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마치 주문처럼 맴돌았습니다. 잊을 수도 없었습니다. 잊고 싶었지만 목을 졸리며 들은 말은 영영 잊히지 않더군요.”
“……!”
하지만 이건 정말로 충격적이다.
‘목을 졸랐다고? 그 어린애의 목을?’
그러니 하인들이 말리다가 매를 맞고 쫓겨난 것이로구나.
‘아무리 미쳤다고 해도 그렇지.’
깊은 한숨이 절로 배 속에서부터 올라왔지만, 그래도 에사디엔의 어머니였다.
억지로 표정을 가다듬은 나는 그의 팔을 떨쳐냈다.
“미뉴엘?”
“쉿. 가만히 있어요.”
간단히 에사디엔의 입을 막은 후, 그의 다리 위로 자리를 옮겨 앉은 나는 뻣뻣하게 굳은 어깨를 당겨 품에 꼭 안아주었다.
“마야 황녀님… 아니, 어머님께서는 당신을 미워하고 싶어서 그러신 게 아닐 거예요.”
“…….”
“상처가 나면 곪기 전에 치료해야 하는데. 마음에 난 상처는 그게 어려우니까 덧나서 그러신 거죠. 물론 의도하지 않았다고 잘못이 아닌 건 아니지만…….”
정신과가 없으니 정말 문제다.
나는 속으로만 중얼거리며 에사디엔의 머리 위에 살며시 뺨을 기댔다.
“고생했어요, 정말.”
허리에 둘린 에사디엔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는 압니다. 어머니가 틀리셨다는 걸.”
“그래요?”
“예. 이 감정은 물거품처럼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죽더라도, 제 몸이 썩어 사라져도 남을 감정이라는 걸…….”
품 안에서 뜨거운 숨을 토해 내며 말하던 에사디엔이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붉어진 눈으로 그가 활짝 웃고 있었다.
“당신을 바라며 배웠습니다, 미뉴엘.”
지켜보는 내 마음까지도 벅차게 하는 웃음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목에 뭔가 걸린 사람처럼 별다른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에사디엔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그를 더 꼭 안아줄 따름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황태자하고는…….’
언성을 높였던 게 영 걸렸지만, 지금 그 말을 꺼낼 분위기는 아니었다.
우리 에사디엔이 이렇게 웃는데 뭣이 중헌디?
‘내일이라도 어련히 말해 주겠지.’
* * *
그렇게 생각하며 넘겼지만, 그날 이후 에사디엔은 점점 말수가 줄어가기만 했다.
‘아주 가리비가 따로 없네.’
급기야 이렇게 생각할 정도로 꾹 다물려버린 에사디엔의 예쁜 입술을 보며 나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역시 기다림은 내 적성에 맞지 않았다. 내 인내심이란 고작해야 삼십 분 컷이었다.
‘그런데도 며칠 기다렸으면 충분하지, 뭐.’
달그락, 소리를 내며 찻잔과 받침을 동시에 내려놓자 에사디엔은 꿈에서 깬 사람처럼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자세가 불편했습니까?”
“자세는 좋은데요.”
우리는 신전에서 돌아오던 길에서 그랬던 것처럼 꼭 붙어 앉은 상태였다. 나는 내 말을 증명하듯 자유로워진 손을 에사디엔의 목에 둘렀다.
다만 말투만은 쿡쿡 찌르듯 뾰족함 그 자체였다.
“당신이 아무 말 없는 게 불편해요.”
“제가… 그랬군요.”
“네, 그랬어요. 비밀 없이 지내기로 한 거 아니었나요? 우리.”
“미뉴엘, 약속을 어기려 한 건 아니었습니다.”
내 볼을 쓰다듬는 손길은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마주한 시선이 떨리는 것만큼은 에사디엔도 숨기지 못했다.
‘불안해하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그러나 나는 다독이는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알겠으니 얼른 말해 보라는 신호에 에사디엔의 말이 머뭇머뭇 흘러나왔다.
“형님… 아니, 오스틴의 세력이 황성에서 버티는 것을 더 좌시할 수는 없습니다.”
진노한 황제가 오스틴을 황적에서 아예 제외하고 반역자로 공표했으나 그는 꽤 오래 버티고 있었다.
성문마다 배치된 군사들이 개미 한 마리 지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는데도.
물자가 없으면 사람은 살 수 없는데 대체 어떻게 버티는 것인지.
‘신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게이트라도 연 걸까?’
처음에는 그런 생각도 했지만, 그런 걸 아무 때나 마음대로 만들 수 있다면 로콰이트는 진즉에 치트룸 병사들의 침입을 받았을 거다.
아무튼 오스틴의 세력이 황성 안에서 말라 죽기를 기다리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황성을 빠르게 수복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점점 황제의 권위에 금이 가게 될 터였다.
“누님께서 직접 오스틴을 처리하겠다고 하셨습니다. 폐하와 저는 반대했지만 제국의 후계로서 당연히 나서야 한다고 버티셔서.”
그 일로 언쟁을 벌이다 목소리가 높아진 것이로구나.
황태자의 말도 이해가 가지만, 후계를 잃어서는 안 되는 황제와 그녀에게 많은 빚을 진 에사디엔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황태자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다음 황위를 누가 잇겠어? 에사디엔이?
‘그건 좀.’
지금보다 높은 자리를 원하지 않는다는 건 진심이다.
금세 떨떠름해진 내 얼굴을 보며 에사디엔이 머뭇머뭇 말했다.
“그래서… 폐하께서 누님을 말리시는 동안에 제가 황성으로 들어가야 할 듯합니다.”
“혼자서요?”
“아마도 테오와 함께하지 않을까요.”
“그럼 그동안 누구를 데려갈지 고민한 거예요?”
“예?”
응?
의문 어린 시선이 교차했다.
“폐하를 뵙고 온 다음부터 근심 걱정이 가득하던데요, 에사디엔.”
“알고… 계셨습니까?”
“그게 놀랄 일이에요?”
그렇게나 티를 냈으면서. 무슨 겨울 타는 사람처럼 말수도 줄고, 표정도 어두워지고, 자꾸만 딴 데다 정신을 팔고.
에사디엔이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진지하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까지 미안해할 필요는 없고요.”
생각을 안 하면 그게 사람인가? 나는 그저 그가 무엇을 고민하는 건지 알고 싶을 뿐이었다.
“실은, 머리로는 당연히 제가 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싫어져서.”
“싫으면 억지로는…….”
“당신 곁에 있고 싶어서, 불충하게도 계속 갈등했습니다.”
“…그으, 내가 미안해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바꿔버려서 미안하다아!
민망해져서 이리저리 눈을 굴리자 에사디엔이 소리 내 웃으며 이마를 마주 댔다. 따뜻한 숨결을 느끼며 마음을 가라앉힌 나는 조용히 물었다.
“이제는 어머님의 목소리가 안 들리나요?”
에사디엔은 내 볼을 장난치듯 쓸었다. 마치 내 마음을 다 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음… 엘이 되었을 때 이후로는 들리지 않습니다.”
“다행이다. 그러면…….”
“대신 당신이 자꾸만 생각나고 보고 싶은데. 어떻게 할까요, 주인님?”
그러곤 씩 웃는 눈매가 짓궂으면서도 어쩐지 유혹적이었다.
그러면서 슬금슬금 더 다가오는 게, 몇 초 후에 이어질 일이 충분히 예상된 나는 냅다 에사디엔의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딱쿵!
“윽.”
“어떡하긴 뭘 어떡해요? 황성에 들어가서 오스틴을 잡아 족쳐야죠.”
내 말에 눈을 깜빡이던 에사디엔이 짐짓 눈썹을 세우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제가 그립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울 틈 없이 단숨에 끝내면 되죠.”
뭐가 문제야, 대체.
나는 에사디엔을 믿었다. 그의 실력이라면 발각되지 않고 오스틴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에사디엔이 오스틴에게 짓눌렸던 기억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어머니의 그림자도 벗어났는데 오스틴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지난번에는 직접 치명타를 넣기도 했다잖아.’
나를 구해야 한다는 개비의 말에 일말의 고민도 없이 움직였다지.
나는 대답 없는 에사디엔의 볼을 쿡 찌르며 웃었다.
“안 그래요?”
“너무나 정답이라 반박할 수가 없습니다.”
“에이, 서운해하지 말고요.”
에사디엔을 살짝 밀어낸 나는 품에서 가느다란 무언가를 꺼냈다.
마음은 마술처럼 짜잔! 하고 보여주고 싶었지만, 역시나 굼뜬 몸으로는 무리였다.
‘쳇. 건강해지는 것과 민첩성은 또 다른 문제였어.’
뒤늦은 깨달음과 함께 꼼지락거리는 손을 보면서도 에사디엔은 놀란 듯 파란 눈을 크게 뜨며 물어봐 주었다.
“이게 뭡니까, 미뉴엘?”
나는 대답 대신 에사디엔의 목에 가느다란 은색 줄을 걸었다.
짧지 않은 은줄 끝에 달린 로켓이 아래로 툭 늘어졌다. 음각으로 카르이넨 가문의 문양을 깔끔하게 새긴 로켓이었다.
그것을 조심스럽게 열어본 그가 이번에는 정말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건.”
“제 머리카락이에요.”
머리카락을 마치 끈처럼 보이게 곱게 엮어서 넣어두었다.
‘이곳 연인들 사이에서는 흔한 선물이라던데. 이런 걸 보면 또 클래식하단 말이지.’
요즘 들어 심란해 보이는 에사디엔의 마음도 풀어줄 겸, 의도치 않게 고백도 해버린 겸 겸사겸사 준비했는데 덕분에 그의 결심을 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방긋 웃으며 속삭였다.
“이제 언제든 같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죠?”
그런데 이게 웬걸.
필승 멘트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에사디엔의 표정은 예상과 달리 시시각각으로 어두워졌다.
“왜, 왜 그래요? 마음에 안 들어요?”
머리 감고 나서 잘라낸 건데. 찝찝한가? 이런 거 싫어하나?
당황해서 서둘러 목걸이를 도로 가져오려 했지만, 에사디엔은 더더욱 알 수 없는 반응을 했다.
“안 됩니다! 줬다가 뺏어가시는 게 어디 있습니까?”
정말 지키려는 것처럼 로켓을 꽉 쥐는, 아니 아예 옷 속으로 집어넣어 버리는 모습에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싫은 거 아니었어?’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손을 허공에 둔 채 딱 굳어버렸다.
그제야 에사디엔이 그나마 희미한 웃음을 다시 짓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소중히 여기겠습니다.”
“어… 예…….”
엎드려 절 받는 것 같은데.
‘태피스트리를 선물했을 때는 놀라서 얼긴 했지만 좋아하는 티가 났지.’
그런데 이번에는 미묘했다.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내가 준 거라서 그래도 간직하려고 하는 건가?
‘으음.’
나는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가, 눈을 또르르 굴렸다가, 결국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저 그럼 이만 가볼게요!”
“미뉴엘?”
에사디엔이 의아한 듯이 불렀지만 나는 이미 쪼르르 밖으로 나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득달같이 쫓아온 그는 몇 초 지나지도 않아 내 어깨를 붙들었다.
“눈이 내려 길이 미끄럽습니다.”
어느새 길과 길이 아닌 곳의 경계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눈이 쌓여 있었다. 하인들이 계속 비질을 해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의 속도를 이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대답 대신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한 발짝 강하게 내디뎠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열기가 달려나가듯이 치솟으며 별관에서 본관으로 향하는 길 위에 쌓인 눈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봐라! 인간 제설차를!
“이제 괜찮아요.”
“제가 괜찮지 않습니다.”
“네?”
“일 초라도 더 같이 있고 싶으니까요.”
“…….”
꼭 이렇게 훅 들어온다니까.
에사디엔은 내 어깨를 끌어안은 채 눈이 다 녹아 깨끗해진 길을 천천히 걸었다.
나도, 에사디엔도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어둑어둑해지는 가운데 두 줄기의 입김이 조명처럼 하얗게 빛나며 고요함을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