그리고… 잊지 않을게.’
꽃을 바친 뒤 잠시 손을 모으고 옆으로 나가려던 나는 떡하니 길목을 막은 덩치를 보고 그만 움찔해 버렸다.
검은 옷으로 빈틈없이 감쌌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위압감이 든 탓이다. 게다가 칭칭 양손에 붕대를 감은 모습 때문에 그를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래, 나는 그 엄청났던 밤 이후로 에사디엔을 피하고 있었다.
“읏.”
그리고 지금도. 눈이 마주치자마자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좌향좌, 몸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멀리서 보고 피하던 지금까지와 달리 에사디엔의 손이 닿는 거리였던 것이 패착이었다. 어깨가 부드럽게 붙들리는 것과 동시에 귓가에 온기 어린 속삭임이 내려앉았다.
“주인님.”
“여, 여기 주인님이라는 사람 없어요. 안 들려요.”
“신전 담장 바깥까지 들리도록 외치면 들리겠습니까?”
“뭐, 뭐라고 할 건데요?”
반사적으로 묻고 나서 내 입을 막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하여튼 이놈의 호기심!
“미뉴엘 카르이넨이 삼황자를 길들인 주인이라고.”
“허어억!”
기겁한 나는 내 입을 가리던 손으로 에사디엔의 입을 콱 틀어막았다.
“하, 하지 마요! 미쳤어요?!”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저와 잠시 걸어주시겠습니까.”
으으. 어쩐지 지금 따라가면 또 에사디엔에게 말려들 것 같은 기분인데.
하지만 길을 막는 것도 이 이상 하는 건 민폐였다. 추모식장에서 호들갑 떠는 것도 못 할 짓이고.
결국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바깥으로 나온 후, 에사디엔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내가 눈치를 살필 정도로.
그러니 그가 이런 질문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혹시 제게 화가 나셨습니까?”
“…네?”
“아, 질문이 잘못되었군요. 아직 저를 용서하지 않으셨으니…….”
뭐? 뭘 용서 안 해?
‘아아. 고양이 사건.’
나는 에사디엔에게서 점점 더 시선을 돌렸다. 기회를 준다고는 했지만 딱 잘라서 용서한다고 말한 기억은 없기 때문이었다.
눈을 돌리다 못해 고개까지 비트는데 에사디엔이 내 턱을 제자리로 돌렸다.
“왜 자꾸 저를 피하시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화상에 붕대가 쓸리면 얼마나 아플까 싶어서 잡힌 턱을 빼내지도 못한 채 그의 묵직한 시선을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고 코만 찡긋거렸다. 그러나 에사디엔의 인내심은 대단해서 결국 내게서 말을 이끌어내고야 말았다.
“미…….”
“미?”
“미안해서!”
눈을 꽉 감은 채 외쳤던 나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황자님은 나 때문에 다치고, 부관… 니콜라스는 나 때문에 목숨을 잃었어요.”
“비아체 경의 순직은 오스틴 때문입니다.”
“…다친 건요?”
에사디엔은 어쩐지 부루퉁하게 느껴지는 시선으로 나를 잠시 보다가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숨만 붙어 있으면 사제들이 살려줄 테니까 말입니다.”
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었지만 어디서 들었던 말이라 나는 그만 멈칫했다.
“화상은 그 정도 상처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나는 미간을 잔뜩 좁히며 에사디엔을 노려보았다.
‘왜 이 사람은 자기 몸을 이토록 아무렇지 않게 다루는 걸까.’
화상이 얼마나 통증이 심한데. 약으로는 낫지 않는 열기가 살 아래에서 괴롭히는 통증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왜 화를 내십니까? 틀린 말씀을 드린 건 아니잖습니까.”
“황자님이 내 말을 따라 해서 그렇잖아요!”
“이제 제 마음을 좀 아시겠습니까?”
“모르겠는데요? 우리가 뭐 일심동체도 아니고… 앗!”
언제 미안해서 말을 못 했느냐는 듯 잔뜩 쏘아붙이던 나는 길 가운데 난 단차를 보지 못하고 발을 헛디뎠다.
휘청거리는 나를 에사디엔이 얼른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가두었다. 마치 지난번 이곳, 플렌드나 신전 건물에서 빠져나오던 때처럼.
그때처럼 가슴이 간질거리는 것 같아 곧바로 몸을 떼려는데 에사디엔이 나지막이 말했다.
“기대셔도 됩니다.”
그 말에 최면이라도 걸린 듯 몸에서 힘이 풀렸다. 에사디엔에게서 내가 좋아하는 시원한 향기가 나서 그런 건지, 아니면 큰일들을 차례로 겪으며 마음이 허해져서인지.
내 몸 전체를 감싸는 포옹에 계속 곤두서 있던 기분이 조금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아무튼… 정말 미안해요. 평소에 쓸 수 있게 장갑을 선물할게요. 북부에서 무두질한 최상급 가죽으로 만들어서.”
“감사합니다.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그런데 어쩐지 대답이 이상했다. 간직한다면 사용하지 않고 넣어두기만 하겠다는 것 아닌가.
의아해진 내가 고개를 들자 에사디엔이 차분하게 말했다.
“전 장갑을 끼고 다니지 않을 겁니다.”
“왜요? 흉터가…….”
“부끄럽지 않으니까요.”
머리가 종이라도 된 것처럼 뎅, 하고 울렸다.
“플렌드나 님이 말씀하시는 아름다움은, 매끄러운 외모와 피부에만 한합니까?”
“아니…요.”
이건 어릴 때 다 마친 교리 문답이었지만 에사디엔의 입에서 들으니 미뉴엘 종이 두 번째 울렸다.
데엥.
외모가 인성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외쳤던 것도 불과 얼마 전이건만. 나는 그저 말뿐인 사람이었던 걸까.
“미뉴엘, 당신도 내놓으라 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저는 지금까지와 똑같이 살 생각입니다. 장갑이 필요한 자리에서는 착용하고, 지금처럼 당신을 만지고 싶을 때는… 아.”
볼 위에 에사디엔의 손이 닿았다. 붕대의 존재를 새삼 깨달은 것처럼 그가 작게 혀를 찼다.
“지금도 직접 닿을 수가 없군요.”
“…그만해요.”
“미뉴엘?”
“황자님은 언제고 제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세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코뿔소처럼 달려들던 내게 사람 사이에는 거리가 필요하다는 걸 알려준 것도 에사디엔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이미 알고 있던 플렌드나의 교리를 끄집어내 눈앞에 보여준 것도 에사디엔이다.
“미안해요. 정말로… 저 때문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흉터가…….”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가는 내 턱을 또다시 에사디엔이 붙들었다. 속절없이 끌려 올라간 시선이 그의 시선과 얽혔다.
그는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예전에는 줄곧 무표정이었지만, 웃음을 드러낸 후부터는 이런 표정을 지으면 생각을 도통 읽을 수가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
가지런한 에사디엔의 눈썹을 보며 멍하니 생각했을 때였다. 그에 대답하듯 그가 갑작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랑합니다, 미뉴엘.”
예?
나는 잠시 딱딱하게 굳었다가 눈썹을 찌푸렸다. 조금 전까지 우울한 분위기 아니었냐고 묻는 것보다 더 궁금한 것이 있었다.
“이황자 앞에서 그렇게 말했던 건… 그냥 도발하려는 의도 아니었나요?”
“저는 진심입니다.”
단언한 에사디엔은 조금 망설이다가 말을 덧붙였다.
“이건 너무 구식입니다만, 제 마음을 꺼내서 보여드리고 싶군요.”
“하하, 진짜 구식이네요.”
나는 무슨 옛날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손을 내저었지만 에사디엔의 진지한 얼굴에는 미세한 금도 가지 않았다.
“하하…….”
정말 요만큼도.
“하…….”
주위에는 내 건조한 웃음만 울릴 뿐이었다. 결국 더 견디지 못한 내가 반문했다.
“아니, 진짜로?”
“사랑하니까, 당신이 다치는 것이 제가 다치는 것보다 훨씬 더 아픕니다.”
그 말을 듣는데 보골보골, 하는 소리가 겹치는 것 같았다. 가슴 속에 비눗방울이 하나둘씩 솟아오르면서.
“사랑하기 때문에 짐승이 되어서라도 당신 곁에 있고 싶었던 겁니다.”
이상했다. 에사디엔의 말이 이어질수록 비눗방울이 터지지 않고 계속 늘어나기만 했다. 가슴 속을 꽉 채워서 둥실둥실 몸이 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흐물흐물하게 풀리려는 안면 근육을 팍 긴장시켰다.
하지만…….
“당신을 사랑해서… 당신 혼자 상처를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어 기쁩니다.”
손바닥을 문지르는 손길에 고인 줄도 몰랐던 눈물이 후두두 아래로 떨어졌다.
에사디엔은 눈물이 잔뜩 고여 떨어지는 눈가에 살짝 입을 맞췄을 뿐 울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가 상냥하게 등을 쓸어줄수록 눈물은 그치기는커녕 더 엉망진창으로 흘렀다.
“가슴이… 잔뜩 뭉쳐서 터질 것 같은 것도 사랑이에요?”
이놈의 비눗방울들은 오밀조밀 뭉쳐 터질 듯 말듯 나를 불안하게 했다. 그러나 에사디엔은 아닌지 오늘 처음으로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였다. 내가 이렇게 우는데!
“예. 당신을 보면 제 심장이 터질 것 같습니다.”
“바, 흐흑, 바보 같아.”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에사디엔은 나긋하게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마주 댔다.
“사랑합니다. 이 말을 좀 더 빨리 드릴 수 있었다면, 이렇게 돌아오지는 않았을 텐데요.”
아쉬운 소리를 하면서 왜 저렇게 웃는 건지. 날 깨닫게 하기는 무슨, 역시 바보가 분명했다.
그런데 이 바보가 왜 귀엽게 느껴지는지. 왜 사랑한다고 할 때마다 몸이 둥둥 뜨는 것 같은지.
나는 왜 이렇게 울고 있는지!
아무래도 나까지 바보가 된 게 분명했다.
나는 좀처럼 멈추지 않는 울음 때문에 짜증을 내면서 동시에 행복해했다. 극과 극의 양가감정을 느끼면서도 에사디엔이 멀어지는 건 싫어서 떨어지는 그의 얼굴을 꽉 붙잡았다.
“…미뉴엘.”
“시끄러워요.”
그리고 이제 멀게만 느껴지는 언젠가처럼 우리 사이의 거리가 0이 되었다.
오랜만의 입맞춤은 길었고, 달았고, 눈물 맛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