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괜찮아. 데인 경을 완전히 반려인이라고 생각하나 보네.”
“반려인……. 아가씨를 두고 제가 그래도 될까요?”
“그럼. 지금까지도 계속 경이 돌봤잖아? 그런데 저키라니.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 뜻이야?”
육포?
클리데인이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이 육포를 좀 좋아해야죠.”
뒤에서 유심히 듣던 팔로스의 입이 ‘ㅇ’ 모양을 그리다가 중얼거렸다.
“육포를 좋아하는구나.”
저키와 친해질 생각 만만인 녀석의 모습에 나는 풋 웃으며 클리데인에게 이어 물었다.
“파랑새 친구들한테도 이름 지어줬어?”
“아… 예! 이것도 그러니까, 아가씨…….”
“사과는 됐다니까.”
그 순간, 팔로스가 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반짝이며 끼어들었다.
“새… 새도 키우시는 거예요?”
나는 웃는 얼굴 그대로 클리데인에게 눈짓했다.
‘친해질 기회야.’
다행히 클리데인도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라 곧바로 내 뜻을 알아채고는 저키를 팔로스에게 안겨주며 친근감 넘치게 말했다.
“아가씨 덕분에 세 마리를 키우고 있어. 이따가 보러 갈래? 너만 원한다면.”
“어… 좋아요.”
좋았어.
부드럽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라망드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을 때쯤, 집사가 빈자리를 채울 나머지 주인공들의 도착을 알렸다.
“슐츠 상회의 손님들이 왔습니다.”
팔로스의 손이 멈칫했지만 그를 휙 돌아본 저키의 눈길에 곧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계속 만져라, 인간!’
…이라는 뜻을 명확하게 담은 눈빛을 정통으로 봐버린 나도 웃음을 꾹 눌러 참으며 손님을 맞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녀님. 슐츠 상회를 이끄는 딜런 슐츠라고 합니다.”
“언니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네. 앉게나.”
웃으며 손짓하자 그제야 자리에 앉는 모습들이, 클리데인이 전에 그토록 흥분하며 팔로스를 붙들었던 이유를 알 만하다 싶었다.
‘진짜로… 똑같이 생겼네.’
신시아는 성인이라, 성인과 아이의 차이를 제외하면 자칫 쌍둥이로 오해할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비슷한 얼굴이었다.
‘닮기는 어머니를 많이 닮았구나.’
얼굴은 어머니를 닮고, 머리와 눈동자 색은 아버지와 같았다. 어쩌면 저렇게 유전자를 고루(?) 물려받을 수 있는 것인지.
잠시 찬찬히 그들을 관찰하던 나는 라망드의 손등을 톡톡 두들겼다. 그는 내 손가락을 살짝 쥐었다가 풀어준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랑과 아름다움의 신, 플렌드나 님의 사제, 라망드 플렌드나입니다.”
고개를 살짝 숙였던 라망드가 옆에 준비해 두었던 은침을 들고 싱긋 웃었다.
“그러면 사전에 여러분의 동의를 모두 구해 두었으니 바로 채혈을 시작하겠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가족이라지만, 친혈육이 없는 걸 알면서도 미안함을 무릅쓰고 라망드에게 동석해 달라고 부탁한 건 바로 이 절차 때문이었다.
친자 확인.
신성력이란 참으로 편리하고 강력해서, 축성된 채혈 도구만 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사제가 혈연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유전자 검사가 필요 없다니까.’
물론 모든 신전에서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심판과 정의의 신전이나 황금과 신용의 신전 등에서 짭짤한 수익을 올린다고 한다.
내가 긴장감이라고는 없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라망드는 팔로스와 슐츠 씨의 손가락을 찔렀던 은침들을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유리구슬 안에 집어넣었다.
달칵.
완전히 결합된 소리가 나고 몇 초 지나지 않아 구슬에서 밝은 빛이 뿜어지더니 은침이 녹아 신전의 문장을 그렸다.
“친족이 맞는군요.”
검사한 두 사람이 혈연관계가 아닐 경우에는 구슬이 새빨갛게 변한다.
대부분 아는 사실이었지만, 라망드의 선언이 떨어질 때까지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던 슐츠 씨와 신시아 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슐츠 부인은 눈이 새빨개진 채 손수건이 거의 찢어질 정도로 잡아당기는 중이었다.
가족들이 그렇게 격렬한 감정을 표출하는 동안, 팔로스는 자리에서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로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때, 저키가 크게 한 번 짖었다.
“왕!”
그제야 크게 숨을 들이켠 팔로스가 매달리듯 나를 바라보았다.
‘녀석.’
신시아 양에게는 미안하지만 나와 팔로스는 일반적인 후원자와 피후견인 관계를 조금 벗어나버렸다.
똑똑하고, 열심이고, 누나라고 부르며 믿어주는 아이에게 정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 자리에 더 있어서는 안 되었다.
“팔로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팔로스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가족들하고 이야기 나눌 수 있겠어?”
“…….”
“저키가 같이 있어줄 거야.”
클리데인이야 호감이 조금 생겼다고는 해도 신시아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거니까 의지하기는 힘들 터였다.
묵묵히 나를 올려다보던 팔로스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 괜찮아요.”
“저기 문 보이지? 다른 응접실하고 연결된 문이야. 저기 있을 테니까 언제라도 네가 원할 때 끝내고 오도록 해.”
“네.”
“부담 느끼지 말고. 알겠니?”
“네.”
딱딱한 대답에 나는 조금 갸웃했다가 여전히 믿음을 담고 나를 보는 팔로스의 눈동자를 깨닫고 조금 감동했다.
‘일부러 거리를 보이려는 거구나.’
누나라고 부르지도 않고.
역시 똑똑한 아이였다. 팔로스는 막 찾은 혈육이 혹시라도 자신을 이용해 내게, 우리 가문에 피해라도 입힐까 경계하는 거였다.
“그냥 순수하게 기뻐해도 돼.”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게 작게 속삭이자 팔로스의 눈이 떨렸다.
‘이미 내가 친근하게 대하는 걸 봤을 텐데 뭘.’
웃어 보인 나는 슐츠 상회 사람들에게도 인사를 남겼다.
“그럼, 편안하게 대화 나누게나.”
“대공녀님…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한 것이 없네. 신시아 양의 남자 친구 덕으로 여기면 되겠군.”
예상치 못하게 언급된 클리데인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청혼 화이팅! 물론 연애 먼저!’
응원을 담아 클리데인의 어깨를 두들긴 나는 라망드와 함께 방금 팔로스에게 알려주었던 옆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오늘은 부모님이나 언니들 모두 찾아올 손님이 없다고 했으니 당연히 비어 있을 터였다.
…그럴 터인데.
“어라?”
안쪽에서는 소파에 자연스럽게 몸을 묻은 브라시다스가 차를 홀짝홀짝 넘기고 있었다.
등 뒤로 문이 탁 닫히자마자 나는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언제 오신 거예요?”
“음. 우리 팔로스가 외출증을 끊자마자?”
하여튼 팔불출이셔.
“걱정되셔서 견딜 수가 없으셨군요?”
“목적도, 목적지도 알고는 있었네만… 어린아이 혼자서 보낸다고 생각하니까.”
“이해합니다.”
맞은편에 털썩 앉자 브라시다스가 뒤늦게 덧붙였다.
“우리 미뉴엘 제자님의 상태도 궁금했다네.”
“제자 아니라니까 대마법사님도 참.”
하지만 그가 찾아와서 다행이기는 했다.
상태가 영 좋지 않은 개비 때문이었는데, 요시초의 양을 늘려 봐도 영 차도가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는 오스틴의 힘을 주입해도 별 효과가 없을 것 같아.’
‘그대를 거친 불의 힘은 한층 정순해져. 다루기 쉽고… 강하고.’
내 힘이 강해지자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오스틴이 그렇게 말했던 건, 그가 불과 함께 다루는 모래의 힘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불순물이 섞인 상태.
그렇다고 해도 개비의 입장에서는 힘 한 조각이 아쉬우니 그의 힘을 안 먹일 수는 없다.
‘하지만 완전히 멀쩡해지려면 왠지 다른 방법도 필요할 것 같아.’
그래서 나는 브라시다스에게 제안했다.
“조만간 히로비외 화산에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지금 마법 학교도 겨울 휴가 기간이지요?”
“음. 휴가가 끝나기 전에 갈 수 있겠나?”
“최대한 맞춰드릴게요.”
휴가도 길면서 걱정하시기는.
내 눈빛을 알아챈 브라시다스가 변명하듯 허허 웃었다.
“팔로스만 두고 오래 자리를 비우기가 조금 걱정스러워서 말일세.”
“야무진 아이인데요. 정 그러시면 그동안은 여기서 지내게…….”
말을 잇던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대마법사님 앞에서도 그 싸가지 없는 것들이 팔로스를 오만불손하게 대하던가요?”
“자네도 알고 있었나?”
“입학식 때부터 그랬잖아요!”
“아, 그랬지 참.”
연구하고 팔로스 외에는 별 관심 없는 브라시다스다웠다.
그날이야 내가 끼어들어 경고해 버렸고, 그 뒤로 이어진 괴롭힘이야 팔로스가 스승에게 쪼르르 달려가 이를 성격도 아니었으니까.
“우연히 목격했다네. 그 아이들도 나를 보고 금방 흩어져버려서 억지로 데려다 혼을 낼 수도 없고 말이야.”
아무래도 교직원이다 보니 행동에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브라시다스가 팔로스 뺨에 먼지만 붙어도 학교를 뒤집을 만큼 앞뒤 안 가리는 성격도 아니고.
“하아.”
한숨을 쉬며 등을 뒤로 기댄 나는 가만히 듣고 있던 라망드에게 짧게 전말을 설명했다.
“주제 파악도 못 하고 까부는 놈들이 있어서 두 번이나 경고를 했는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야.”
게다가 그 부모들은 있는 재산도 못 지키는 인간들이 분명했다. 자기 채권을 누가 가지고 있는지 확인도 안 한단 말이야?
‘그냥 빚에 신경을 안 쓰는 건가?’
그럼 갚을 생각도 없다는 뜻인데…….
내가 가져오지 않았다면 원래 채권자들은 돈을 돌려받지 못했겠다는 생각이 들자 헛웃음이 절로 흘렀다.
“허, 참. 아무리 인생 한번 욜로라지만 남의 눈에 피눈물 흘리게 하다가는 골로 간다는 걸 알아야지.”
혀를 차는 내 옆구리를 라망드가 쿡 찔렀다.
“또 정의의 용사처럼 출동하려고?”
“용사는 무슨. 그냥 착한 학생 도와주는 거지.”
내가 용사가 될 깜냥이나 되나.
“그러면 자네 생각에는 어찌하는 게 좋겠나?”
“으음.”
잠시 생각하던 내가 겨우 뭔가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똑똑똑!!
대답하기 전, 아니 다급한 노크 소리가 다 지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며 낯빛이 질린 집사가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아가씨. 황성에서 급한 전갈이 왔습니다.”
“황성에서?”
황성에서 나한테 연락이 올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의아했지만, 우리 집사가 이렇게 예의까지 무시해 가며 다급하게 굴었던 건 처음이라 일단 전갈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문장은…….’
카르이넨의 문장이 새겨진 봉인.
그렇다면 어머니나 엘가 언니가 보냈다는 뜻인데, 어찌나 급했던지 문장이 고르게 찍히지 못한 봉인을 떼며 내 얼굴도 흐려졌다.
하지만 그건 내용을 보기 전의 이야기다.
딱 두 줄짜리 단출한 서신을 보며 나는 숨을 멈췄다.
[반역자 오스틴 도주.]
엘가 언니의 글씨였다.
언제나 인쇄한 것처럼 반듯하던 글씨가 갈겨쓴 것처럼 기울어 있었다.
‘도주를 했다고?’
대체 어떻게?
의문과 함께 다음 문장을 읽은 순간.
“…….”
서신이 발밑으로 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