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119)화 (119/130)

119화

에사디엔은 오래 숨을 참았던 사람처럼 별안간 커다란 들숨을 삼키며 눈을 떴다.

왠지 굉장히 긴 잠을 잔 듯한 기분이었다.

“미뉴엘.”

서둘러서 돌아가기로 약속했는데.

부스스 몸을 일으키며 잠긴 목소리로 가장 먼저 뱉은 이름에 대답하듯 베개 옆에서 장갑 한 켤레가 바스락거렸다.

“……?”

여성용 장갑.

시선이 그것에 닿자마자 에사디엔은 미뉴엘이 자신을 보러 왔었음을 깨달았다.

그 말인즉 테오도르가 도저히 감출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에사디엔이 아는 미뉴엘은 손수 오스틴의 힘을 박살 내겠다며 달려 나갈 사람이었다.

‘결국.’

그는 또다시 사랑하는 사람의 뒤를 쫓아가야만 했다.

반복되는 상황에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으로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앙다문 이 아래서 버석하게 마른 입술에 피가 맺혔다.

바닥에 발을 딛고 일어서며 몸에 힘이 들어가자 이마에 식은땀이 맺힐 정도로 통증이 느껴졌지만 이 정도에 다시 쓰러질 수는 없었다.

미뉴엘이 봤다면 환장하겠다면서 바로 침대에 밀어 눕혔겠지만 지금 그녀는 이곳에 없었다.

‘정신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다.’

에사디엔은 그 말을 계속해서 되뇌며 침실 문을 활짝 열었다.

“의사와 사제를 불러라. 그리고 남부의 트레고스난 사령관에게 통신을 연결하도록.”

“황자님? 진찰을 받을 때까지는 누워 계셔야 합니다!”

“서둘러라.”

주인의 다그침에 막 잠들었던 삼황자궁이 깨어나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동쪽 하늘에서 붉은 선 하나가 허공에 금을 긋듯 치솟았다.

아직 사람들의 하루가 시작되기도 전인 이른 새벽이라 이변을 눈치채지 못한 도시는 잠잠하기만 했다.

그러나 이 시각 움직이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 에사디엔은 그 빛에 시선을 빼앗기기는커녕 등지듯 말을 몰아 황자궁에서 빠져나갔다.

* * *

“하아. 엄청났다.”

열기를 날리려 얼음장 같은 물에서 한참 몸을 씻은 나는 보송보송한 침대 위로 엎어지듯이 털썩 드러누웠다.

더워도 너무 찬물로 씻으면 좋지 않다지만.

“이렇게 더운 지방에 왔는데 못 참지!”

아무리 더위를 안 타는 몸이라도 기분이 다르단 말이다.

나는 그대로 몸을 데구루루 굴려 창문에 드리워진 얇은 커튼을 걷어냈다.

창밖에는 같은 프레세리아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왠지 하늘마저 조금 색이 옅은 듯하고, 땅에는 모래가 섞인 돌바닥이 깔려 있으며 드문드문 보이는 나무들은 모두 잎이 크고 넓었다.

이곳은 남부 국경 지대.

‘테오!’

‘…미뉴엘……. 진짜로 왔구나.’

‘허언하는 취미는 없어.’

기어이 여기까지 온 나를 본 테오도르는 할 말이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면서도 우직하면서 은근히 섬세한 면이 있는 그답게 내 얼굴에 어린 피로감을 읽고는 관사의 방을 내어주었고, 나는 짐을 내려두자마자 씻기부터 한 참이었다.

화산에서 개비를 깨운 뒤 또 한바탕 힘을 흡수하며 푸닥거리를 하느라 재투성이가 된 나를 팔로스가 마법으로 깨끗하게 만들어주기는 했지만, 진짜로 씻지 않으면 찝찝해서 말이지.

“그나저나 정말 대견하다니까, 우리 팔로스.”

브라시다스가 괜찮다, 괜찮다 하는 통에 반신반의하며 데려가기는 했어도 걱정이 많이 되었는데.

아무리 내가 열기를 차단해 주었다고는 해도, 사람이 견딜 수 없는 극한의 환경임에도 아이는 머뭇거리지 않고 브라시다스의 지시를 따랐고 때로는 그와 거침없이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게다가 중간중간 나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직 어린데도 마법사다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마법 학교에 입학하던 날, 자신이 없어서 어깨를 수그리던 꼬마는 채 일 년이 지나기도 전에 사라져 지금은 어디에도 없었다.

흐뭇하게 웃으며 눈을 감으려던 참이었다.

지금껏 잠잠하던 개비가 내 배 위로 뿅! 하고 뛰어올랐다.

“커헉!”

예상치 못한 습격에 쿨럭거리는 내 모습에도 개비는 개의치 않고 고개를 들이밀며 물었다.

- 나는? 나는?

“너어는 진짜…….”

계약자를 죽일 셈이냐, 하고 쏘아붙이려던 나는 기시감에 그만 입을 다물었다.

‘이거 라망드가 나한테 많이 하던 말인데.’

그래, 라망드가 나를 보는 시선이나 내가 개비를 보는 시선이나 비슷비슷하구나.

나이만 먹었지 철이 안 든 사고뭉치…….

흑흑.

갑자기 슬퍼진 나는 개비를 껴안으며 좌우로 데굴데굴 굴렀다.

“우리 개비도! 대견해! 대견해 죽겠어!”

- 으악!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러냐! 놔라!

왁왁대기는 하지만 가만히 안겨 있는 걸 보니 은근히 좋은 게 분명했다.

‘이 녀석 성격에 싫으면 진작에 저쪽으로 쪼르르 날아갔겠지.’

나는 개비의 머리, 아니 부스스한 머리카락 모양으로 뻗은 불꽃 위를 살살 쓸었다.

손이 움직일 때마다 모닥불 옆에서 나는 것 같기도 하고, 한여름 뙤약볕이 내리쬘 때 나는 것 같기도 한 냄새가 일었다.

“네 말에 따르지 않아서 미안.”

- 무슨 말?

“먼저 화산에 가야 한다는 말.”

- 안 어울리게 지난 얘기를 하고 그러냐, 인간아. 어차피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꿀 수는 없지만 제대로 사과는 해야지.”

내가 따르지 않은 바람에 네가 더 고생한 건데.

- 흐, 흥! 그러면 애초에 내게 몸을 넘기지 않은 것부터 사과해야 맞는 것 아니냐?

“그랬다면 나처럼 좋은 친구하고 만나지 못했을 텐데?”

- …….

별달리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지 입 모양으로 뚫린 구멍이 일그러졌다가 펴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웃음을 꾹 참으며 또다시 개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좋은데. 너하고 이렇게 있을 수 있어서.”

그러자 잠시 훅 줄어들었던 개비의 불꽃이 푸릇해지며 더 격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데 하는 말이라고는 고작 이거다.

- 화산재를 잘못 마셔서 머리가 아픈 건 아니고?

결국 나는 더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렸다.

“아, 진짜 귀여워.”

- 내가 또 정령들 사이에서는 한 귀여움 하지.

아… 예. 그래서 인간은 이렇게 저렇게 다루라고 잘못된 교육을 받으셨어요?

- 야!

내 속내를 읽고 가늘어진 개비의 눈초리에 나는 잽싸게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네가 지금껏 움직이지 못한 이유가 뭐라고?”

- 화산 가스 때문에 기억력이 온전치 않은 건…….

“아, 장난 그만하고.”

이제부터는 진지한 이야기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처음 보는 자세에 갸웃하던 개비도 어색하게 따라 앉으며 말했다.

- 여기보다 더 남쪽, 그러니까 너희가 치트룸이라고 부르는 그곳에서 자연의 힘이 비정상적으로 팽만해지고 있어.

“현재 진행형이라고 했지?”

- 그래. 지금 이 순간에도.

개비가 아픈 것처럼 시들시들했던 건 지키는 데 온 힘을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치트룸의 모처로 빨려들어 가려는 우리의 힘을, 그리고 무너지려는 개비의 안식처, 불의 세계를.

“다른 정령과 이야기는 잘했어?”

화산 안으로 들어간 지 사흘이 지난 후에야 기운을 조금 차린 개비는, 사흘이 더 지난 후 하늘을 뚫을 것 같은 불기둥과 함께 완전히 부활했다.

그러고는 분화구 안에서 신이 나서 펄떡펄떡 헤엄치는데, 나는 무슨 용암에서 사는 잉어를 보는 줄 알았다.

‘정령은 여기 살아. 계약자는 집에, 아니 치트룸에 가버린다?’

참다못해 궁둥이를 차고 나서야 시무룩해져서는 하는 말이, ‘먼저 가 있어.’였다.

- 화산섬 아래에 물의 정령석을 지키는 일족이 자리 잡고 있어. 나는 물의 정령을 만나고 갈게.

‘괜찮은 거야, 나하고 떨어져도?’

- 화산이 머리 위에 있으니까.

나한테 정령석이 있으니까 위치를 헷갈릴 수도 없다더니, 그 말대로 개비는 정확히 나를 찾아와 배 위에 내리꽂혔다.

- 만나기는 했지. 하지만 다른 녀석들은 계약자가 없어서 현신하지 못해.

“그쪽은 힘을 빼앗기지 않는 거야?”

- 응. 나처럼 반쪽이 아니라 다행이지.

그 말에 어린 씁쓸함을 지우려 나는 얼른 개비의 겨드랑이에 양손을 넣고 들어 둥개둥개 얼렀다.

“반쪽이라니! 금방 돌려줄게. 이제 거의 다 왔어!”

엔드 게임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우리는 정말로 종반전에 돌입한 것이다.

- 너는 겁도 나지 않느냐?

“네가 지켜줄 거잖아. 그러기로 한 거 기억 안 나?”

장난스럽게 웃은 뒤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는 돌아갈 곳이 있으니까.”

나는 가족들과 에사디엔 곁으로. 개비는 완전해진 정령석 안으로.

- 돌아갈 곳…….

“그러니까 조금만 더 힘내자. 너도 곧 다른 정령들처럼 편안히 잘 수 있을 거야.”

열심히 얼러준 보람이 있는지 개비는 다시 빙그레 웃었다.

- 그래.

* * *

하루 푹 쉰 후, 테오도르는 우리에게 한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미뉴엘, 치트룸까지 너희를 안내할 길잡이를 수배했어.”

“길잡이?”

제발 오지 말라고 했으면서 막상 닥치니까 부탁하지 않은 부분까지 이렇게 신경 써주다니.

나는 놀람과 동시에 미안함을 담아 볼을 긁적였다. 아무래도 테오도르는 내가 낙타를 타고 사막을 횡단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고마워. 그런데 브라시다스 님이 마법 스크롤을 주셔서, 며칠 안 걸릴 테니까 길잡이는 없어도 될 것 같아.”

“그, 그랬어?”

테오도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옆에 선 ‘길잡이’를 흘긋 쳐다보았다.

길잡이라는 사람은 조금 노란기가 감도는 흰옷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히도 감싸고 있었다.

드러난 거라고는 푸른색 눈과 그 주변밖에 없어서 옷의 품이 넉넉하지만 않았다면 미라라고 생각할 뻔했다.

테오도르의 시선을 따라 나까지 덩달아 길잡이라는 사람을 보는 동안, 그는 평정을 되찾고는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치트룸까지 한 번에 도달하는 스크롤은 아니지?”

“응. 그만큼의 마력은 담을 수가 없대.”

애석하지만 그랬다. 다른 마법사가 만든 스크롤보다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긴 정도로 만족해야지.

“중간에 휴식도 취해야 할 테고, 전선이야 스크롤을 이용하면 빠르게 벗어날 수 있을 테지만 사막에도 몬스터가 있거든. 데려가면 도움이 될 거야.”

“하지만.”

나는 테오도르에게 손짓했다. 혹시 길잡이에게 들릴세라 순순히 내게 몸을 숙인 그에게 소곤소곤 속삭였다.

“우리가 왜 치트룸에 가는지는 모르지? 믿을 만한 사람이야?”

“아아.”

테오도르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내 어깨를 두들겼다.

“이 사람처럼 노련한 길잡이 겸 용병들은 원래 입이 무거워. 계약금이 장난 아니거든.”

“…네 사비로 낸 거야? 얼만데?”

“지금 당장 주려고? 괜찮으니까 다녀와서 완수금까지 처리하도록 해.”

미안하게.

하지만 테오도르는 괜찮다는 듯이 엄지를 척 들어 보일 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