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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114)화 (114/130)

114화

“그렇게 불쌍하다면, 왜 나를 처음부터 미워한 거지?”

에사디엔은 어디까지나 시간을 끌 요량으로 냉정하게 물었다.

오스틴을 습격하기 위해 황성의 지붕과 벽을 뛰어넘고 부수며 최단 거리를 주파했다.

그러나 역시 그는 좀처럼 빨리 처리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고 함께 온 테오도르는 군나르 왕자를 도맡으며 찢어진 상태였다.

‘이대로라면 금방 호위들에게 간파당하겠군.’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했다.

그것을 궁리하는 사이, 오스틴이 툭 던진 대답은 별 의미 없이 질문을 던진 에사디엔조차 순간적으로 멈칫하게 만들었다.

“재미있잖아.”

재미? 재미라고 한 건가, 지금?

“불쌍한 놈을 짓밟는 게 재미있으니까.”

제대로 들은 것이 맞았다. 에사디엔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반항할 생각조차 못 하고 바르작대는 놈의 팔다리를 떼어내는 게. 마음껏 화풀이할 대상이 있다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지 다들 평생 모르고 뒈져.”

오스틴은 에사디엔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을 발밑에 두고 깔보는 것이었다.

괴롭힘당하고 수모를 겪던 10년간의 세월이 일순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하긴, 그놈들도 다 불쌍한 새끼들이지.”

빠득.

에사디엔의 입에서 이 갈리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흥분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곧 어떤 소리를 듣고 숨을 길게 몰아쉬는 것으로 참아냈다.

저 먼, 아주 먼 바깥에서 들리는 희미하게 병장기 울리는 소리.

이렇게 때를 맞춰 바깥을 공략할 사람이라면.

‘누님, 아니… 형님이신가.’

에사디엔은 빠르게 냉정을 되찾았다. 여유롭게 빈정거리는 것으로 보아 오스틴은 바깥의 동태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을 대상으로 그 잔인한 놀음을 하겠다는 건가?”

“잔인? 약해 빠진 놈들의 관점이군.”

일순 오스틴의 눈이 번뜩였다. 지금까지 힘을 겨뤘던 것은 장난이라는 듯이 검을 확 밀어붙이며 가까워진 오스틴이 씩 웃었다.

“바깥의 지원이나 바라는 너처럼.”

그가 알고 있었다.

싸늘한 감각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것과 동시에 오스틴의 손이 에사디엔의 옆구리에 틀어박혔다.

푸욱!

살이 뚫리는 끔찍한 소리가 났지만 에사디엔은 그보다도 고통과 함께 느껴지는 기이한 감각에 얼굴을 찌푸렸다.

‘검이… 아니다.’

이 거리라면 단도를 떠올리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오스틴의 허리춤에 다른 무기가 없는 것은 이미 확인한 바였다.

그때였다.

“황자님!”

테오도르가 우렁차게 에사디엔을 부르며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은밀함은 어디 가서 닭꼬치와 바꿔 먹은 듯한 모양새를 보아하니 오는 길에 걸리는 자들마저 다 처리하고 온 모양이었다.

“하.”

한숨이 났지만, 그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이를 악물며 뛰어오는 친우를 보니 새로운 힘이 솟았다.

에사디엔은 그를 털어내려 하는 오스틴의 팔을 꽉 붙들었다.

“이 버러지가…….”

“반역자 주제에 누구더러 헛소리를!”

오스틴이 멈칫한 사이에 테오도르가 달려들었다.

“쯧!”

오스틴이 그것을 막는 틈을 놓치지 않고 에사디엔의 검이 마치 복수하는 것처럼 그의 옆구리를 대각선으로 가르고 들어갔다.

투둑.

참혹한 소리와 함께 심장마저 꿰뚫은 감각이 검 자루를 쥔 손에 선명하게 다다랐다.

동시에.

까득!

무언가 단단한 것이 갈라지는 느낌도.

‘뼈가 있을 자리가 아니건만.’

에사디엔의 눈썹이 꿈틀거리면서 오스틴의 입에서는 덩어리진 피가 뭉클뭉클 쏟아졌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에사디엔은 손이 잘게 떨릴 정도로 강하게 쥐었던 검을 천천히 빼냈다.

일부러 비틀면서.

“큭. 너 이 자…식…….”

쿵!

뭐라 말하려던 오스틴은 고통이 불러온 쇼크로 결국 쓰러졌다.

목적은 달성했지만 에사디엔의 상태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조금 전 상처 입었던 복부에서 피와 모래가 섞여 마치 진흙처럼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오스틴은 아직 죽지 않았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포박해야 하는데 눈앞은 자꾸만 흐려졌다.

‘다치지 않기로 약속했건만.’

무릎을 꿇는 에사디엔의 머릿속에 그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미뉴엘…….’

몸으로라도 막겠다는 것처럼 기어이 오스틴 위로 쓰러진 에사디엔의 의식이 점점 멀어졌다.

“할아버님! 황자님께서……!”

마지막으로 들린 것은 누군가를 다급하게 부르는 테오도르의 목소리였다.

* * *

나는 클리데인이 가져온 신시아의 동생에 대한 정보, 그리고 고아원 원장이 보내준 자료에 있는 팔로스와 만난 날의 인상착의 등을 상세하게 비교했다.

“아무래도 맞는 것 같은데.”

처음부터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다.

보통 소설 안에서는 머리카락이나 눈동자 색만으로도 혈연관계가 드러나잖는가.

예를 들면 우리 어머니와 언니들, 혹은 우리 아버지와 나처럼. 황가의 독특한 머리카락 색도 그렇고.

“그런데 머리하고 눈 색깔, 얼굴 생김새까지 판박이처럼 똑같다니 말 다 했지.”

아무튼 내 예상이나 실종 당시의 인상착의는 맞아떨어졌다지만, 바로 상봉하는 자리를 만들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당사자의 의지였으니까.

정보도 확인했겠다, 더 미룰 필요가 없었다. 나는 득달같이 마법 학교로 달려가 팔로스를 만났다.

“…그래서 그쪽에서는 널 만나보고 싶어 하는데, 팔로스 네 생각은 어때?”

그렇게 묻자 팔로스는 조금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어른들이 만나라고 하시면 만나야죠.”

“뭐어? 팔로스, 나는 그렇게 강요하고 싶지 않아. 절대로.”

나는 팔로스의 후원자이지만, 이 애가 그동안 어떤 생각을 하며 자랐는지는 알지 못했다.

만나느냐, 만나지 않느냐.

얼핏 양자택일의 단순한 선택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혹시라도 틀릴 경우 따라올 상처, 혹은 상대가 기대와 달라서 느낄 수도 있는 실망 등을 생각하면 누구도 그 선택을 단순하다고 여길 수는 없을 터다.

“그러니까 이런 문제는 오롯이 너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해. 네 인생이고, 또 나는 네가 충분히 혼자서 판단할 수 있을 만큼 똑똑한 아이라고 생각하거든.”

“…아이 아닌데.”

“응?”

“누나, 저 목소리 좀 달라지지 않았어요?”

그러고 보니.

팔로스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달까, 다소 막힌 듯한 감이 있었다.

‘겨울이라 감기 기운이라도 있는 건가, 했는데… 변성기였구나. 맙소사.’

하마터면 아이의 기분을 상하게 할 뻔했다.

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방긋방긋 웃으며 축하해 주었다.

“우리 팔로스가 어른이 되고 있구나!”

“그러니까 어린애 아니죠?”

녀석은 당장 눈을 반짝이며 물었지만, 장난기가 돋은 나는 키득거리며 아이의 이마를 톡 건드렸다.

“성인까지 6년, 아니 이제 5년하고 조금 더 남았지.”

“누나, 너무하시네요.”

잠시 투덜거리던 팔로스는 이내 낯을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말했다.

“만날게요.”

“벌써 결정한 거야?”

“네.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해요.”

그리고, 하며 팔로스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버린 게 아니라 잃어버린 거라니까…….”

나는 잘 생각했다는 둥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양심 없이 팔로스한테 빌붙으려는 사람들이면 아예 접근하지 못하게 끊어버리면 되지.’

그렇게 생각하며 팔로스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그래, 알았어.”

“같이 만나주실 거죠?”

“대마법사님이나 원장님이 아니라 내가?”

“네.”

팔로스는 사뭇 단호하게 끄덕였다.

애가 그렇다는데 뺄 수야 있나.

나는 흔쾌히 팔로스와 손가락을 걸었다.

* * *

그리하여 바로 이틀 뒤.

약속한 날이 밝았다.

클리데인은 너무 빠르지 않으냐며 걱정 겸 놀라움을 담아 물었지만 나는 딱히 미룰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오히려 지금이 아니면 안 되지.’

어제, 황제가 황성으로 돌아갔다.

이미 어머니는 황제와 함께하고 계시고, 엘가 언니는 수도 방위군과 협력해 도망친 잔당들을 체포하고 치안을 회복하는 데 바빴다.

‘며칠 안으로 나도 바빠질 테지.’

불의 힘을 품은 일로 황제와 대면해야 할지도 모르고, 무엇보다도 개비를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야 하니까.

에사디엔에게서는 아직 연락이 없었지만 나는 점잖게 기다리기로 했다.

‘다치지 않기로 약속했으니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도 있잖아?

“미뉴엘, 손톱 깨지겠다.”

“응?”

라망드의 가벼운 질책에 비로소 현실로 돌아온 내게 팔로스가 덧붙였다.

“누나, 계속 테이블을 두들기고 있었어요.”

“헉.”

나는 서둘러 손을 얌전히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점잖게 기다린다고 기다렸는데… 마음 한쪽에선 조금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그때 라망드와 팔로스, 그리고 내가 함께 앉아 있던 응접실 문을 누군가가 두들겼다.

“아가씨, 데인입니다.”

“벌써들 오셨나? 들어와.”

허락이 떨어지고, 문이 열리자 지금까지는 아무렇지 않던 팔로스도 조금 긴장한 기색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제일 먼저 안으로 들어온 건 클리데인도 팔로스의 가족도 아닌 은빛 털의 개였다.

“…멈무?”

반가움보다도 의아함이 먼저 들어 멈무를 불렀지만, 녀석은 대답은커녕 이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쫄래쫄래 팔로스에게 다가가 킁킁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육포가 없어서 그런가?’

갸웃거리는 내게 팔로스가 당황해서는 물었다. 손은 차마 멈무에게 대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든 상태였다.

“어어… 누나, 이 강아지 어떡해요?”

“점잖은 애니까 괜찮아. 천천히 손을 내밀어봐.”

멈무는 잠시 팔로스의 손등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더니 곧 인사라도 하는 것처럼 격렬하게 핥기 시작했다.

“으아! 간지러워!”

깜짝 놀란 것도 잠시 팔로스는 곧 멈무의 목덜미를 긁어주었다.

‘마음에 들었나 보네.’

웃음으로 가득한 얼굴에서는 이미 긴장이 씻은 듯 사라진 상태였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녀석이 갑자기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에…….”

뒤이어 들어온 클리데인이 사과하며 멈무를 들어 올렸다.

“저키(Jerky),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러면 안 되지.”

머쓱함 섞인 꾸중이었지만 얼굴에는 귀여워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눈치가 사람 뺨치는 멈무는, 다 알아들었지만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클리데인의 얼굴을 핥았다.

은근히 아쉬워 보이는 팔로스를 지켜보던 나는 생소한 이름에 고개를 기울였다.

“저키?”

“아, 그것이… 죄송합니다, 아가씨. 사실 제가 녀석에게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게 뭐 미안할 일이라고.

멈무와, 아니 저키와 새들이 처음 만난 클리데인에게 대롱대롱 매달려 나갈 때부터 나는 녀석들이 그를 주인으로 택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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