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여기서 뭐 하는 거냐니까.”
“아니, 네가…….”
대답하려던 나는 그만 멈칫했다.
‘이건 정말로 이상한데.’
라망드도 나도 언제나 서로의 방에 서슴없이 드나들었다.
물론 라망드가 내게 오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지만, 반대의 경우라도 굳이 찾아온 이유를 물을 필요가 없는 사이. 침실 문을 발로 차고 들어가도 놀라지 않는 사이.
그게 10년 차 친구, 아니 친구보다 가족에 가까운 우리 사이였다.
목에 뭐가 턱 걸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애써 무시하며 웃었다.
“요즘 네가 너무 안 보이길래 걱정돼서 왔지!”
“…….”
“어디 아픈 건 아니지?”
그러나 라망드는 계속해서 말이 없었다.
풀리지 않는 문제의 답을 찾는 것처럼 그는 단단히 팔짱을 낀 채로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볼 뿐이었다.
‘얘가 진짜로 왜 이러지?’
옆구리라도 한번 찔러볼까, 싶어졌을 때쯤이었다.
라망드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듯 깊은 한숨과 함께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하아. 별로.”
“그럼 무슨 일이라도 있어?”
“딱히.”
“…나한테 화났니?”
“아니.”
거짓말쟁이.
나는 부르르 떨리는 손을 꽉 그러쥐었다.
‘계속 단답만 하면서 화가 안 났다고? 아무 일도 없다고?’
점점 굳어가는 내 얼굴을 보면서도 라망드는 건조하기 짝이 없는 말투로 폭탄을 터뜨렸다.
“이제 내 방으로 오지 마.”
“뭐라고? 왜?!”
“왜냐니.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뭐어?”
상상도 못 했던 말이었다. 기가 막혀서 지금껏 느낀 짜증이며 당혹스러움이 다 휘발되어 버렸다.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무슨 짓? 네가 무슨 짓을 해, 하길. 평생 우리가 이러고 살았는데 이제 와서 내외를…….”
타앙!
라망드의 손이 내 얼굴 옆을 지나 문을 강하게 때렸다.
지금껏 내 앞에서 한 번도 폭력적인 짓을 한 적 없던 그의 행동에 몸이 절로 굳었다.
“라, 라망드?”
“왜.”
“…어?”
주춤 물러섰지만 등 뒤에는 문이 있다. 미처 한 발짝도 뒷걸음질 치지 못하고 가로막힌 내게 라망드가 천천히 몸을 숙였다.
그림자에 잠긴 얼굴에서 보랏빛 눈만 빛나는 것 같아 나는 사자 앞의 토끼처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왜 내가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가족이라서?”
“그, 그래. 우, 우린 가족이잖아.”
라망드의 미지근한 숨결이 볼에 와 닿자 목소리가 달달 떨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껏 라망드와 이 정도 접촉은 일상적으로 하는 거였다. 한창 아팠을 적에는 아예 같은 방을 쓰기도 했으니 말 다 했지.
‘그러면 지금은 왜 이렇게 긴장하는 거냐고, 미뉴엘 카르이넨!’
스스로를 몰아붙여 봐도 이렇다 할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한 번 깜빡이지도 않는 눈 때문일까? 정말 자수정으로 변해 버린 것처럼 무기질적으로 반짝거리는 저 눈 때문에?
“하하… 가족.”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보낸 시간을 부정하는 것처럼 공허한 웃음 앞에서는 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발끈한 나는 라망드의 팔을 퍽퍽 때리며 성을 냈다.
“가족이 아니면 뭔데, 우리가? 십 년 넘게 같은 지붕 아래서 함께 먹고 자고 부대끼면서 사는 게 가족이지, 그럼 뭔데!”
“네 약혼자도 그렇게 생각한대?”
“…뭐?”
그 물음에 에사디엔의 단호한 대답이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설마 지금 올세 경한테 질투하는 거예요?’
‘예.’
클리데인마저 질투한다던 그가 엘의 몸으로 지내며 라망드와 나를 보고 어떻게 생각했을까.
“에사디엔…은…….”
어느새 내 손은 움직임을 멈춘 채 라망드의 팔을 꽉 쥐고 있었다.
그것 보라는 듯 침잠한 표정의 라망드에게 그렇다고 해야 하는데, 섣불리 입을 뗄 수가 없어서 괴로워하던 찰나.
“라망드 사제.”
익히 아는 목소리가 느릿하게 떨어졌다.
“하.”
내 어깨가 움찔하며 튄 반면 라망드는 놀라지도 않고 짜증 섞인 한숨과 함께 내게서 물러섰다.
그의 뒤로 보이는 사람은 역시나.
“…미뉴엘.”
무표정한 에사디엔이었다.
‘하필이면 왜 지금!’
라페슈 대신 라망드가 있고, 목격한 사람이 뒤바뀌었을 뿐 성인식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나는 낭패감에 발을 동동 굴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고요한 에사디엔의 얼굴에 겁이 더럭 났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똑같은 오해가 반복되게 두고 싶지 않았으니까.
“저, 에사디엔, 이건…….”
조심조심 뻗은 손을 에사디엔의 손이 마중 나오듯 꼭 잡아주었다. 변명으로 들릴 것을 알면서도 그에 힘을 얻어 나머지 말도 할 수 있었다.
“요즘 라망드가 안 보여서… 걱정돼서 찾아온 거예요.”
그러나 잔뜩 긴장한 나와 달리 에사디엔은 담백하게 대답했다.
“압니다.”
“네?”
“라망드 사제가 당신께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저도 압니다, 미뉴엘.”
세상에.
“정말요? 저는…….”
라페슈하고 같이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오해했는데.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하지만 에사디엔은 내 마음을 읽는 것이 분명했다. 땅만 보는 내 턱을 잡아 올린 그가 단단히 못을 박았다.
“그때와 지금 이 경우는 완전히 다릅니다. 제가 당신과 라망드 사제 사이를 오해할 일은 없습니다. 두 사람은 ‘가족’이니까.”
말을 마친 그가 나를 위로하듯 살포시 안아주었다.
“언제까지나.”
끌어당겨지는 찰나 에사디엔의 시선이 내가 아니라 라망드에게로 향한 것 같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지만, 등을 천천히 토닥이며 달래주는 손길에 곧 녹아 사라졌다.
“에사디엔…….”
“괜찮습니다. 숨 쉬십시오.”
그 말을 듣고서야 내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숨이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만 밭게 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온몸이 파르르 떨리며 참았던 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하아아.”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그러나 등 뒤에서 문이 세게 열렸다가 부서질 듯 닫히는 소리에 잠시 노곤해졌던 어깨가 다시금 뻣뻣해졌다.
“라망드가 왜 저러는지 모르겠어요.”
에사디엔이 오해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는데도 화를 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마치 오해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떠올려버린 나는 서둘러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라망드가 그럴 리 없다. 무슨 일이라도 항상 나를 위해서 하라던 녀석인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때문이니 제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라망드하고 저 사이의 일인데 왜 당신 탓이라고 해요?”
오늘따라 정말 이상한 일투성이다.
에사디엔은 대답 대신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미소 지으며 말을 돌렸다.
“방까지 모셔다드릴까요?”
오늘도 빛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쉽게 말해 줄 기색이 아니었다. 그저 두 사람 사이에도 무슨 일이 있었나 보다, 하고 가늠할 따름이었다.
“혼자 갈 수 있거든요. 어린애도 아니고.”
조금 부루퉁하게 말하자 에사디엔의 입술 사이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눈을 깊게 휜 그의 손가락이 장갑 끄트머리의 레이스를 간지럽히듯 내 손목 안쪽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당연한 말씀을요.”
꿀처럼 진득해진 목소리에 괜히 목이 다 말라오는 것만 같았다.
‘수줍음 총량 불변의 법칙이라도 있는 건지.’
완전히 역전되어 버린 관계에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래도 이런 건 나답지 않아.’
나는 뒤늦게 마음을 다잡으며 크게 헛기침했다.
“어흠!”
에사디엔을 당황하게 만드는 미뉴엘로 돌아가리라!
“그럼 이만 가볼게요. 라망드하고는 단둘이서 보고 싶은 거죠?”
“예. 고맙습니다, 미뉴엘.”
“아니에요. 그냥…….”
라망드가 처음으로 이런 모습을 보이는데 내가 위로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이 씁쓸했다. 원인을 자처하는 에사디엔이 바로 대화해 보겠다고 해서 그나마 다행이랄까.
하지만 그가 라망드와 대화는 할 수 있을지언정 내 상실감에서 비롯된 씁쓸함까지는 해결할 수 없었다. 그런 걸 요구해서도 안 되는 거고.
그래서 나는 그냥 웃었다.
“이따가 같이 저녁 먹을래요? 오늘은 양고기랬어요.”
“브로콜리도 드셔야 합니다.”
“…….”
싫은데.
나는 방어적으로 한 걸음 물러서며 에사디엔을 째려보았다.
“왜 제 편식을 고치려고 하세요? 위도, 인생도 한정되어 있어요. 좋아하는 것만으로 채우기도 모자란다고요.”
“저와 함께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억.”
그렇게 나오면 곤란한걸.
암에 걸려도 돈만 퍼부으면 신성력으로 낫게 할 수 있지만, 저런 말을 하는데 차마 ‘돈 많으니 걱정 마시죠!’라고 할 수는 없었다.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만.”
“싫다고는 안 했거든요? 아마도?”
마음속으로만 생각했지.
“딱 한 조각이에요!”
땅땅, 못을 박은 나는 혹여나 당근도 먹으라고 할까 봐 서둘러 돌아섰다.
“하하.”
다행히 에사디엔은 조금 웃기만 할 뿐 나를 더 잡지 않았다.
총총걸음을 옮기는 등 뒤로 똑똑, 하고 그가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라망드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흠. 역시 나도 동석하는 편이 나으려나.’
막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우지끈!
뭔가 부서지는 소리에 놀라서 홱 돌아보자 어느 틈엔가 열린 문 안으로 에사디엔이 들어서는 중이었다.
탕!
그리고 아까 못지않게 커다란 소리와 함께 문이 단단히 닫히고 난 후였다.
덜그럭.
문고리가 별안간 앞으로 덜렁거리며 쏠리더니 곧 아래로 툭 떨어졌다.
“지금 문을 안 열어준다고 문고리 부수고 들어간 거야?”
중얼거리는 내 입가로 헛웃음이 샜다.
“정말… 우리 에사디엔이 달라졌어요.”
상대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을 때, 예전의 그라면 그대로 돌아섰을 터다. 하지만 이제는 매달릴 줄도, 쳐들어갈 줄도 아는 사람으로 변했다.
그 변화가 기꺼웠다.
‘미련도, 마음 둘 곳도 없이 사는 것보다는 간절한 편이 훨씬 낫지.’
그건 그렇고.
“아… 둘이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지.”
궁금해 죽을 것 같다.
나는 라망드의 방으로 다가가지도, 그렇다고 이 자리를 뜨지도 못하고 제자리걸음만 반복했다.
내 안에서는 두 명의 미뉴엘이 싸우고 있었다.
- 궁금하잖아! 궁금하면 아무것도 손에 안 잡히는 법이라고!
- 에사디엔을 믿는다는 걸 보여주자. 그 사람이 같이 가자고 하지 않은 이유가 있을 거야.
“젠장! 둘 다 맞는 소리를 하면 어쩌자는 거야!”
급기야 머리를 헤집기 시작했을 때였다.
“아가씨?”
나는 깜짝 놀라 돌아섰다. 집사가 엉망으로 뒤엉킨 내 머리카락을 보더니 난감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 아하하. 별거 아냐.”
나는 서둘러 손가락으로 머리를 빗으며 얼버무렸지만 집사의 표정에는 오히려 걱정이 덧씌워졌다.
“괜찮으십니까? 부축해 드릴까요?”
“아냐! 라망드 방 문고리만 고쳐주도록 해. 부서졌더라.”
“어쩌다 그런…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
나는 집사에게 서둘러 인사를 던진 후 총총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집사가 때마침 저길 지나가서 다행이야.”
만약 엿듣다가 들키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어.
안도감에 한숨을 흘리며 모퉁이를 돌자 예상치 못한 풍경이 나를 맞았다.
“우와아!”
정원을 면한 복도.
우중충하게 구름이 껴 음울하기만 했던 것이 언제냐는 듯 찬란한 햇빛이 들이쳐 모든 것을 반짝반짝 빛나게 하고 있었다.
쌓인 눈도, 신년제 장식도, 복도 바닥도, 벽에 걸린 그림까지도.
나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지으며 한참이나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