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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116)화 (116/130)

116화

라페슈는 눈을 잔뜩 찌푸린 채 어딘지 모를 허공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상해.’

원래 마법이란 것을 이렇게 배우는 건가?

치트룸에 온 뒤로 라페슈의 일과는 매우 단순해졌다.

기상, 식사, 명상, 수면.

정해진 시각이 되면 식사가 들이밀어졌고 나머지 시간은 거의 ‘명상’으로 채워졌다.

‘마법의 시작은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는 것이다.’

치트룸에 온 이튿날 만난 라페슈의 스승이 될 사람이라던 노인은 그리 말한 뒤 그녀를 처박아두고 코빼기 한 번 비추지 않았다.

라페슈는 등 뒤를 돌아보며 그렇지 않아도 찡그린 얼굴을 더 찌푸렸다.

한쪽 벽이 온통 푸릇푸릇했다. 누군가는 좋아할 테지만 그녀는 신경에 거슬리기만 했다.

‘벌레 나올 것 같아. 짜증 나.’

이 공간의 장점은 단 하나, 치트룸에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서늘해서 땀을 흘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뿐이었다.

“대체 얼마나 더 명상을 해야 하는 거냐고!”

옳다구나 하고 잠을 자는 것도 질린 지 오래다. 이대로 계속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최소한 다른 사람하고 대화라도 하고 싶어.”

코빼기를 안 비추는 사람이 스승뿐만은 아니었다. 오스틴도 마찬가지였다.

외롭고 지루하다고 눈에 보이는 사람을 아무나 붙들고 물을 수도 없었다.

왜?

애초에 눈에 띄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아침부터 밤까지 라페슈를 따라다니는 시종 겸 호위 한 명 외에는 아무도, 정말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여기는 사람이 안 사나? 나 혼자 있는 건가?’

오죽하면 라페슈가 그런 생각을 할 정도였다.

어느 날 침실에서 명상실로 향하다가 멀리서 흐릿한 웃음소리들이 들리지 않았다면 지금껏 그렇게만 생각하고 지냈을 것이다.

덜그럭.

그때였다. 양반은 못 되는 모양인지, 명상실의 문 아래쪽이 열리며 시종의 손이 쑥 들어와 접시를 넣어두고 사라졌다.

접시를 본 라페슈는 또 짜증 섞인 한숨을 쉬었다.

“또 과일. 또……!”

이곳이 싫어진 이유 중 하나다.

삼시세끼, 과일이 밥이고 풀이 반찬처럼 곁들여진 식단.

과일을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이래서야 물릴 수밖에 없었다.

[고기, 고기!]

짧은 치트룸어로 요구도 해봤지만 시종에게서 돌아온 긴 대답 중에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정화’나 ‘몸 깨끗이’라든가, ‘고기 안 돼.’뿐이었다.

급기야 식사를 고스란히 돌려보낸 적도 있건만 식단이 바뀌기는커녕 그녀를 대하는 시종의 눈빛이 살벌해지기만 했다.

“그냥 미뉴엘의 제안을 받아들일 걸 그랬나…….”

카르이넨 대공저에서, 그리고 황성에서 맛봤던 맛있는 음식과 디저트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오죽하면 오스틴을 따라온 것이 조금 후회될 정도로.

우걱우걱.

투덜거리면서도 라페슈는 과일을 억지로 씹어 삼켰다. 정말 먹기 싫지만, 지난번에 한 끼를 굶었더니 너무 배가 고팠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하… 과일만 먹으니까 몸에 힘이 없어.”

지켜보는 사람도 없겠다, 명상이고 뭐고 풀이 자라지 않는 벽에 등을 기대며 투덜거렸다.

그런 라페슈의 몸에서 아지랑이 같은 것이 빠져나가 풀들 사이로 스며들었지만 살짝 눈을 내리깐 그녀는 알아채지 못했다.

꾸르르.

배에서 요란한 소리가 흘렀지만 역시나 신경 쓸 사람이 없었던 라페슈는 그러거나 말거나 멍하니 허공만 쳐다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꾸륵.

꾸르르르르!

“어어?”

소리만 나는 듯하던 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곧이어 살살 아파오는 감각에 라페슈는 이를 악물며 일어섰다.

“아이 씨… 이거 설사 각인데……?”

내보내 주려나?

어느새 갇힌 데 익숙해진 탓인지 그 생각이 먼저 스쳤지만 전보다 더 요란하게 꾸르륵거리는 소리에 곧 지워졌다.

쾅쾅!

[문! 열어!]

쾅쾅쾅!

[아파! 배가! 문 열어!]

손이 아프도록 문을 두들겼지만 밖은 잠잠하기만 했다.

“계속 앞에서 지키고 있는 줄 알았는데…….”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배였다.

“아, 진짜 죽겠다고!”

점점 더 심하게 아파지는 배를 붙들고 발을 동동 구르던 라페슈는 홧김에 문을 확 잡아당겼다.

그런데 이게 웬걸.

“여, 열렸다?”

기뻐할 틈도 없었다. 라페슈는 이를 악물고 바깥으로 뛰어 나갔, 아니 어기적어기적 식은땀을 흘리며 걸어 나갔다.

“화장실. 화장실!”

위치는 몰랐지만 화장실을 찾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간 전혀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이 한두 명씩 홀연히 나타나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듯 향했으니까. 다들 라페슈처럼 이를 악물고 진땀을 흘리는 모습이었다.

“이익!”

라페슈는 어기적거리는 걸음에 억지로 박차를 가했다. 저들에게 뒤처져서 화장실을 쓰지 못하면 타국에서 정말 대망신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후아. 살겠다.”

겨우겨우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었던 라페슈가 안도 섞인 웃음과 함께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였다.

바깥에서 인기척과 함께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빨간 머리 봤어?]

아무리 외국어라도 자기 얘기를 하는 건 기가 막히게 알아듣게 되는 법이다. 라페슈가 멈칫하며 귀를 기울이려던 찰나였다.

기잉!

‘빨간 머리’라는 단어를 알아듣자마자 이명이 울렸다. 뭔가 머릿속에 쑤셔 넣는 것 같은 느낌에 라페슈는 손잡이를 쥔 채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으윽… 뭐야. 왜 이러는 건데…….’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인 라페슈의 관자놀이를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봤어. 진짜 새빨갛더라.]

이상한 건, 통증이 가시자 갑자기 치트룸어가 자연스럽게 들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언어의 장벽이 사라졌으니 속이 시원했다.

단순한 편인 라페슈는 당장 알 수 없는 이유에 관심을 끈 채 아까보다도 더더욱 숨을 죽이며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노란 눈이야 여기서는 흔한 색이니까.]

[프레세리아에서는 드물다던데. 혹시 혼혈 아니야?]

[혈통 때문에 황자님이 사도님한테 맡긴 건가?]

[어머, 그래서 그렇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지내는 거야?]

[테마리한테 들었는데, 고기를 내놓으라면서 식사를 거부한 적도 있대.]

그 뒤로도 험담 섞인 수다가 이어졌다.

“…….”

원래는 누가 자기 험담을 하고 있으면 문을 박차고 달려나가 머리카락을 죄다 뽑았을 라페슈지만, 이미 로콰이트 황실과 사교계에서 참는 법을 질리도록 배운 뒤였다.

게다가 지금 그녀의 신경은 낯모르는 사람들의 수다가 아니라 다른 곳에 온통 쏠려 있었다.

“나를… ‘사도’한테 맡겼다고?”

마법사가 아니라?

* * *

그 시각.

치트룸 왕궁에서는 모래 신의 사도가 왕과 독대하고 있었다.

“결국 성을 뺏겼다는군. 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하기에!”

원래는 재상이 와도 눕다시피 한 방만한 자세를 유지하던 왕이었건만 오늘만큼은 아래로 내려와 이리저리 서성이며 씩씩대는 중이었다.

사정을 들여다보면 그럴 만도 했다.

비교적 힘을 들이지 않고 프레세리아의 영토를 집어삼켜 볼까 했는데, 그 계획이 무너지고 비싸게 팔 수 있는 막내아들마저 구속된 상태다.

군나르는 황태자를 해하려 했으니 빼낼 길마저 없다고 봐도 좋았다.

“낯짝만 번지르르한 애송이의 말을 믿는 것이 아니었는데.”

거세게 혀를 차며 내뱉는 말을 가만히 듣던 모래 신의 사도가 조용히 정곡을 찔렀다.

“황자를 이용하려 하신 것은 아닙니까?”

“뭐라?”

왕은 짜증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거친 몸짓으로 사도를 향해 홱 돌아섰다.

노성을 퍼부으려던 심산이었지만 사도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격앙되었던 왕의 표정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사도는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왕이 거울 안에서 자주 마주하던 웃음이다.

협력자의 손을 떼어내고 벼랑으로 밀어버리는 자의 웃음.

“‘미친 말 위에 탄 이상은 내릴 수 없다.’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전하.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은 이용을 해야지요.”

“그대 말은…….”

“소인은 전하께서 다시 국경으로 군대를 보내신 것을 압니다.”

“…소식이 빠르군.”

“모래는 모든 것을 묵묵히 지켜보지요. 저희도 지원군으로 ‘불의 전사’들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왕은 잠시 가늠하듯 사도를 바라보았다.

‘모래, 란 말이지.’

모래 신의 뿌리는 치트룸을 감싼 드넓은 사막이다.

‘그러니 비옥한 프레세리아의 황자 따위와는 어차피 처음부터 오래갈 생각이 없었군.’

역시 그들은 동류였다.

마지막까지 찡그리고 있던 한쪽 눈썹마저 깨끗하게 편 왕의 모습에 사도는 그의 경계가 꽤 누그러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허리를 꾸벅 숙였다.

“황자가 데려온 계집이 있습니다.”

“계집?”

“마력의 씨앗입니다. 그 계집만 있으면 불의 힘을 계속해서 증폭할 수 있습니다, 전하.”

요시초 재배를 위해 불의 힘 대부분을 담은 정수는 모래 신의 사원 안에 두었다.

그곳에 라페슈라는 여자를 가둬두자 마치 마지막 조각을 맞춘 것처럼 정령력은 날이 갈수록 증폭하고 있었다.

‘불의 전사’로 세뇌해 둔 병력도 전과는 비할 수 없이 늘었고, 또 성장했다.

즉, 이제 오스틴의 쓸모는 다했다는 의미였다.

그 사실을 들은 왕의 얼굴에 마침내 웃음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막내에게 마지막 임무를 전해야겠군.”

하렘에서 온갖 군상을 보고 자란 아이답지 않게 사람을 잘 믿고 백성과 나라를 위하는 녀석이었다.

왕의 재목이다. 솔직히 아까웠다.

그러나 장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도 다 제 복이었다.

“나라를 위한 일이니 제 한 목숨 바치는 것도 영광으로 생각해야지.”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그렇게 군나르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 * *

오스틴이 도주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함께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던 치트룸 왕자에게 습격당하고 상처 입은 채로 도주했다고 한다.

‘참 용하다고 해야 할지, 목숨이 질기다고 해야 할지.’

군나르는 오스틴에게 반격당해 깊은 상처를 입은 상태로 자결해 버렸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남부 국경이 공격당하고 있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보나 마나 테오도르가 다시 남부로 내려갈 것이 뻔했다. 나도 상황을 다 듣고 있으니 그를 찾아가 멱살을 잡지 않을 정도의 이성은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마법 통신은 내가 아니라 테오도르 쪽에서 건 것이다.

- 그러니까 되도록이면 거기… 미뉴엘, 듣고 있어?

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니.”

- …….

잠시 말을 잃었던 테오도르는 곧 동요를 수습하고 조금 전과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 너는 그냥 로콰이트에 안전하게 있어줘, 제발.

나는 명료하게 대답했다.

“싫어.”

- 미뉴엘!

답답함을 가득 담아 부르는 소리에 내 인내심도 툭 끊어져 버렸다.

쾅!

나는 구슬을 올려둔 책상 위를 내려치며 숨겨왔던 나의 수줍은 마음을 모두 쏟아냈다.

“감히 내 남자를 건드린 주옥같은 놈이 처 돌아다니는데 가만히 앉아서 손가락이나 빨고 있으라고? 잡아서 산 채로 화덕에 구워버리든 마차 꽁무니에 매달아서 제국 일주를 하든, 두 발로 걸어 다니기는커녕 껍데기도 성하게 남기지 못하게 할 거야!!”

후욱, 후욱.

다다다다 쏘아붙인 뒤 숨을 고르는 동안 테오도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허공에 맺힌 그의 얼굴을 보며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괴로움을 꼭꼭 씹어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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