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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121)화 (121/130)

121화

하지만 에사디엔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미 보셨지 않습니까?”

“네에?!”

“제가 혼수상태일 때 사랑과 정성으로 닦아주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위쪽만 닦았거든요!”

못 살아, 정말!

얼굴이 새빨개지다 못해 귀에서 김이 나올 것 같은 나와 달리 에사디엔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아쉬워했다.

“아…….”

‘아’는 무슨 ‘아’야!

에사디엔이 빨간 파프리카처럼 얼굴 붉힐 것 같다고 한 사람, 대체 누구냐!?

나는 며칠 전의 나 자신을 향해 혀를 찼다. 정말이지 오산 중의 오산, 경기도 오산이었다.

‘어쩐지 볼 때마다 능글맞아지는 것 같단 말이야.’

점점 더 내가 말리는 것 같기도 하고.

눈을 가늘게 뜨고 째려봤지만 에사디엔은 그저 다시 손을 뻗을 뿐이었다.

“옆에 있어주십시오.”

“옆에 있기는… 빨리 닦고 가서 자요.”

“그러면 제가 물에서 나가겠습니다.”

“…….”

“이대로.”

지금 이 순간, 나는 왜 ‘그러시든가!’하고 홱 돌아서지 못하는가.

가벼운 자기혐오에 빠진 사이, 몸을 쭉 뻗은 에사디엔은 나를 번쩍 들어 물가에 내려놓고는 또다시 머리끝까지 잠수했다가 올라왔다.

인어가 있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즐거워 보이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수영을 좋아하나 봐요.”

그러고 보니 황제의 비원에 빠졌을 때 날 구해 준 사람도 에사디엔이었지.

“당신은 싫어합니까?”

“…뭐, 물에 몸이 뜨지 않는 사람도 있는 거라고요.”

“음. 지난번엔 드레스가 무거워서 그런 줄로 알았습니다.”

나는 그만 빙긋 웃어버렸다.

“저도 비원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에사디엔도 나와 비슷한 웃음을 지으며 내 손을 꼭 쥐었다.

“그거 아십니까? 그날이 제가 처음으로 이성의 품에 안긴 날입니다.”

“그것참 흡족한 소식이네요.”

키득거리던 나는 에사디엔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그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검은 머리도 잘 어울리네요. 어떻게 만든 거예요?”

“마법사에게 부탁했습니다. 염색은 혹시라도 치트룸에 들어가서 색이 빠져버리면 곤란할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요.”

내가 치트룸으로 쳐들어갈 계획이었던 것은 또 어찌 알았는지, 그건 굳이 묻지 않았다. 보나 마나 테오도르가 알려줬을 테니까.

하여튼 나보다 에사디엔 편이라는 걸 투명하게도 알려주는 사람이다. 뭐 알고 지낸 시간이 압도적으로 차이 나니 어쩔 수 없기는 하지만.

“테오는 거짓말을 너무 못하지 않던가요?”

원작에서는 대체 어떻게 라페슈를 만나는 걸 숨겼을지 의아할 정도로.

에사디엔도 단번에 동의했다.

“원래도 그랬습니다만 이번에는 엄청나더군요.”

“노려보는 거 봤어요.”

“그것도 들켜버렸습니까?”

“이해해요. 가명도 엔디가 뭐람. 즉석에서 지은 거죠?”

“예. 저도 그날 겨우 도착한 것이라서.”

깨어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을 텐데 너무 강행군이잖아.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상처는 어때요? 아프지 않아요?”

아직 다 낫지 않은 것 같은데.

오스틴이 남겼을 것이 분명한 상처는 내가 닦았을 당시와 별 차이가 없었다.

다시 심해지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낫지도 않은 상태에 속상해졌다.

하지만 에사디엔은 덤덤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간단히 말했다.

“괜찮습니다.”

“흐응.”

괜찮기는. 콧소리를 길게 흘린 나는 손가락을 들어 상처 자리를 쿡! 하고 찔렀다.

반응은 즉각적으로 돌아왔다.

“윽.”

나도 양심이란 게 있어서 세게 찌르지 않았건만, 에사디엔은 일순 한쪽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악문 잇새로 짧은 신음을 흘렸다.

다음 순간 그의 얼굴에 아차, 하는 표정이 스쳤지만 이미 다 들은 후였다.

“이거 봐요. 이렇게 아프면서.”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속이 상하지만 에사디엔의 말마따나 그 혼자만 떨어뜨려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가만히 있어요.”

단단히 말해 두고, 나는 에사디엔의 상처 위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리며 정신을 집중했다.

그래도 두 번째라고 그의 몸에 남은 기운은 지난번보다 훨씬 수월하게 잡혀 타올랐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데도 연기의 궤적을 정확히 눈으로 좇던 에사디엔은 아까보다 확연히 가벼워진 숨결을 내쉬었다.

“지금 당신의 모습은 마치 치유의 신 같군요.”

“이렇게 쪼그려 앉은 신이 어디 있어요? 혹시 모르니까 몸 닦고 나서 꼭 포션을 바르도록 해요.”

흥, 하고 새침하게 떼어내려던 손이 덜컥 에사디엔에게 붙잡혔다.

“미뉴엘.”

“왜, 왜요.”

이미 푹 젖어버린 장갑 너머로 에사디엔의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 체온 때문인지, 아니면 눈도 깜빡거리지 않는 그의 시선 때문인지 몸이 묶인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조금만 더…….”

이를 세운 에사디엔이 장갑 끝을 물어 단번에 벗겨냈다.

그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열기를 머금은 탓에 나는 화를 내는 것도 잊고 홀린 듯이 그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조금만 더 만져주십시오.”

* * *

라페슈는 이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 거짓말 정도는 얼마든지 하겠다고 결심했다.

“황자님도 나한테 거짓말했는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나라고 못 할 게 뭐 있어? 꼭 나가서…….”

주먹을 쥐고 다짐하던 라페슈의 말끝이 흐려졌다.

‘나가서, 뭐?’

다 허물어진 템페스트 남작가를 박차고 나온 라페슈에게는 가족도, 갈 곳도, 의지할 사람도 없었다.

발밑이 허물어지는 듯한 허무함에 눈앞이 핑 돌았다.

한참 동안 창밖으로 멀거니 시선을 던진 후에야 조금 마음이 가라앉은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래도, 지금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

첫 타깃은 당연히 그녀의 시종이자 호위인 테마리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테마리. 어제는 속이 좋지 않았죠?]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라페슈는 유창한 치트룸어로 테마리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냉랭하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신, 어떻게?]

[사도님께서 지시하신 명상이 효과가 있었나 봐요.]

[역시 불의 힘은 만인을 공평하게 정화해 주는군.]

테마리는 사뭇 경건함이 넘치는 태도로 말했지만 라페슈의 관심 밖이었다.

그녀는 오로지 테마리가 ‘사도’라는 말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은 것에 주목했다.

이 사람과 친해지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조금 더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풀 냄새 나는 방에만 갇혀 있어서는 안 되었다.

[정말 깜짝 놀랐다니까요. 어찌나 위대하신지. 그래서 저도 교리를 배우고 싶은데, 언제부터 배움을 얻을 수 있을까요?]

[금방 알아보고 오지.]

하지만 테마리가 가져온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완전히 정화가 끝날 때까지는 명상이 필요하다고 하시는군.]

라페슈는 대단히 실망했다.

‘대체 나를 가둬두고 뭘 어쩌려는 거지?’

무슨 죄수도 아니고, 유명한 마법사 밑에서 수학하게 해준다고 해서 덥석 따라온 것인데.

오스틴이나 사도라는 노인네의 의도가 사람을 신경질적으로 만들고 자존감을 깎아먹으려는 거라면 참 성공적이라고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하아.”

낙담한 라페슈의 모습을 테마리는 조금 다르게 받아들였다.

[진심으로 교단에 의탁하고 싶었던 거군.]

광신도는 교활하지만 순진하다. 그간 딱딱하게 대한 것마저 미안해진 테마리는 라페슈에게 자기가 조금씩 경전 내용을 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윽.’

정말 싫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외부와 닿을 수 있는 끈이라고는 테마리뿐이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그녀와 가까워져서 좋았던 건, 저녁에 방으로 돌아가기 전에 잠시 동안 산책을 하는 시간이 생겼다는 점이었다.

* * *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사도인지 마법사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노인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라페슈는 날이 갈수록 바싹 말라가기만 했다.

[이봐, 라페슈. 괜찮아?]

[네…….]

라페슈는 멍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갓 태어난 사슴처럼 다리에 힘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 상태였다.

[잠깐만 기다려. 사람을 불러올 테니까.]

결국 혼자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겠다고 판단한 테마리가 다른 사람들을 부르러 간 사이, 내내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린 라페슈의 눈이 조금 전과 달리 번뜩거렸다.

“지금이야…….”

상태가 나빠진 건 거짓이 아니었다. 누가 수명을 덜어가기라도 하듯 몸이 쇠약해지는 것이 시시각각으로 느껴졌다.

게다가 몸과 함께 기도 약해졌는지 이제는 명상의 방에 갇혀 있다 보면 등을 풀줄기로 건드리는 것처럼 오싹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앞으로 어찌할지의 문제보다, 이대로는 죽을 것 같다는 위기감이 라페슈를 움직였다.

‘산책할 때마다 담이 낮은 곳들을 눈여겨봤지.’

오늘을 위해서.

불의 교단이 자리 잡은 이곳은 석조 건물이었는데, 굉장히 오래되어서 군데군데 무너진 흔적이 있는데도 아무도 보수하지 않았다.

[옛날에 이곳은 모래 신의 신전이었어. 사도님께서는 쇠락함을 경계하되 꺼리지 말라는 의미에서 이곳에 자리 잡으셨다고 해.]

라페슈는 힘에 겨운 숨을 내뱉으며 테마리의 말을 떠올렸다. 뭐라는지 모를 소리였지만 탈출하려는 입장에서는 고마울 따름이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발목을 추스르며 기를 쓰고 바깥으로 향했다. 이를 악물고 무너진 벽과 벽 사이를 넘었다.

“하아, 하아…….”

이상하게도 명상의 방이 위치한 신전 중심부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조금씩 더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바깥’에서는 사람들이 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웅성거리는 소리, 말과 낙타들이 타박타박 바닥을 밟는 소리, 상인이 쇠 그릇을 두들기며 이목을 끄는 소리.

라페슈는 굵은 땀방울을 닦아내는 것도 잊고 그 소리를 쫓았다.

하지만.

마지막 벽이 눈앞에 보이자 그녀의 걸음은 천천히 멎어갔다. 절망에 짓눌린 듯한 모양새였다.

“보수하지 않는다며, 이 나쁜 사이비들아…….”

바깥까지 단 한 장의 벽만 남았을 뿐인데, 그 담장은 지금까지 봤던 것들보다 훨씬 더 높고 두꺼웠다.

아무리 봐도 최근에 쌓은 것이었다.

“흐흑.”

눈물이 절로 솟구쳤다. 다리에서 힘이 쭉 풀리며 라페슈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집에 가고 싶어…….”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녀는 엉엉 울며 양손을 마주 잡았다.

“제발. 부처님, 예수님, 알라신님, 누구라도 나 좀 집으로 돌려보내 줘요. 착하게 살게요. 신차 나올 때마다 지르지도 않고, 클럽 빌려서 노는 대신에 그 돈 전부 기부할 테니까, 제발, 제발!”

그 정도의 기도로 세계와 세계 사이를 뛰어넘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라페슈의 목소리는 그녀가 아는 신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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