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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113)화 (113/130)

113화

“…목걸이는.”

본관 문을 열며 에사디엔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쁘고 감사했지만 동시에 죄송스러웠습니다.”

“머리카락이 싫은 게 아니었어요?”

에사디엔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당신의 일부인데 싫을 리 있겠습니까? 그저…….”

말을 하다 마는 것만큼 한국 사람 짜증 나게 하는 것도 없다. 나는 말끝을 흐린 에사디엔을 냅다 보챘다.

“그저?”

“미뉴엘, 당신에게서 받은 것이 많아 죄송스러웠을 뿐입니다.”

“엥?”

미안하다니. 받은 것이 많다니?

나는 에사디엔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뭘 줬다고요.”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선물이라고 해봐야 태피스트리하고 이 목걸이가 다였는데도 에사디엔은 단언했다.

계단을 밟아 올라갈 때마다 그의 입에서 ‘내가 준 것들’이 하나씩 흘러나왔다.

“제게 먼저 다가와 주셨고.”

한 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셨고.”

또 한 칸.

“제 좁은 울타리에서 나올 수 있도록 이끌어주셨고…….”

보통 로판 여주인공쯤 되면 이런 말을 듣고는 볼을 붉히며 수줍어해야 할 텐데.

‘으악! 오글 터져!’

이런 생각부터 든 걸 보니 난 영 여주 재질은 아닌 모양이다.

에사디엔의 말이 싫은 건 아니었다. 그가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데 내가 도움이 되었다니 기뻤고,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기도 했다.

하지만 그걸 다 뛰어넘을 만큼 쑥스러워 죽겠다!

내 손가락 발가락이 안쪽으로 말려들려고 움찔거리는 동안에도 꾸준히 이어지던 에사디엔의 말이 드디어 마침표를 찍었다.

“무엇보다도 저를 사랑해 주셨으니까요.”

내가 먼저 멈춰 서고, 자연스럽게 에사디엔도 한 칸 위에서 멈췄다.

잠시 그를 올려다보던 나는 세 계단을 더 올라서 우리의 눈높이를 평행으로 만들었다.

“사랑하면 하는 거지, 사랑해 ‘주는’ 건 아니에요.”

사랑도, 어떤 감정도 적선하듯 내줄 수는 없다.

다시 마음이 이어진 후로도 에사디엔은 내 마음을 뭐랄까, 황송하다는 듯 떠받들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못내 속상했다.

내가 밀어낸 상처 탓이라는 생각에 더욱더.

“나 사랑하죠?”

“당연히 사랑합니다, 미뉴엘.”

“봐요. 날 사랑해 ‘준다’고는 말하지 않잖아요.”

“그건… 당신은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니까요.”

“당신은 아닌가요, 에사디엔?”

에사디엔의 눈동자가 떨리다가 가만히 내리깔렸다.

하지만 나는 그가 수그러들도록 가만히 두지 않았다. 곧바로 그의 턱을 들며 머릿속에 새기듯 말했다.

“당신도 그런 사람이에요.”

“…….”

“우리는 지금처럼 이렇게, 같은 눈높이로 사랑하는 거예요. 내가 뭐 성녀나 신의 사도라서 당신한테 사랑을 베푸는 게 아니라고요.”

“미뉴엘…….”

“당장이라도 결혼하고 싶다면서요? 성녀하고 어떻게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래요?”

그 말을 툭 던진 순간, 에사디엔의 몸이 덜컥거렸다.

내 평생의 장난을 걸고 말하는데, ‘움찔’이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덜컥거림이었다. 나도 모르게 이렇게 생각했을 정도로.

‘이 사람… 어디가 고장 났나?’

하지만 당황도 잠시, 그는 금방 짙은 웃음을 지으며 내 허리를 바투 끌어안았다.

“확실히 그렇군요.”

이번에는 나도 부끄러워하며 발 뺄 생각이 없었다. 나는 에사디엔에게 안긴 채 그의 목에 선을 그리듯 손가락으로 스윽 쓸어내렸다.

“그거 알아요, 에사디엔?”

웃는 얼굴은 그대로인데 대답 대신 그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긴장한 거 티 내기 싫은 건가……. 진짜 귀여워 죽겠다.’

적극적인 에사디엔도 좋지만, 이렇게 예전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긴장하는 모습도 귀여웠다. 게다가 긴장한 걸 감추려고 하는 건 정말!

‘우리 저택 부수려고 작정했나!’

하지만 귀여운 건 귀여운 거고.

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의 옷 안에 감춰진 은목걸이에 손가락을 걸어 확 잡아당겼다.

“목걸이는 목줄이나 다름없는 거래요.”

“목줄, 입니까?”

고대의 반지는 사랑의 징표라기보다 상대를 소유하고 구속하는 의미가 컸다고 한다. 하물며 직접 목을 감싸는 목걸이는 어땠겠나.

“반지보다 더 확실한 표식을 달아줬으니까 안심하고 잘 다녀와요.”

“…….”

“다치지 말고, 되도록 빨리.”

줄줄이 이어지는 무리한 요구를 멍하니 듣고만 있던 에사디엔이 쿡쿡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하하.”

“왜 웃어요?”

“드디어 제 주인이기를 받아들이신 겁니까?”

“아이참, 그 소리 좀!”

동등한 관계라니까 그러시네.

“주인님께서 싫어하시니 이제 그만하겠습니다, 주인님.”

“에사디엔, 지금 나 놀리는 거죠?”

“제가 감히 주인님을 어찌 놀릴 수 있겠습니까.”

거참 예쁘다, 예쁘다 했더니.

“어휴. 됐어요, 이거 놔요.”

“장난이었습니다.”

촉.

에사디엔은 웃음과 함께 내 이마에 기습적으로 입술을 꾹 눌렀다.

하지만 다시 나와 눈을 마주했을 때는 거짓말처럼 웃음기가 사라진 상태였다.

어쩐지 긴장감이 어린 표정으로 그가 입을 열었다.

“사실은, 미뉴엘.”

그리고 에사디엔이 천천히 품에 손을 집어넣었을 때였다.

“사람들 지나다니는 곳에서 뭐 하시는 겁니까, 지금?”

미뉴엘이 된 후로 어쩌면 가장 많이 들었을 목소리.

나는 반가운 나머지 홱 돌아보며 외쳤다.

“라망드!”

지난번에 대화를 거부하듯이 방문을 닫아건 후로 라망드가 먼저 다가온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 웬걸, 우리를 보고 있던 건 라망드뿐만이 아니었다.

중간 층계참에 선 그의 뒤로 옹기종기 모여 있던 하인들이 갑자기 뿔뿔이 흩어졌다.

“아닛, 여기 먼지가.”

이 시간에 총채로 먼지 터는 시늉을 하질 않나.

“아 참! 빨래를 안 걷었던가?”

지금 밖에 눈 오거든.

‘다들 대체 언제부터… 아니.’

나는 조금 민망해진 상태로 에사디엔을 살짝 째려보았다.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는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다. 품 안에 넣었던 손은 어느새 얌전히 밖으로 나온 상태였다.

뭘 꺼내려고 했던 걸까, 궁금해하기도 전에 라망드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빈 에사디엔의 손과 달리 그의 손에는 두툼한 봉투가 들려 있었다.

“팔로스 일로 지난번에 요청드렸던 걸 원장님이 보내주셨기에. 그런데…….”

아직도 바짝 붙어 선 나와 에사디엔을 보며 라망드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큰누님께서 결혼하기 전에는 자제하라고 경고하셨을 텐데요, 분명.”

“결혼할 사이에 이 정도는 괜찮거든? 손잡고 포옹도 하지 말라는 거야?”

그건 내가 못 참아, 내가!

눈에 불을 켜고 으르렁거리자 라망드가 혀를 찼다.

“적당히 해.”

그러고는 봉투로 위층을 가리키는 것이, 올라가서 이거나 보자는 뜻이었다.

완전히 예전과 똑같은 태도였다. 지난번처럼 안색이 어둡지도, 눈빛이 흉흉하지도 않았다.

내가 아는 라망드로 돌아온 데 대해 안도하는 동시에 신기함이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대체 에사디엔이 무슨 말을 했기에 얘가 이렇게 멀쩡해졌지?’

엘의 모습일 때는 엉덩이라도 팡팡 두들겨줬을 텐데, 지금은 둘 다 사회적 체면이 있으니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대견함과 동시에 아쉬움을 듬뿍 담아서 바라보자 에사디엔이 살짝 웃으며 속삭였다.

“그럼 올라가 보십시오.”

“혹시 지금 출발하려는 거예요?”

“예. 대공께만 말씀드리고 가보겠습니다. 테오는 이미 준비를 마쳤을 겁니다.”

“…아.”

후다닥 끝내고 와라, 오스틴을 조져버려라.

아무렇지 않게 그리 말했지만 막상 에사디엔이 황성에 들어간다니 목구멍이 탁 막혀버린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 내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는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뒤에 남은 사람은 의지할 존재가 되어야 했다. 마음의 짐이 아니라.

그래서 나는 목구멍을 틀어막은 걱정을 꿀꺽 삼키며 에사디엔을 와락 끌어안았다.

“내 말 기억하죠?”

“다치지 않고 단숨에 끝장내겠습니다.”

믿음직한 대답에 궁디 팡팡 대신 에사디엔의 머리를 살며시 쓸어주었다. 언제 만져도 결 좋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흩어졌다.

“같이 가지 못해서 미안해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항상 함께 계셔주시기로 했잖습니까.”

에사디엔이 내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 위에 겹쳤다. 옷 아래에서 둥근 로켓의 감촉이 선명히 느껴졌다.

그의 단단한 눈빛에서 그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눈을 보자 마음에 단단한 심지가 박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우리는 이제 끊어지지 않을 거야.’

촉.

“다녀와요.”

그래서 나는 에사디엔의 볼에 짧은 입맞춤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미련 없이 돌아설 수 있었다.

“가자, 라망드.”

에사디엔이 자리를 비운 동안에 나는 팔로스와 신시아에 관한 일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영영 몰랐다면 모를까, 알게 되었는데 가만히 방치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리고 개비도…….’

내가 폭주한 후로 요시초를 아무리 때주어도 개비의 상태가 영 시들시들했다.

녀석을 떠올리며 라망드의 손을 붙잡고 성큼성큼 계단을 오르다, 어쩐지 시선이 느껴져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이쪽을 올려다보던 에사디엔이 표정 없던 얼굴에 빙긋 웃음을 그려내는 동시에 손을 들어 흔들었다.

그게 꼭 가만히 나를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꼬리를 낭창낭창 흔들던 엘의 모습 같아서, 나는 더 견디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리며 고백했다.

‘사랑해요.’

* * *

‘사랑해요.’

작은 입술이 나긋하게 움직이던 그 순간을, 에사디엔은 머릿속에서 천천히 떠올렸다.

그 모습이 느리게 보이는 만큼 눈앞으로 쇄도하는 칼끝도 느리게 다가오고 있었다.

콰앙!

울려 퍼진 소리는 칼과 칼이 맞부딪쳐 나는 것으로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했다.

끼긱.

비틀린 검날 사이로 비웃음을 머금은 오스틴이 이죽거렸다.

“결국 이런 거지. 미뉴엘 그 여자도 널 이용하는 거야. 아니라면 직접 뛰어들어 불의 힘을 가져가지 않았겠어?”

“…….”

에사디엔은 말없이 오스틴을 밀어내는 데만 집중했다.

발끝이 뒤로 밀리는 것조차 감수하며 맞붙은 검을 떨쳐내려 했으나 오스틴은 제 성미만큼이나 지긋지긋하게 따라붙었다.

“불쌍한 놈. 네 주위의 여자들이란 다 그래. 네 어미는 널 증오했다지? 네가 의지한 황태자는 너를 사지에 몰아넣고, 네가 매달리는 여자는 이용할 뿐이군.”

그렇지 않았다.

어머니는, 누님은, 무엇보다 미뉴엘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고생했어요, 정말.’

어머니의 일을 자신의 입으로 꺼낸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황제가 그들 모자의 일을 조사한 것도 어렸던 에사디엔이 아니라 하인들의 입을 통해서였으니까.

그저 시달리던 일을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는 것이 얼마나 긴장되는 일인지 미뉴엘은 알고 있었을까.

‘그 끝에 받은 위로란 얼마나 커다란 구원인지.’

오스틴 따위는 영영 알지 못할 것이다.

‘내가 반역자의 힘을 뺄 말로 너를 쓰려고 애지중지 키운 줄 아느냐!’

진심으로 분노하던 누님을 보았다면, 저렇게 설득력 없는 이간질을 할 생각은 할 수 없을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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