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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110)화 (110/130)

110화

좋은 소식들이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그 아름다운 풍경이 어떤 징조였던 것처럼.

산도르 후작가를 막은 쥬엘라 언니의 조치 덕에 귀족들을 들쑤시고 다니는 자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뒤이어 각 신전도 공식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근래 세간에서 말하는 ‘부활’을 확인한바, 신성(神性)의 행사로 인정하지 않는다.]

즉 셀레스테 자작이 다시 나타난 데 신성력이 작용하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재등장했느냐?

보통 상황이었다면 이황자가 어떻게 잘 빼돌려줬나 보다, 하고 생각할 터였다.

그러나 이번 발표는 신전에서, 그것도 여러 신전에서 한목소리를 낸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의 생각이 은연중에 이런 식으로 흐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 뭔가 삿된 마법이라도 얽힌 건가? 이러다 우리도 도매금으로 화형당하는 거 아냐?’

따라서 다소 흔들리던 귀족들도 자연스럽게 이황자 세력을 만나 주지 않게 되던 그런 어느 날.

가장 기쁜 소식, 아니 사람들이 찾아왔다.

“엄마! 아빠! 언니이!!”

드디어 부모님과 엘가 언니가 북부의 소동을 정리하고 로콰이트로 온 것이다.

나는 구르듯이 달려 나가 어머니와 아버지를 동시에 껴안았다. 여리여리한 외모와 달리 은근히 마디가 큰 아버지의 손이 내 어깨를 도닥도닥 두들겼다.

“그간의 일은 모두 들었다. 고생이 많았더구나, 우리 딸.”

“다 컸구나.”

아버지와 어머니의 따뜻한 말씀에 괜히 눈물이 고였다. 힘들었던 시간 동안 쌓였던 응어리가 그제야 녹은 것처럼.

“엄마.”

“음.”

“죄송해요, 저 때문에 니콜라스 경이…….”

“미뉴엘.”

차마 얼굴도 보지 못하고 꽉 껴안은 채로 사과하는 내 몸을 떼어내며 어머니는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나에게 사과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엄마하고 오래 일한 부관이었잖아요.”

“유능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도 마음이 아프지만, 네 슬픔과 미안함을 받을 사람은 내가 아니구나.”

“…그럼요?”

“니콜라스 비아체 자신. 그리고 그 가족들.”

그건 당연하잖아요, 라고 대답하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입술이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니콜라스의 추모식 이후로 어느 정도 죄책감을 던 것일지도 몰랐다.

‘바보 같네.’

나는 고개를 뚝 떨어뜨렸다.

창피한 일이었다. 니콜라스는 이제 없지만 그의 성을 지닌 사람들은 남았는데도 그들을 살피지 않았다니.

그리고 깨달았다. 그를 잊지 않는 것이 책임감의 마지막 방향이라는 것을.

“제가… 장례식 전에 비아체 가문에 직접 방문할게요.”

“그래.”

어머니는 그제야 희미한 미소와 함께 내 머리를 어루만지고는 아버지와 함께 기다리던 집사장에게 성큼성큼 걸어가셨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게 엘가 언니가 다가왔다.

“쥬엘라가 그러더군. 네가 더는 아기가 아니라고.”

“에이. 언니들한테는 영원한 아기지.”

“녀석.”

웃음 적은 언니의 얼굴에 미소가 돌았다.

마주 웃던 내 눈에 언니 뒤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기사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언니가 이끌고 온 기사들은 조를 이뤄 커다란 궤짝을 운반하고 있었는데 그 수가 척 봐도 열 개는 넘었다.

“저건 뭐야?”

“음. 열어보지 않는 편이 좋을 거다.”

“굳이 열어보지는 않겠지만… 뭐길래 그래?”

“반역자에게 보내는 선물이지.”

그 순간 엘가 언니의 코웃음 소리가 왜 그리도 오싹하게 들리던지. 바싹 말라 있는 궤짝 밑바닥에서 붉은 액체가 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들어가자, 미뉴엘.”

“으, 으응.”

부모님은 잠시 쉬지도 않으시고 황제를 알현하러 플렌드나 신전에 가실 예정이었다. 그 전에 잠시 짬을 내어 가족이 모두 모이는 자리를 만들었다.

나는 언니의 손에 이끌려 들어가면서도 그 많은 궤짝을 도통 머리에서 지우지 못했다.

‘하, 하긴 엄마, 아빠하고 언니가 어떻게 돌아왔겠어.’

당연히 다 처리했겠지!

‘그럼… 저건 머리들인가?’

궤짝 안에서 이리저리 부딪치고 있을 그것들을 상상하는 사이에 부모님과 쥬엘라 언니도 안으로 들어왔다.

다들 자리에 앉고 나자 엘가 언니가 부모님을 대신해 북부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히 이야기해 주었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현혹 계열 마법으로 몬스터 부락의 지도자를 조종하고 있더군.”

예상외로 그들이 이끌고 온 호위병이 많은 데다 몬스터들에게 걸린 현혹이 빨리 풀리지 않아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번 마법의 효과가 사라지자 몬스터들은 지금껏 조종당하던 지도자를 죽이고 부락도 버린 채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새로운 터전을 잡아야 할 테니 몬스터들도 앞으로 이삼 년은 조용할 것 같다.”

이어서 쥬엘라 언니도 그간 상회에 있었던 일을 비롯해 최근 하위 귀족들 사이에 있었던 포섭 시도에 대해 말했다.

평소에도 자주 함께하는 시간을 갖는 우리 가족이지만, 지금은 회포를 푸는 자리라기보다 보고회 같은 분위기다.

그래도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직계의 숫자도 적은 집안에서 말을 전해 들으며 오해를 쌓는 일만큼은 없어야 한다는 게 우리 부모님의 지론이니까.

“…해서 셀레스테 자작은 현재 칩거 중입니다.”

“황성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말이니?”

“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들들과 함께 두문불출하고 있어요.”

“일단 지켜보는 수밖에 없겠구나.”

쥬엘라 언니와 아버지의 대화가 마무리되고 있어 나도 슬슬 내가 할 말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똑똑.

별안간 들린 노크 소리에 다들 긴급한 사태를 예상하고 표정을 굳혔다.

하인들마저 내보낸 자리, 이 시간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그들도 잘 알고 있으니까.

잠시 후 집사가 송구스러운 얼굴로 들어왔을 때, 엘가 언니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선 상태였다.

“무슨 일이지?”

“저, 다름이 아니라 삼황자님께서 오셨습니다.”

순간 가족들의 시선이 모조리 내게 쏠렸다.

“헉. 제가 부른 거 아니에요.”

에사디엔은 추모식 후로 우리 저택의 손님용 별저에서 지내는 중이었다.

그가 내게 찾아올 때도 있고, 내가 그를 찾아가 시간을 보낼 때도 있었다. 평소처럼 나를 만나러 온 걸까, 아니면.

‘부모님이 오셨다는 걸 전해 들은 걸까?’

손님 된 도리로 인사하러 온 것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라고 생각했지만, 잠시 후.

단정한 몸놀림으로 걸어 들어온 에사디엔이 우리 부모님 앞에 대뜸 한쪽 무릎을 꿇는 순간 내 평정도 와장창 박살 났다.

“에사……!”

“조용히, 미뉴엘.”

깜짝 놀라 일어서려 했지만 곁에 앉은 쥬엘라 언니가 나를 붙들었다.

에사디엔은 나를 곁눈으로도 보지 않았다. 오로지 눈앞에 우리 부모님만 있는 것처럼 올곧게 바라보며 말했다.

“귀한 따님의 마음을 어지럽혔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말투마저 바뀌었다.

‘황족이 귀족에게 존대하다니.’

에사디엔이 내게 그러는 것이야 조금 무뎌진 상태였지만 우리 부모님께 하는 것을 보니 또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 이래도 되는 건가.’

그러나 싱숭생숭한 건 나뿐인 듯했다.

다들 조각상이라도 된 것처럼 얼굴에 감정 한 올 드러내지 않고 에사디엔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눈에서 레이저라도 나왔다면 그는 이미 한 줌 재만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에사디엔은 그런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말을 이었다.

“하나 이제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평생 미뉴엘을 존중하며 살겠습니다. 제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십시오.”

에사디엔이 말을 끝맺은 후 실내에는 잠시 적막만 맴돌았다.

그것을 깬 것은 어머니의 손가락이 팔걸이를 천천히 두들기는 소리였다.

툭, 툭, 툭.

메트로놈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일정한 소리가 이어질수록 어쩐지 점점 가슴이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그 소리를 배경으로 아버지가 드디어 내게 눈길을 돌리셨다.

“그래서, 미뉴엘? 네 생각은 어떠니.”

“어… 헤어지려고 했을 때는 오해가 있었으니까요…….”

어느새 아버지는 물론이고 가족들이며 에사디엔의 시선까지 모두 내게 쏠려 있었다.

‘으악! 다 나만 봐!’

그 난리를 쳐놓고 번복하려니 창피해서 딱 죽을 것만 같았다.

동시에 이 자리에서 이러니저러니 하는 말은 필요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꾸욱, 손을 강하게 그러쥔 나는 수많은 이유를 건너뛰고 결론을 내놓았다.

“…네. 다시 만나보려고요.”

하지만 내 생각이 틀린 것이었을까?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부모님과 엘가 언니가 차례로 확인인지 만류인지 모를 말을 던졌다.

“신중해라.”

“이번에 파혼 요청을 철회하면 두 번 다시 기회는 없을 거란다, 미뉴엘.”

“그러니 감언이설에 휘둘리면 안 된다.”

압박 면접을 하는 건 나 같은데, 한 사람의 말이 끝날 때마다 에사디엔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숙었다.

그 모습을 보니까 불쑥 화가 솟았다.

‘이러려고 여기서 지내겠다고 한 거야?’

나는 자리를 떨치고 벌떡 일어섰다. 이번에는 쥬엘라 언니도 나를 막지 않았다.

“사람 무릎 꿇려놓고 면전에서 너무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도 썩 좋지 않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 에사디엔의 팔을 붙잡았다.

“일어나요.”

“…미뉴엘.”

“어서요!”

재차 잡아당기며 독촉하고 나서야 에사디엔이 천천히 일어섰다.

나는 가족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말했다.

“걱정하시는 거 알아요. 싫어졌다고 학을 뗐던 게 바로 얼마 전이니까.”

가족들 보란 듯이 에사디엔의 팔을 꼭 끌어안자 그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 튀었다.

‘지금도 목깃을 들춰보면 살갗이 빨개져 있겠지.’

그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나는 애써 누르고 말을 이었다.

“저도 우리 가문을 소중히 여겨요. 엄마하고 아빠, 언니들이랑 라망드를 사랑하는 만큼. 그런데 이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도 그보다 작지 않다는 걸 깨달았어요.”

“확신하니?”

“네. 그러니까 더는 모두를 걱정시키지 않을 거고, 오해 한 번으로 돌아서는 일도 없을 거예요. 이 사람도 변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동안 품 안에서 에사디엔의 팔이 점점 뜨끈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뭐 이런 말에도 부끄러워해?’

덕분에 나도 점점 더 민망해져서 마무리는 헛기침과 함께 끝났다.

“그… 가족하고 에사디엔한테 느끼는 감정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아무튼요.”

그때였다. 처음에 일어서려던 나를 잡기만 했을 뿐 그 뒤로는 한마디도 없던 쥬엘라 언니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저는 미뉴엘의 결정을 지지해요.”

기대하지 않았던 지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쥬엘라 언니는 대놓고 에사디엔에게 냉랭한 태도를 취했으니까.

에사디엔에게 고개를 돌리자 그도 놀란 듯 나를 마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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