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울음을 그치고 얼굴을 정돈한 뒤까지도 에사디엔은 계속해서 짙은 시선을 내게 고정하고 있었다.
휙, 휙.
이리저리 일부러 고개를 돌려봐도 떨어질 생각이 없는 시선에 민망해진 나는 그만 볼멘소리를 내고 말았다.
“이제 그만 봐요.”
“왜 그러십니까?”
왜 그러기는. 부끄러우니까 그렇지.
“울어서 눈이 부었잖아요.”
“눈가가 빨개지셔서 붉은 꽃봉오리 같습니다.”
세상에. 에사디엔이 이렇게 시적인 사람이었나?
뒤늦게 발견한 재능에 감탄과 함께 손끝 발끝이 모두 움츠러들었다.
“꽃은 무, 무슨…….”
더 들었다가는 발이 말려들어서 걷지도 못하겠다. 빠르게 판단을 마친 나는 슬금슬금 에사디엔에게서 떨어지려고 했으나.
초옥.
그보다 내 눈가에 에사디엔의 입술이 선명한 소리를 내며 닿았다가 떨어지는 것이 더 빨랐다.
“하아.”
그러고는 나를 꽉 끌어당겨 안으며 만족스러운 한숨까지 내쉰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온 듯한 따뜻한 숨결이 머리카락을 간지럽히는 감각.
에사디엔의 가슴팍에 이마를 대고 있지만 부드럽게 풀렸을 그의 표정이 눈앞에 선했다.
‘…그렇게 좋은가.’
에사디엔이 이러는 게 적응이 되질 않아서, 아니… 사실 그는 전부터 ‘좋아해 빔’을 쏘고 있었지만 막상 받아들이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면서도 줏대 없는 내 광대는 착실히 위로 솟구치고 있었다.
‘으. 지금 이 얼굴은 절대로 못 보여줘.’
그런 점에서 보면 얼굴을 숨긴 지금 상태가 다행일지도 몰랐다.
문제는 손이었다.
‘어디…에 두지?’
그냥 축 늘어뜨리는 건 이상하고, 에사디엔의 옷을 잡는 건 어색하다. 그렇다고 같이 껴안으면 너무 적극적으로 스킨십하는 것 같단 말이야!
예전처럼 내가 일방적으로 들이댔다면 이런 고민 따위 없이 냅다, 아니 이쪽에서 먼저 끌어안았겠지만.
‘이제는 그렇게 못 하겠어.’
결국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만 있자니 에사디엔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불편하십니까?”
“아, 아, 아니요? 완전 괜찮은데요?”
화들짝 놀라서 양손을 휘저어가며 멀쩡함을 어필했다. 그러나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는 에사디엔은 나를 굳이! 떼어내 얼굴을 확인하려 했다.
“많이 우셔서… 혹시 눈이 따갑지는 않으신지.”
“아니에요!”
지금 이 괴상한 표정을 보일 수는 없다! 죽어도!
그 생각에 사로잡힌 나는 반사적으로 에사디엔의 허리를 꽉 껴안아버렸다.
‘흐억. 여전히 허리가 실해. 탄탄해!’
겨울이라 꽤 두툼한 옷 너머로도 느껴지는 단단함. 자연스럽게 얼마 전 에사디엔이 엘에서 인간으로 돌아왔을 때 봤던 모습이 떠올랐다.
꿀꺽.
입 안에 고인 침이 큰 소리와 함께 내려갔다.
‘드, 들었으려나? 왜 갑자기 침이 나오고 난리람.’
그런데 에사디엔은 가만히 선 채 웃지도, 더 상태를 묻지도 않았다.
‘휴우. 못 들었구나.’
안심하려던 찰나였다. 어디선가 크게 쿵쿵, 하고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쿵쿵!
쿵쿵쿵!
‘뭐지?’
눈썹을 찌푸리며 귀를 기울이기를 잠시. 나는 곧 그 소리가 에사디엔의 심장 박동음임을 깨달았다.
‘그… 심장이 터질 것 같다는 말이.’
진짜였냐고요. 보통은 비유 아니냐고요!
정말이지 1분만 더 포옹했다가는 심장 파열이 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큰 소리였다. 오죽하면 사람 몸에서 나는 소리라는 생각을 못 했을까.
“저기, 좀 떨어져 봐요. 이러다 어디 고장 나겠어요.”
“싫습니다, 미뉴엘. 조금만 더…….”
걱정이 된 내가 바르작거리며 에사디엔의 어깨를 밀어봤지만, 그는 어리광부리듯 목소리를 흘리며 나를 더 강하게 안았다.
뿐인가. 언제 굳어 있었냐는 듯이 내 정수리부터 이마까지 비처럼 입맞춤을 흩뿌렸다.
하지만 아무래도 성이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에사디엔은 간질간질한 기분 때문에 폭 숙인 채 버티던 내 고개까지 간단히 들어 올려 눈가를 꼼꼼히 확인했다.
“다행입니다.”
그 한마디를 남긴 그의 입술이 코를 따라 결국 다시 내 입술로 찾아왔다.
“사람 말을 좀, 흡.”
말을 좀 들으라는 말마저 에사디엔이 꿀꺽 삼켜버렸는데도 화가 나지 않는 건 왜일까.
짧고, 길고, 얕고, 깊은 입맞춤이 반복될수록 점점 더 커지는 그의 심장 소리 때문일까? 꼭 맞닿은 내 몸이 다 울리는 것 같은 그 소리 때문에.
대체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짙은 마찰음을 내며 에사디엔의 얼굴이 멀어졌다.
“후아…….”
나는 몽롱한 기분으로 긴 숨을 내쉬었다. 처음도 아닌데 괜히 긴장이 되어서 나도 모르게 숨을 많이 참았던 모양이었다.
에사디엔은 티가 날 정도로 부었음이 분명한 내 입술을 다정한 손길로 쓸었다. 꿀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아서 쉽게 마주칠 수도 없는 눈을 한 그가 말했다.
“아쉽지만 지금은 이만 보내드려야겠군요.”
“네?”
갑자기요?
마차로 데려다주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으슥한(?) 후원에서? 에사디엔이 그 정도로 기본 매너도 없는 사람은 아닌데.
어리둥절해진 내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그가 더 참기 힘들다는 듯 볼에 입술을 꾹 누르며 속삭였다.
“일행들이 데리러 오셔서.”
“넷?!”
정신이 확 들었다. 휙 뒤를 돌아보자 팔짱을 낀 채 선 쥬엘라 언니와 굳은 얼굴의 라망드, 민망한지 헛기침하는 클리데인이 보였다.
“으악!”
왜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지!
나는 괴성과 함께 에사디엔을 확 밀어냈다. 아니, 그러려 했지만 그는 언제나 나보다 한 박자 빠르게 움직였다.
부드럽게 물러나는 모습이 무슨 춤이라도 추는 듯해 또 홀린 듯 보는 내게 언니가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황자님과 이야기가 잘 끝난 모양이구나, 미뉴엘?”
“으, 응.”
나는 잘못한 사람처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언니는, 그리고 가족들은 내 선택을 받아들일 것이다.
머리로는 아는 사실인데도 기회만 한번 준다고 큰소리쳐 놓고는 홀라당 넘어간 게 부끄러웠다.
“그러면 일단 돌아가자꾸나.”
나를 부른 쥬엘라 언니가 살짝 무릎을 굽히며 에사디엔에게 간략하게 예를 표했다. 그리고 곧장 돌아서려던 언니가 괴상한 것을 본 듯 멈칫했다.
“그런데 미뉴엘.”
“으응?”
“황자님은 놔드려야 할 것 아니니.”
“으으응?”
그게 무슨 소리야, 하면서 언니의 시선 끝을 따라가 봤더니.
이게 무슨 일이야! 내 손이 에사디엔의 소매를 꼬옥 붙들고 있었다.
“아이고, 하하하! 내 손이 왜 그랬지? 하하, 참.”
너스레를 떨며 자연스럽게 손을 뗐지만, 기다렸다는 듯 붕대를 감은 손에 붙들려버렸다.
“저도 헤어지기 싫었습니다.”
보내드려야겠군요, 라고 한 지 몇 분이나 지났다고.
나는 그를 샐쭉하게 바라보며 설득했다.
“지금은 안 되죠. 일단 경호 문제는 어떻게 하려고요? 로열 가드도 분열되었는데 더 인력을 나눌 수는 없잖아요.”
“하지만 미뉴엘, 당신이 제게 위험할 때는 대공저로 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반대 상황이 생기면 꼭 대공저로 오세요. 황자궁에서 혼자 맞서는 것보다 나을 테니까.’
분명히… 그랬지.
그리고 에사디엔은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주춤한 나를 눈치챈 그가 계속해서 나를 설득했다.
“계속 함께 있자고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윽.
“저도 카르이넨 대공저로 돌아가겠다고 맹세했고 말입니다.”
으윽.
설득이라기보다 폭행에 가까운 사실 적시가 아닐까 싶기는 했지만.
엘에게 했던 말에 황성이 전복되던 밤의 일까지, 어쩌면 이렇게도 잘 기억하는 건지 신기할 정도였다.
흔들리는 내 마음을 알아챈 에사디엔이 싱긋 웃으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부디 데려가 주십시오.”
“…….”
“네? 주인님.”
그렇게 아양 부리는 에사디엔의 목깃 안쪽에 문득 시선이 닿았다.
본래라면 보이지 않는 각도였지만 그가 내 쪽으로 몸을 숙인 덕에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목깃 아래 가려진 목덜미가 빨갛게 달아오른 모습이.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에사디엔이 갑자기 이상해지거나 변한 것이 아니었다.
‘노력…하는 거구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도. 더는 후회하고 싶지 않으니까.
‘내 모습을 이입해서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야. 이 사람은 정말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분과 함께 코끝이 찡해졌다.
그렇게 쑥스러움도 참고 노력하는데 내가 질색하며 밀어낼 때마다 얼마나 상심했을까?
‘갑자기 이상형은 왜 물으세요?’
‘그대가 좋아할 수 있는 남자가 되고 싶어서…….’
‘그건 그냥… 연기잖아요.’
그렇게 에사디엔을 거부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그의 모습은 절대로 연기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다.
나는 지금껏 붙들려 있던 손에 힘을 주어 에사디엔의 손을 마주 잡고는 쥬엘라 언니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내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언니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렴, 미뉴엘.”
으응?
아니, 내 말에 크게 반대하지 않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빠른 승낙은 예상 밖인데.
그런데 이 중에서 놀란 사람은 오로지 나뿐인 듯했다.
쥬엘라 언니와 클리데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마차를 세워둔 방향으로 총총 걸음을 옮겼고, 에사디엔은 벅찬 듯 웃으며 마주 잡은 손을 당겼다.
그리고 지금껏 말이 없던 라망드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결국 또다시 돌아오신 겁니까?”
“사제여, 덕분에 마음을 확실히 정할 수 있었다.”
냉랭한 라망드의 말투와 상반되는 에사디엔의 감사 표현에 나는 눈만 동그랗게 떴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물어볼 틈도 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들어봐도 영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대처럼 감내할 수 없다, 사제여.”
…라거나.
“그 누구도 그대처럼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같은 말만 듣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유추하겠느냐고.
그러나 라망드는 그 뜬구름 잡는 말을 다 알아들었는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목표를 가늠하는 사수와도 같이 날카로운 눈빛에 내가 흠칫 긴장한 사이 화살보다 뾰족한 말이 날아왔다.
“정말이지 수치심이라고는 없는 분이십니다.”
“라, 라망드.”
아무래도 이번에는 말이 좀 심해서 말리려고 불렀지만 라망드는 나를 흘긋 보고는 휙 뒤돌아서 마차로 향했다.
그 얼굴이, 그리고 뒷모습이 차가우면서도 씁쓸하기 그지없어서 나는 더 붙잡지 못하고 얼떨떨한 상태로 굳어버렸다.
“무슨 일 있었어요, 두 사람?”
“음.”
잠시 고민하던 에사디엔은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그저 라망드 사제에게 설교를 들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대체…….”
무슨 설교이기에 라망드가 에사디엔을 그리도 째려보는 건지, 그게 궁금한 거라고 말하려던 나는 문득 스치는 생각에 입을 꾹 다물었다.
‘좋아한다던 사람하고 잘 안 됐나?’
황성 문이 닫히기 전에는 그래도 라망드의 기분이 괜찮았다.
어쩐지 최근 들어서 표정이 좋지 않다 싶더라니, 아무래도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고백할 마음을 먹었건만 차여버린 듯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친구라면서 그런 눈치도 없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