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108)화 (108/130)

108화

자책하던 나는 문득 떠오른 의문에 에사디엔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그 설교는 언제 들은 거예요?”

“엘의 모습으로 지낼 때였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엘이 처음 왔던 날 라망드가 한숨만 푹푹 내쉬다가 그를 낚아채듯이 데려가면서 얘기 좀 하자고 했지.

그러니까 그게…….

‘목, 목욕을 하고 난 후였어!’

펑, 소리가 날 정도로 얼굴이 급작스럽게 달아올랐다.

우뚝 멈춰 선 나를 돌아본 에사디엔은 내 생각을 들여다본 것처럼 헛기침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란.

“책임지게 해주십시오.”

“채, 책임이요?”

“저는 하루빨리 카르이넨의 검을 쥐고 싶습니다. 진심입니다.”

폐궁에 침투하며 들었던 말이다.

그때는 우리 기사단에 들어오려는 건가, 하며 최대한 외면하던 진심이었지만 더는 그럴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말이야!

“저 지금 청혼받은 거예요?”

나는 조금 샐쭉해져서 물었다.

짜잔! 하는 서프라이즈 프러포즈에 로망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말로만 때우는 건 좀 그렇지!

그러나 뾰족해진 내 시선을 받으면서도 에사디엔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저 제 마음을 말씀드린 겁니다. 이렇게 해두지 않으면 언제고 날아가실 것 같아서.”

순간 움찔한 나는 에사디엔의 눈을 살폈다.

하지만 오늘따라 하늘빛을 띠는 푸른 눈에서, 날 어딘가에 가둬버릴 것 같은 음험한 기색은 엿보이지 않았다.

‘휴우. 역시 황금 새장 엔딩은 너무 나갔지?’

역시 에사디엔은 흑막 재질은 아니었다.

완전히 안심한 나는 피식 웃으며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내가 무슨 새인가요.”

“…….”

그런데 에사디엔은 웃기만 할 뿐 그 말을 받아치지 않았다.

“저, 저기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 끝이 떨렸다.

아무래도 괜히 받아줬나, 하는 생각마저 들려던 찰나 에사디엔이 내 손을 꼭 잡으며 속삭였다.

“일이 마무리되면 정식으로 청혼하겠습니다.”

지금까지와 달리 묵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잠시 말랑말랑한 기분에 취해서 잊고 있던 놈이 떠올랐다.

오스틴 로콰이트.

그 망나니는 에사디엔의 일격을 맞고도 살아남아 현재 황성의 문을 걸어 닫은 채 농성 중이었다.

‘참 명줄도 질기지.’

오스틴이 있는 한 에사디엔과 내게 평화란 먼일이다. 놈은 에사디엔에 대한 비뚤어진 증오도, 개비도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나는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모든 일이 끝나면.”

그때 개비가 슬쩍 물었다.

- 미뉴엘 너, 정말 엘하고 결혼할 테냐?

‘……!’

새, 생각해 보니 그러네?

그러니까 나는 에사디엔이 청혼하기를 기다리겠다고 허락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코 꿰여서 결혼을?!’

아직 거기까지는 상상하지 못했는데.

파혼하자고 난리를 칠 때는 언제고 너무 빨리 태세를 바꾼 것 같아 민망하기까지 했다.

눈을 데구루루 굴리던 나는 머뭇머뭇 입술을 벌렸지만, 내 입에서 에사디엔의 ‘에’도 나오기 전에 그가 몸을 숙였다.

꾸욱.

장갑 위로도 느껴지는 말캉한 입술에 조금 벌어졌던 입이 절로 닫혔다.

에사디엔은 내 네 번째 손가락 위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마치 아직 받지 못한 반지 대신인 것처럼.

나는 뜨거움을 느끼지 않는데 그와 함께 있으면 자꾸만 얼굴이며 온몸이 달아올랐다.

특히 지금 그의 숨결이 닿는 넷째 손가락은 낙인이라도 찍힌 것처럼 화끈거렸다.

그런 내 상태를 아는 건지 그는 비단결보다도 보드레하게 속삭였다.

“고맙습니다, 미뉴엘.”

그렇게 말해 버리면 더 무를 수가 없잖아.

나는 보이지 않는 사슬에 매인 사람처럼 침만 꼴깍 삼키며 에사디엔의 시선을 받았다.

뭔가를 꾹 참는 듯, 어느새 짙은 색으로 변한 눈동자에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두근, 두근.

세상에 둘만 남은 것처럼 느리게 흐르는 공기를 깨트린 건 먼저 마차 안에 들어가 있던 쥬엘라 언니의 호통이었다.

“빨리 안 타니!”

히익!

나는 마법에서 풀린 사람처럼 그제야 움찔 몸을 떨며 붙잡혔던 손을 빼냈다.

‘마차 문이 열려 있었어!’

다들 에사디엔과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말인즉, 우리 둘의 모습을 다들 지켜봤다는 거다!

“가, 가요!”

이건 일 년 치 이불킥감이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마음으로 뛰어들듯 후다닥 올라탄 내게 쥬엘라 언니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웬 존댓말이야?”

“가끔 그럴 때도 있는 거지! …요!”

언니 너무해.

그 뒤로 집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민망함을 감추려 창밖만 바라보며 손부채질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 * *

에사디엔이 대공저로 들어오고 얼마 후.

오스틴이 아직 살아 있는 것보다도 더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뭐? 칭황?”

황제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데 제멋대로 황제 자리에 오르겠노라 공표해 버린 것이다.

하필이면 차를 마시다가 소식을 접한 내 입에서 찻물이 주룩 흘러 그대로 찻잔에 쏟아졌다.

쥬엘라 언니는 우아하게 그 찻잔을 내 손에서 빼앗아 하녀에게 넘겨버렸다. 그러면서도 언니의 얼굴은 장난기 하나 없이 심각하기만 했다.

“그래.”

“제정신이야? 아니, 하긴 전부터 제정신은 아니었지.”

“이미 이황자와 함께 황성에 들어간 무리 중에는, 식솔을 몰래 풀어서 다른 귀족들을 설득하는 자들도 있는 모양이야.”

언니는 피곤해서 뻑뻑해진 눈을 꾹 누르면서도 말을 이었다.

“더 큰 문제는 거기에 휩쓸리는 자들이 있다는 거고.”

그들의 마음을 돌린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죽었던 셀레스테 자작이 살아 돌아왔다는 소식이었다.

기적이니 어쩌니 떠들썩했지만 나는 코웃음 쳤다.

“자작의 시신도 가짜였나 보네.”

눈앞에서 지긋지긋하게 보고 당한 능력이니 모를 수가 없었다. 한순간에 모래로 변해 흩어지던 오스틴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셀레스테 자작한테도 그 능력을 사용했겠지.

모래로 만든 인형이니 당연히 호흡도, 맥박도 없었을 테고, 조력자가 가볍게 입이나 코 안쪽에 독을 살짝 발라놓기만 하면 독살 판정은 간단하게 받았을 테니까.

‘그런데 대체 어떻게 그토록 자유자재로 능력을 쓰는 거지?’

오스틴이 모래 신의 사도도 아닌데.

당장 답을 알 수 없는 의문은 쥬엘라 언니의 말에 그만 지워졌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지금은 하위 귀족들을 주로 포섭하고 있어. 백작가쯤 되면 아직 정정하신 폐하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도 없고.”

그러나 하위 귀족은 수가 많다.

뿐만 아니라 황제가 멀쩡히 있는데도 오스틴 쪽으로 기우는 분위기가 일어났다는 것, 그 자체로 황실의 권위에 손상이 가고 있었다.

“이황자의 외가는 처음 황성을 차지할 때부터 함께하지 않았어?”

“아, 그래. 산도르 후작가가 고위 귀족 중에서 유일하게 이황자를 따랐지.”

나는 흰 눈썹 아래로 형형하게 번뜩이던 산도르 후작의 눈을 떠올렸다. 딱 한 번 스치듯 본 사람이지만 그 눈만큼은 잊히지 않을 정도로 강렬했다.

‘거의 이십 년이나 흘렀는데도 딸을 가슴에서 다 지우지 못한 거구나.’

오스틴이 영 이상하다는 걸 알아보지 못할 사람이 아닌 듯한데, 부모의 마음이란 그런 건가, 하고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언니, 후작가쯤 되면 한 번에 처분할 수 없을 만큼 재산이 많잖아?”

황명으로 재산 운용을 정지시키면 운신의 폭을 좁힐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꺼낸 말이었다.

그런데 내 말이 끝나자마자 언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조금 전의 우아하던 행동은 저만치 던진 것처럼 다급한 몸놀림이었다.

“그거야! 후작의 대리인들이 재산을 처분하는 척하며 돌아다닌 거였어!”

언니는 그대로 뛰어나갔다.

인사고 뭐고 할 겨를도 없이 사라지는 뒷모습을 멀거니 보던 나는 새로 내온 차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답답한 속은 찻물에 쓸려 내려가지 않았다.

“…본래라면 신년제를 준비하면서 다들 즐거워해야 할 시기인데.”

심상치 않은 정국에 모두가 긴장한 탓에 음울한 분위기만 가득하다. 화려한 장식들 사이에서 웃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풍경이 기괴하기까지 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플렌드나 님께서 상심하시겠어.”

하여튼 이것저것 다 오스틴 로콰이트 탓이다.

그런데… 딱 한 가지, 오스틴 탓을 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똑똑똑.

“라망드.”

나는 조심스럽게 라망드의 방 문을 두들겼다.

최근 라망드의 상태가 이상했다.

전에는 표정이 어두운 정도였다면 니콜라스의 추모식 후로는 아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처음 얼마 동안은 신전이며 기사단에 왔다 갔다 하느라 바쁜가 보다, 생각하고 귀찮게 굴지 않으려 일부러 찾지 않았는데.

‘라망드? 너희 가문의 추모식 이후로는 온 적 없단다.’

‘최근 기사단은 경계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훈련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가씨.’

사도님이며 클리데인의 말을 듣고서야 라망드가 방 안에만 콕 박혀 지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정말 실연 때문에 힘들어하는 건가?”

실연이야 시간이 해결해 준다지만 친구의 마음은 그게 아니다. 녀석이 이상해진 걸 알았는데도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똑똑.

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다시 노크했다.

“문 열어봐, 라망드.”

“…….”

하지만 문 안쪽에서는 인기척 하나 들리지 않았다.

너무 잠잠하니 머릿속으로 온갖 상상이 지나갔다.

‘이 녀석, 이불 뒤집어쓰고 우는 것 아냐?’

…에서부터.

‘설마 쓰러진 건가?!’

…까지.

그런 생각을 했더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쿵쿵쿵!

“야! 라 첨지! 대답 좀 해봐!”

하지만 여전히 안쪽은 고요하기만 했다.

‘지, 집사장. 집사장을 찾아야 해.’

얼른 열쇠를 가져올 생각에 홱 돌아선 순간이었다.

퍽!

“흐어어?!”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나는 너무 놀라서 주르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올려다본 곳에는 라망드가 서 있었다. 그제야 이마가 욱신거려서 문지르는 내게 그가 물었다.

“…뭐 해? 여기서.”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에서 어이없음이 물씬 느껴졌다.

“…….”

지금껏 찾던 사람이 눈앞에 서 있는데도 나는 멀거니 올려다보기만 했다.

라망드는 꽤 수척해진 상태였다.

원래도 날카롭던 얼굴선이 이제는 아주 수박 공예라도 할 것처럼 뾰족했다. 게다가 쥬엘라 언니 뺨칠 정도로 떼꾼해진 눈까지.

하지만 그 눈은 웃음기 하나 없이 차갑기만 했다.

일견 귀찮아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시선에 짓눌리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냐. 라망드가 그럴 리 없어.’

나는 서둘러 그 생각을 털어내며 벌떡 일어섰다.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지우려는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부러 눈썹을 구기고 목소리를 높였다.

“야! 방에 없으면 없다고 해야지!”

“방에 없는데 어떻게 대답하라고.”

“아…….”

그, 그러네?

푸쉬식, 소리가 날 정도로 금방 식어버린 기세에 라망드가 혀를 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