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다치지 않고, 단숨에 끝장내겠습니다.’
그렇게 빨리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던 에사디엔은 엉망으로 다쳐서 아직도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되어서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천방지축으로 날뛰다 쓰러진 내 옆을 지키던, 왜 몸을 아끼지 않느냐고 화내던 그의 마음을.
‘그래서… 그래서 나한테 알리지 말라고 한 거야?’
마지막으로 의식이 남아 있었을 때, 에사디엔은 테오도르와 그의 외할아버지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나한테는 자신이 다쳤다는 말을 하지 말아 달라고.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하루 이틀 뒤에 전해 들은 것도 아니고 오스틴이 탈출하며 성이 뒤집혔을 때야 비로소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마치 바보가 된 것만 같았다.
- 미뉴엘, 군대에서도 너처럼 욕하는 사람은 없… 아니다.
일그러진 내 얼굴에, 일부러 분위기를 띄우려고 농담하던 테오도르는 빠르게 그 생각을 접었다.
대신에 같은 부탁이 반복되었다.
- 아무튼 황자님 옆에 있어주면 안 될까?
“언제 깨어날 줄 알고?”
냉정한 내 목소리에 테오도르의 턱이 움칫 떨렸다.
“나도 그 사람 곁에 있고 싶어.”
옆을 지키고, 간호하고, 에사디엔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는 사람을 나로 만들고 싶었다.
- 그러면 그렇게 해.
“하지만 내가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은 황성 바깥에 있어.”
오스틴이 어디로 갔을지는 사실 뻔하다.
원래 짐승은 상처 입으면 둥지를 찾아가는 법.
그러니 그가 갈 곳은 불의 교단뿐이다.
“정확히는 남쪽에 있어.”
- 미, 미뉴엘, 너 설마……. 그건 아니야. 이 시기에 국경을 넘는다니, 그건…….
필사적으로 말리려는 것을 뿌리치고 나는 못을 박듯 말했다.
“테오, 나는 치트룸으로 가야 해.”
* * *
목적지가 분명해진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나는 전에 없이 빠르게 움직였고 부모님이나 언니들, 라망드조차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나를 막지 못했다.
내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황성이었다.
독대 요청을 흔쾌히 받아준 황제는 부르지도 않았는데 먼저 찾아와서 정령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나를 보며 놀라워했다.
“참으로 고생이 많았다. 10년 전의 그 일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던 게로구나.”
피로에 전 얼굴을 한 번 끄덕인 황제는 그간의 일이 어느 정도 납득된다는 듯이 두어 번 더 끄덕였다.
“에디와 네가 짐을 구하러 왔던 날 말이다.”
“예.”
“내 네가 어찌 싸웠는지 나중에 전해 듣고도 반신반의했거늘……. 그래, 정령의 힘이었구나.”
큼직하고 두툼한 황제의 손이 내 손등 위를 덮었다.
그의 목소리가 진중해지며 나를 들여다보는 눈이 한층 더 깊어졌다.
“아가, 정령의 힘을 되찾으면 제국의 수호신이 되어주겠느냐?”
아, 역시.
이런 이야기를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라서 놀라지는 않았지만 조금 실망하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드러낸다면 자칫 위험해질지 모른다. 아무리 나를 예뻐한대도 황제는 황제. 권위에 반항하는 것은 허락지 않을 것이다.
‘특히 지금처럼 진짜로 권위에 흠이 갔을 때는 더.’
나는 최대한 해맑게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삼황자님과 알콩달콩 백년해로하고 싶어요, ‘아버님’.”
수호신 같은 거 하면 빨리 죽어요. 우리 고양이 같은 에사디엔 두고 어떻게 눈을 감으라고?
에사디엔과의 파혼 요청을 완전히 취소하고 돌아온 호칭, ‘아버님’을 들은 황제의 낯에 아차, 하는 빛이 실낱같이 스쳐 지나갔다.
“그럼, 그래야 하고말고. 늙은이가 말실수를 했다, 그리 생각해 주겠느냐? 아가.”
늙은이라니.
새치 한 올 안 보일 정도로 번쩍거리는 풍성한 머리를 흘긋 곁눈질하면서도, 여기서는 얌전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아버님께서도 오래오래 저희 곁을 지켜주시기만 바라는걸요.”
왜냐하면 요청할 게 있었으니까.
“제 마음은 어서 결혼식을 올리고 싶은데, 그러려면 우선 치트룸에 다녀와야 할 듯해요, 아버님.”
“…치트룸에?”
말실수로 쳐드릴 테니까 통행증 끊어달라는 거나 다름없는 말에 잠시 내 얼굴을 살피던 황제는 곧 내 손등을 토닥토닥 두들겼다.
“예물은 마땅히 황실에서 준비해야 하거늘. 하기야 너도 개인적으로 선물을 하고 싶을 수도 있겠구나.”
그러고 보니 치트룸에는 화려한 세공품을 빚어내는 장인이 많다고 들은 적이 있다.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에 조금 솔깃해진 내게 황제가 넌지시 말했다.
“시국이 좋지 못하니 조심해서 다녀와야 한다, 아가.”
“아버님과 루미에르 언니 선물도 마련해 올 테니 기다려주세요.”
황제는 허허 웃으며 나를 보내주었다. 본궁을 나와 걸으며 나는 생각을 이어갔다.
‘에사디엔이야 뭘 걸쳐도 보물이 빛을 잃는 미모이기는 하지만.’
다다익선이라고, 원래 예쁜 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지.
“실처럼 금을 가늘게 뽑아서 만든 관이라든가……. 아니, 차라리 장인을 몇 명 스카웃해 올까?”
실없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에사디엔이 언제 깨어날지 모른다는 불안함에 짓눌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일부러 더 흥얼거리며 오랜만에 발을 들인 황자궁에는 반가운 얼굴들이 돌아와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녀님.”
“근신한다고 들었는데, 다들 돌아와 주었군.”
나는 마음에서 우러난 웃음과 함께 익숙한 시종들을 둘러보았다. 라페슈의 일 때문에 잠시 시종직을 내려놓았던 사람들이 모두 다시 돌아왔다.
“저희가 여기 아니면 또 어디에 마음을 붙이겠습니까.”
“고맙네. 그대들이라도 있어야 황자님께서 하루라도 빨리 기운을 차리실 수 있겠지.”
나를 에사디엔의 침실로 안내하던 시종이 미묘한 뉘앙스를 느끼고 돌아보았다.
“대공녀님, 실례지만 그 말씀은 혹여…….”
“나는 해야 할 일이 있다네.”
그래서 인사를 하러 온 거야.
내 말을 들은 시종은 급격하게 어두워진 얼굴로 나를 에사디엔의 곁에 앉힌 뒤 잠시 사라졌다가 웬 대야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저어, 다름이 아니라 곧 황자님의 몸을 닦아드릴 시간이라…….”
응?
으응?
‘그래서 지금 혹시 나더러?’
에사디엔과 시종을 번갈아 쳐다보던 나는 그만 크게 웃어버렸다.
“푸흡! 아하하!”
“저… 물릴까요? 감히 공녀님께 일을 미루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갑자기 터진 웃음에 당황해서 변명을 늘어놓는 그에게 나는 대야를 내려두라고 얼른 손짓했다.
“아닐세. 내 자네의 마음을 잘 알지. 고맙네. 아하하핫!”
이 시종은 내가 에사디엔의 근육에 진심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꽤 의욕적으로 물었다.
“음, 상체만 하면 되는 건가? 바지는?”
“…하의에 손을 댄 것을 아시면 황자님께서 노하실 듯합니다.”
“후후. 당연히 장난일세.”
긴가민가, 나를 믿어도 되는 건지 아리송해하는 시종을 내보내고 에사디엔 곁에 털썩 앉았다.
적어도 겉으로는 아픈 기색 없이 푹 잠든 사람처럼 보이기만 했다.
“바보예요, 진짜? 왜 다쳤다는 말을 하지 말래?”
나는 투덜거리며 에사디엔을 꼭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코를 묻자 바다가 떠오르는 에사디엔 특유의 향이 물씬 밀려들었다.
테오도르에게 했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계속 있고 싶기만 했다.
하지만 치트룸에 가기 전에도 들러야 할 곳이 많았기에 나는 애써 아쉬움을 추스르며 몸을 일으켰다.
“어디 보자, 일단 얼굴을 닦아줘야겠지? 후후. 후후후.”
하지만 얼굴을 닦다가 옷이 젖을 수도 있으니 필히 먼저 옷을 벗겨야 한다. 암, 그렇고말고.
나는 음흉, 아니 어디까지나 경건하게 웃으며 장갑을 벗었다. 단추를 하나하나 끄르면서는 콧노래도 조금 불렀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선물한 목걸이가 드리워진 에사디엔의 가슴팍을 지나 복부에 시선이 닿자 나는 더 웃을 수도, 흥얼거릴 수도 없었다.
“이건…….”
근육이 꽉 짜인 몸 가장자리를 검은색에 가까운 갈색 상흔이 차지하고 있었다.
손을 잘 닦고 살짝 가져다 대보자 마른 찰흙이 부서지는 것처럼 상처 귀퉁이가 조금 부스러졌다.
이미 황제가 부른 사제들이 신성력을 내내 퍼부어줬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가 가진 포션을 조금씩 발라보았다.
그러나 역시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었다.
“망할… 오스틴 이 자식은 역시 거열형 정도는 당해야…….”
나는 이를 박박 갈며 모래처럼 변해 흩어지던 오스틴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것도 모래의 신이라는… 그쪽 힘인가?”
그렇다면 이 상처는 대체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 걸까. 신성력으로도 없어지지 않는데.
해답 없는 문제가 너무나 많았다.
답답한 마음으로 평온하게 잠든 것만 같은 에사디엔의 얼굴을 보자 울컥 눈물이 치솟았다.
나는 그의 몸을 천천히 닦으며 몇 번이고 떨어지려는 눈물을 참아야만 했다.
‘울면 안 돼. 눈물에도 노폐물이 섞여 있으니까. 상처가 심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그 생각을 반복하면서.
그러다 보니 넓은 면적인데도 금방 끝나 버렸다.
“다 했다.”
후우, 하고 큰 한숨을 몰아쉬며 수건을 대야 안에 던져 넣은 후 그사이 조금 식은 에사디엔의 몸에 온기를 불어 넣어주었다.
가슴에도, 배에도, 팔에도 모두.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내가 어떤 기운을 줄 수 있다면 어떤 건 빼낼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게 불이나 온도와 관련한 것이 아니라도.
나는 당장 팔을 걷어붙이고 먼저 기도부터 올렸다.
“플렌드나 님, 제발 제게 신묘한 힘을 내려주세요! 사랑하는 사람이 이대로 잠들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하늘에서부터 빛이 쏟아진다거나 플렌드나의 음성이 들리지는 않았지만 나는 모아 잡은 손을 풀고 심호흡했다.
확실하지 않은데도 대뜸 해보려고 들다니, 내가 생각해도 브라시다스의 영향을 좀 많이 받은 것 같기는 했다.
‘아무래도 좋으니 제발 효과가 있기를.’
정령의 힘을 조금 쓰다 보니 알게 된 것은, 현실처럼 생생하게 상상해야 힘도 믿고 따라온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눈을 꾹 감은 채, 깜깜한 가운데 사위를 더듬어나가는 사람처럼 조금씩 상상을 전진시켰다.
에사디엔을 괴롭히는 힘 끄트머리를 더듬더듬 붙들어 잡아당기는, 그런 상상을.
잠시 후.
나는 천천히 눈을 뜨며 어이없게 중얼거렸다.
“…이게 되네?”
내 손끝에서는 독인지 저주인지 모를 기운이 타올라 파스스 사라지고 있었다.
“우와. 나 생각보다 재능 있나?”
그 매캐한 냄새를 맡으면서도 얼떨떨한 채로 있던 나는 핫, 하고 곧 정신을 차렸다.
그래도 환자가 있는 방인데 좋지 않은 걸 태운 채로 있을 수는 없었다. 얼른 에사디엔의 옷을 다시 입히고 창문을 열어 환기한 뒤에야 비로소 숨을 돌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