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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111)화 (111/130)

111화

“미뉴엘이 황자님을 보는 눈길에 쓰여 있잖아요? 행복하다고. 울면서 웃는 모습을 봤더니 전 반대할 수가 없네요.”

으악! 쥬엘라 언니가 지켜보고 있었구나!

‘대, 대체 언제부터?’

놀랍고 부끄러워서 얼어붙은 사이 언니는 딱 잘라 말했다.

“미뉴엘이 더는 애도 아니고요.”

언니…….

둘이서만 로콰이트에서 지내는 동안에 언니에게는 나에 대한 신뢰감 같은 것이 생긴 모양이다.

그저 귀엽기만 한 막내가 아닌, 곁을 내어줘도 좋을 가족으로서.

언니는 나를 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리면서 나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얕게 몰아쉬었다.

“…알겠다.”

맨 처음으로 반응한 건 어머니였다.

“의지가 확고한 걸 보니 좋구나.”

“좋아한다는 감정만으로는 살아가기 힘들지. 함께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만 해.”

슬그머니 손을 맞잡는 부모님의 모습에서 아직 말하지 않은 한마디가 들리는 듯했다.

‘우리처럼.’

언제나 그렇지만 정말 금슬이 남다르시다니까.

“그럼 이만 마무리하지.”

어쩐지 조금 급해 보이는 어머니가 일어나고, 그에 이끌려 가시던 아버지는 그 와중에도 싱긋 웃으며 에사디엔에게 말을 건넸다.

“카르이넨의 문이 다시 열렸군요, 황자님.”

“이제는 문밖으로 나서지 않을 겁니다.”

에사디엔의 다짐을 뒤따른 쥬엘라 언니가 받아쳤다.

“지켜보죠.”

아니, 받아들인 거 아니었어?!

도끼눈을 뜬 나와 달리 에사디엔은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묵례를 건넬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마지막으로 엘가 언니가 다가왔다.

“…황자님.”

평소보다 더 번뜩이는 눈과 묵직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언뜻 언니의 주위로 검붉은 오라가 줄기줄기 뻗어 나오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어릴 적부터 뵈었던 분께 외람되오나, 정식으로 혼인하기 전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면.”

언니의 손이 검 손잡이로 향했다.

“내 모든 것을 걸고 가만두지 않겠다.”

언니는 엄청나게 비장했다.

아무리 숙이고 있다지만 에사디엔은 황족인데, 이런 태도를 보여서야 황가에 충성하는 카르이넨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만큼 언니가 진심이라는 뜻이었지만 내 긴장감은 그만 푸쉬쉬 식고 말았다.

‘내가 탈의한 에사디엔을 몇 번이나 봤는데.’

뽀뽀도 많이… 어흠.

아무튼 나는 손을 절레절레 저으며 언니의 비장함을 흩트렸다.

“걱정 마. 볼 거 다 봤는데 이제 와서 무슨…….”

하지만 이게 웬걸. 에사디엔과 엘가 언니가 동시에 내 말을 가로막았다.

“못 봤습니다!”

“그건 넘긴다손 치더라도!”

하지만 에사디엔의 말을 들은 언니는 바로 험악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지?”

“…….”

아아아. 에사디엔은 또 엘이 됐을 때 목욕 당하던(?) 장면을 떠올렸음이 분명했다.

‘저런 바보.’

나는 웃음을 꾹 누르며 엘가 언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알았어, 언니. 첫날밤은 결혼식 날 가지는 게 당연하지! 암, 그렇고말고.”

“…….”

“응? 언니이. 나 팔 아픈데?”

짐짓 엄살을 부리자 언니는 못 이기겠다는 듯 혀를 차며 검 자루에 안전 고리를 끼웠다.

‘벨 생각이었어?!’

내가 못 살아. 물론 에사디엔도 그냥 공격당하고 있지만은 않았겠지만, 상상했더니 없던 두통이 생길 것만 같았다.

그런 내 머리를 아쉬운 손길로 두어 차례 쓰다듬은 엘가 언니마저 나가자 주위가 고요해졌다.

‘아.’

둘만 남아버렸네.

옆을 돌아보자 에사디엔과 눈이 마주쳤다. 방금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그를 보자 고백 아닌 고백을 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이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도 그보다 작지 않다는 걸 깨달았어요.’

‘으아아악!’

내적 비명을 지르며 나도 얼른 나가려 했지만, 에사디엔의 팔을 놓자마자 그가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꺅! 뭐, 뭐예요? 갑자기!”

“하하하.”

에사디엔은 나를 아기처럼 들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이마에 ‘행!복!’이라고 써둔 것처럼 환히 빛나는 표정에 덩달아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다잡았다.

“뭐, 뭐가 그렇게 좋아요?”

“그냥, 전부 다 좋습니다.”

어휴, 정말.

나는 에사디엔의 어깨를 찰싹 때리며 눈을 흘겼다.

“말 안 할 거면 내려줘요!”

하지만 내려주기는커녕 에사디엔은 아예 나를 더 높이 올리며 자신의 팔뚝에 달랑 나를 앉혔다.

나는 아연해져서 그의 어깨를 꽉 붙든 채 입만 뻐끔거렸다.

‘이 사람의 근력은 대체……?’

번쩍번쩍 안아 드는 거야 힘이 세면 그럴 수 있다고 쳐도 팔뚝 하나만으로 성인 여자를 지탱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아무리 내가 말랐기로서니 뼈와 옷 무게는 무시하지 못할 정도일 텐데.

‘하긴, 예전에 몸이 폴더블 핸드폰처럼 슉슉 접히기도 했지.’

기사들은 다 그런가? 장난이 아니었던 에사디엔의 근육을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시선이 천천히 그의 얼굴 아래로 내려갔다.

에사디엔이 불쑥 말했다.

“원하신다면 벗겠습니다.”

“콜록, 콜록!”

상상도 못 했던 말에 사레가 막 들려버렸다.

아니 이게 무슨 ‘벗으라면 벗겠어요.’야?!

“어휴… 방금 엘가 언니가 불미스러운 일 만들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건 제게 하는 경고였습니다.”

“아니, 콜록. 그래도요.”

눈앞에 근육이 4d로 울끈불끈하는데 어떻게 가만히 지켜봐?

아무래도 에사디엔은 내가 얼마나 위험한 짐승이 될 수 있는지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자꾸 잔기침하는 내 등을 살살 두들기며 하는 말을 들으니 100%였다.

“주인님께서 저를 봐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주인님 소리 좀…….”

한숨을 쉰 나는 양손으로 에사디엔의 얼굴을 붙들며 또박또박 말했다.

“똑똑히 보고 있다고요, 항상.”

“압니다. 하지만 전처럼 표현해 주시지 않아서… 불안했습니다.”

“아…….”

에사디엔이 직진하는 반면에, 나는 전처럼 엉겨 붙기는커녕 애매하게 물러서니 애가 닳았나 보다.

조금 미안하기는 했지만 이런 기회를 놓칠쏘냐.

나는 일부러 미간을 좁히며 톡 쏘아붙였다.

“흥. 이제 내 마음이 어땠는지 좀 알겠어요?”

“예. 무척.”

죄송했습니다, 하고 시무룩하게 사과하는 것도 잠시였다. 에사디엔의 얼굴이 다시 밝게 빛났다.

“하지만 가족분들 앞에서 그리 선언해 주셨으니 이제 불안해하지 않을 겁니다.”

환한 웃음에는 전염성이 있는 게 분명하다. 애써 누르던 입꼬리가 통제를 벗어나 위로 치솟는 걸 보면.

호선을 그리던 입술은 결국 살짝 벌어져 그 사이로 한마디가 톡 튀어나왔다.

“귀여워.”

‘그만 웃어요.’

뭔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에사디엔의 눈이 커지는 것을 보고 난 뒤였다.

나는 깜짝 놀라 뒤늦게 입을 턱 틀어막았다.

합.

‘왜 하필이면 이럴 때 생각과 말이 반대로 나오는 건지!’

하지만 그의 눈 밑이 발갛게 붉어지는 모습을 보니 에라 모르겠다, 싶어지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그의 얼굴을 붙잡고 쪽쪽, 가벼운 입맞춤을 잘게 퍼부었다.

뽀뽀 한 번에 그의 불안함이 10씩 사라지길 바라며.

진격의 미뉴엘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길 바라며.

그런데 계산에 조금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미뉴엘.”

“흡?!”

살짝 잠긴 듯한 목소리와 함께 에사디엔의 커다란 손이 내 뒤통수에 닿은 순간 ‘가벼움’은 저 멀리로 사라져버렸다.

내 발이 천천히 땅에 닿고 허리가 점점 뒤로 꺾이고…….

어흠.

아무튼 에사디엔의 불안함은 이제 전부 사라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 * *

창밖으로 함박눈이 소복소복 쌓이는 날이었다.

다각다각, 말발굽 소리와 함께 규칙적으로 달리는 마차 안.

에사디엔은 옆에 앉은 나를 꼭 끌어안은 채 뭔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황태자하고 있었던 일 때문인가?’

우리는 황제와 황태자를 알현한 후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에사디엔이 우리 집으로 들어왔으니 당연히 파혼 요청도 취소되었다는 뜻이지만, 우리 부모님도 허락하신 이상 폐하께도 정식으로 말씀드리는 게 도리였으니까.

그런데…….

‘황태자와 잠시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겠다고 나가더니 돌연 고성이 들려서 깜짝 놀랐더랬지.’

황제야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나는 괜히 좌불안석이었다.

빤히 보는 시선에 이끌리듯 에사디엔의 눈길이 내게 닿았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물었다.

“무슨 생각 해요?”

머뭇거리는 기색은 아직도 남아 있었지만, 내 말에 에사디엔은 뭔가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미뉴엘.”

“네.”

“당신께 고백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고, 고백?

또 무슨 일이래. 고백이라는 단어에 괜히 심장이 벌렁거렸지만 나는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뭔데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말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 하도 많은 일이 있어서 머리가 팽팽 도느라 대답이 늘어졌다.

“네에에.”

“그러니까… 사실은 아마 저도, 당신이 싫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문법적으로 엉망인 말이었다. 그러나 포함된 의미는 어리둥절할 틈도 없이 곧장 마음에 닿았다.

‘에이. 그런 이야기였어?’

안심한 나는 눈을 찡그리듯 웃으며 에사디엔의 가슴팍을 콕 찔렀다.

“그런데도 그렇게 튕긴 거예요? 에이 참, 너무하셨네!”

에사디엔은 희미하게 웃으며 그 손을 그대로 감싸 올려 입술에 댔다. 따뜻한 숨결과 함께 그의 속에 고이기만 했던 것들이 가만가만 흘러나왔다.

에사디엔의 약점이.

내게 쉽사리 다가오지 못했던 이유, 익숙해졌나 싶으면 성큼 더 발을 내딛는 나를 좀처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가.

“제 성격을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온 사람이 처음이어서이기도 했지만.”

잠시 말을 끊은 에사디엔은 뭔가 큰 덩어리를 삼켜내듯 잠시 침묵했다.

‘동굴 밖으로 처음 나오는 동물 같네.’

답답했지만 그런 모습 때문에 나도 꾹 참고 기다렸다.

힘들면 말하지 말라고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겨우 발을 떼려 용기 낸 사람에게 그런 말은 도움이 안 돼.’

내가 할 수 있는 건 에사디엔이 완전히 밖으로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다행히 그는 곧 감정을 수습하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신 어머니요?”

조금 놀라 반문하자 에사디엔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께서는 언제나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한다고. 하지만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아, 그래서…….”

사랑 없는 약혼 관계라도 믿음만큼은 있어야 한다고 말했지.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에사디엔은 슬프게 웃으며 말했다.

“예. 그런 감정은 물거품과 같아서… 금방 사라지게 마련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아팠다.

덤덤한 것처럼 보여도 어린 시절에 겪은 일에서 아직도 자유로워지지 못했구나,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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