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기분 탓인지 에사디엔의 안색이 아까보다도 더 좋아진 것처럼 보였다.
“환부 색깔은 확실히 연해졌던데.”
그래서 혹시 눈을 뜨려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잠시 기다렸지만 그 정도 행운까지는 허락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에휴. 그럼 그렇지. 너무 많이 바라면 안 되지.”
나는 옅은 한숨과 함께 곤히 잠든 에사디엔의 이마에 몰래 입맞춤을 남겼다.
“내가 짠! 하고 일 다 처리하고 올 테니까 건강히 일어나 있어야 해요?”
당부까지 남기고 몸을 일으키는데 시선 끝에 뭔가 움찔하는 모습이 걸렸다.
“어?”
나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에사디엔의 손끝에 가져다 댔다.
분명 방금 이쪽 손가락이 움직인 것 같았는데.
“에사디엔?”
그러나 조심스럽게 귓가에 대고 이름을 불러봐도, 겨드랑이며 옆구리를 마구 간지럽혀봐도 그는 반응이 없었다.
개비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사람을 깨우려는 것인지 사심을 채우려는 것인지 모르겠다면서 비난했겠지만, 나는 떳떳했다.
사심을 채우다니! 괜히 근육을 만지작대려던 것이 아니라 정말로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으니까.
…정말이다.
“흠흠. 잘못 봤나.”
뻘쭘한 헛기침과 함께 이만 포기한 나는 정말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사디엔, 그럼…….”
벗어두었던 장갑을 다시 끼려던 나는 마음을 바꿔 그대로 에사디엔의 베개 옆에 올려두었다.
내가 다녀갔다는 이야기를 듣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눈에 보이는 뭔가를 남겨두고 싶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마지막 인사를 남긴 후 문을 열고 나서자 시종이 대기하고 있었다.
“대야만 치워주게나.”
“조금 오래 걸리신 듯합니다, 대공녀님?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도 보셨습니까?”
친근하게 농담을 거는 그에게 나도 장난으로 응수했다.
“봤지. 누가 짠 것인데?”
가볍게 말하고 있지만, 사실 보자마자 눈시울이 시큰했다.
내가 처음 선물했던 날부터 저 태피스트리가 에사디엔의 밤을 지켰겠구나 싶어서.
“하하하.”
“황자님께서 일어나시면 사랑과 정성으로 몸을 깨끗하게 닦아드렸노라고 꼭 전해 주시게나.”
훗훗훗.
아마 그걸 들으면 에사디엔은 또 빨간 파프리카처럼 얼굴을 붉히겠지.
그 모습을 상상하자 유쾌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 * *
다음 날 나는 바로 로콰이트를 떠났다.
경로는 단순했다.
로콰이트에서 북부로, 히로비외 화산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치트룸에.
나는 옆에 선 라망드를 향해 말했다.
“너는 언니들하고 있어도 된다니까.”
위험할 테니 따라오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렸지만, 라망드가 에사디엔도 없는데 자신마저 없으면 안 된다며 우기는 통에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내가 어떻게 비아체 경 장례식에 빠져.”
특히 이 핑계에는.
북부에 가장 먼저 들르는 건 미뤄두었던 니콜라스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였다.
사람을 잃은 책임.
현재 나를 둘러싼 모든 일이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책임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외면해서도 안 되는 것이고.
그런데…….
“라망드 너, 그러면 계속 북부에서 기다릴 거야? 아니면 로콰이트로 바로 돌아갈 거야?”
“봐서.”
라망드 이 녀석은 쿨하게 대답을 피해 버리고는 축지법이라도 쓴 것처럼 슝, 하고 다른 곳으로 사라져버렸다!
“야… 이 라망드가!”
눈을 번뜩이며 잡으려고 해봐도 녀석은 나를 너무 잘 아는 나머지 내게서 도망치는 데마저 해박했다.
“라망드 봤어?”
“어… 조금 전까지 여기 있었는데요.”
신출귀몰하게 여기 뿅 저기 뿅 움직이지를 않나.
“플렌드나의 가호가…….”
“라망드!”
참다못한 내가 급기야 신도와 만나는 자리에 난입했을 때는.
“…사제님? 어디 가셨지?”
전하던 플렌드나의 말씀도 내팽개치고 도망가 버렸다.
“와, 저게 진짜… 와…….”
솔직히 기사들을 동원할 수도 있었지만, 딱 한 명 있는 소꿉친구한테 그렇게까지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애초에 녀석이 걱정돼서 떼어내려 한 거니까.
그래서 결국 나는 백기를 들었다.
“알았어! 네 마음대로 따라와도 되니까 이제 그만 나와라, 좀!”
허공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몇 초간 침묵이 흐르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심이야?”
“…….”
우씨. 대체 어디 숨은 거야?
라망드를 찾아보려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느라 미처 대답하지 못했는데, 녀석은 그 잠시도 기다리지 못하고 다그쳤다.
“대답이 느린데.”
“아 진짜, 그래! 진심! 진심이라고!”
그제야 뒤쪽에서 다가온 손이 내 머리를 헤치듯 쓰다듬었다.
내 입장에서는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거나 마찬가지여서 솔직히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잘 생각했어.”
“하……. 라망드 플렌드나, 살아 있네? 어렸을 때로 돌아간 줄 알았어.”
어릴 적 숨바꼭질이라도 하면 나는 절대 라망드를 찾지 못했다. 반대로 녀석은 내가 있는 곳을 백이면 백 잘도 찾아냈고.
“하하.”
내 소감을 듣고 소리 내 웃은 라망드가 물었다.
“덕분에 많이 우울하진 않았지?”
뭐?
움찔한 내가 돌아보는데도 라망드의 웃음은 그대로였다.
프레세리아에서는 장례식을 이틀간 치른다.
북부에 온 목적은 니콜라스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였고, 오늘이 바로 그 이튿날이었다.
돌이켜보면 비아체 가문의 유족을 만나 그들을 진심으로 위로하면서도 마음이 묵직하게 가라앉을 정도로 우울해지지는 않았다.
“너… 그럼 나 때문에 일부러?”
나는 이제야 그게 니콜라스를 마음에서 쿨하게 보내줘서가 아니라 라망드 때문에 혼자 땅굴을 팔 겨를이 없어서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겸사겸사지.”
다시 머리를 쓰다듬은 라망드의 손은 머리카락을 빗듯이 내려가더니 끄트머리에 이르러서 한 줌을 쥐었다.
“내일은 히로비외로 가는 건가?”
“먼저 로소스에서 대마법사님을 만난 뒤에.”
로소스는 히로비외 섬이 보이는 해안 도시다.
마침 슐츠 상회가 그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서 브라시다스는 막 가족을 찾은 팔로스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휴가 기간을 그곳에서 보내고 있었다.
물론 숨겨진 이유도 있었는데, 바로 나와 함께 히로비외에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렇구나.”
가볍게 대답한 라망드가 쥐고 있던 내 머리카락을 얼굴 가까이 가져갔다.
얘가 왜 이렇게 안 하던 짓을 한담.
“냄새 나? 나 오늘 머리 감았는데.”
생각한 그대로 묻자 라망드는 잠시 고요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머리카락을 모두 놓아주었다.
“머리 좀 잘라. 끝이 다 상했네.”
“정말?”
나도 덩달아 눈을 가늘게 뜨고 머리카락을 들여다봤지만 해가 저물고 있어서 그런지 잘 보이지가 않았다.
‘라망드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뭐.’
귀찮아진 나는 단순하게 생각하며 먼저 안으로 걸음을 옮기는 라망드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잡았다.
“하긴 너무 길긴 했지.”
“내가 다듬어줄까?”
“전처럼? 좋아!”
서멘더에서 종종 보여줬던 실력이 어디 가지 않았는지 라망드는 예전처럼 내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잘라주었다.
덕분에 다음 날, 나는 전보다 조금 더 가벼워진 머리로 로소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두근거려, 데인 경?”
내가 쿡 찌르며 짓궂게 묻자 클리데인의 엉덩이가 거의 한 뼘은 튀어 올랐다가 떨어졌다.
“예, 에? 무, 무슨 말씀이신지.”
응, 슐츠 상회에 가까워질수록 당신 어깨가 점점 하늘로 치솟고 있어서.
나는 그걸 설명해 주는 대신에 피식 웃으며 클리데인의 팔뚝을 토닥였다.
“신시아 양하고는 어때? 사귀기로 했어?”
“사, 사귀…….”
클리데인의 얼굴과 귀가 동시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닮은 얼굴에 부끄러워하는 것까지 비슷하니 절로 에사디엔이 떠오르며 가슴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드러낸다면 분위기만 나빠질 거라는 걸 안다. 그래서 나는 속이 터진다는 듯 클리데인만 쿡쿡 찔렀다.
“고백했느냐고. 빠릿빠릿하게 대답 안 하지?”
“했, 했습니다!”
으악.
거의 신병처럼 기합이 팍 들어간 대답에 나는 손가락으로 귀를 막으며 물러났다.
그런 우리를 지켜보던 라망드가 나무랐다.
“미뉴엘, 너무 놀리지 마.”
“놀리는 거 아니고 응원하는 건데에.”
메롱, 혀를 내밀며 라망드까지 약 올리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라망드는 좋아하는 사람 이야기에도 엄청 무덤덤했지.’
이런저런 일이 겹치다 보니 ‘라망드의 그녀’라는 환상의 존재에 대해 알아볼 정신조차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마음에 둔 사람을 생각하면 티가 나는 게 정상인데 말이지. 눈빛이 달라진다거나, 입가가 부드러워진다거나.
‘존재하는 건 맞는 거지?’
슬슬 실존 인물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려던 찰나 우리는 슐츠 상회에 도착했다.
“누나!”
마차가 도착하기 무섭게 가장 먼저 팔로스가 뛰어나와 내게 안겼다.
‘으아?’
반사적으로 친누나인 신시아 양의 눈치를 보게 되는 건, 내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클리데인과 재회하느라 바빠 보였고, 슐츠 씨 부부도 흐뭇하게 보고 있었으므로 나는 팔로스를 꼭 껴안고 빙글빙글 돌았다.
“잘 지냈어, 우리 팔로스?”
사실 물을 필요가 없기는 했다.
처음 만난 가족을 잔뜩 경계하느라 나를 향한 호칭 하나도 조심하던 팔로스가 이제는 더할 나위 없이 밝아 보였으니까.
“네, 누나! 내일 화산에 저도 같이 갈 거예요.”
“정말? 많이 뜨겁고 힘들 텐데.”
브라시다스야 대마법사니 자기 몸 정도는 충분히 지킬 수 있겠지만, 팔로스는 아직 마법 학교를 졸업하지도 않은 아이인데.
걱정스러워하는 내게 뒤이어 다가온 브라시다스가 고개를 주억거려 주었다.
“내 제자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팔로스의 성취는 정말 뛰어나다네. 그리고 마법사로서 경이로운 자연을 가까이서 체험하는 것도 필요하고.”
1년 만에 대마법사한테서 저런 말을 들을 정도라니.
‘역시 우리 팔로스! 이런 인재가 마법 학교에 못 들어갔으면 어쩔 뻔했어?’
차오르는 뿌듯함으로 어깨를 바르르 떠는 내게 팔로스가 조르듯 말했다.
“누나, 저 정말 괜찮아요. 스승님도 계시잖아요.”
소매를 꼭 붙들고 말하는데 이길 도리가 없었다.
제자를 끔찍하게 위하는 브라시다스이니만큼 이번에도 팔로스를 잘 보호해 줄 거라고 믿을 수밖에.
“그래, 알겠어.”
나는 팔로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멀리 보이는 수평선을 건너다보았다.
아직 바다를 건너지 않았는데도 히로비외 화산이 뿜어내는 생생한 자연의 힘이 느껴졌다. 안주머니에 넣어둔 정령석이 괜히 묵직해지는 것만 같았다.
‘개비, 조금만 기다려.’
시들시들하던 개비는 어느 시점부터 갑자기 잠이 들어버렸다.
내게 있는 힘이 갑자기 빨려나가거나 하지 않으니 우리가 가진 힘의 총량은 여전히 같다는 뜻인데, 대체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개비가 떼를 썼을 때 그냥 히로비외 화산부터 갈 걸 그랬어.’
내 탓이오, 내 탓이오.
하지만 후회해 본들 과거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