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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122)화 (122/130)

122화

신을 대신해 라페슈의 애원을 들은 사람은 이 순간 그녀가 가장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자, 모래 신의 사도였다.

“정화되지 않은 영혼이 길을 잃었구나.”

“당신……!”

왜 하필 지금.

눈물로 번들거리는 얼굴을 들어 올린 라페슈가 표독스럽게 외쳤다.

“오스틴 황자님은 어디 계시지? 황자님을 만나게 해줘!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그러나 사도는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흐음. 아무리 마력의 씨앗이라도 계속해서 흡수하는 것은 무리인가. 보충되는 시간보다 빨아들이는 것이 더 빠른가 보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반문하면서도 싸늘한 기색을 본능적으로 느낀 라페슈가 바르작바르작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등 뒤를 가로막은 벽에 곧 멈춰야만 했다.

“보내줘, 제발……. 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건데…….”

사도는 굳이 몸을 굽혀 라페슈를 붙들지 않았다. 그가 손가락을 한 번 까딱한 것만으로 벽에서 튀어나온 손이 그녀를 결박한 채 다시 굳었다.

“아악!”

몸이 반쯤 벽 안에 갇힌 공포에 몸부림치는 라페슈에게 사도가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보내주면 갈 곳은 있는가, 아가씨?”

아주 오랜 시간 인간들을 지켜본 사도에게 어리고 단순한 여자아이의 심리를 찌르는 것 따위는 심심풀이조차 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놀란 라페슈의 울음이 뚝 그쳤고, 사도는 다 이해한다는 듯 자애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모두 그런 존재들이지. 덧없는 것들에 집착하지만, 결국에는 모래와 흙보다도 잘게 부서져 사라진다네.”

“…….”

“그러니 그냥 지금부터 우리에게 의탁하게. 다른 생각은 필요 없고, 거대한 힘에 자신을 맡기기만 하면 편해질 거라네.”

잔잔하게 위로하는 듯한 말투에 라페슈는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하지만 옛날부터 콧대 높았던 자존심, 그것이 목을 뻣뻣하게 붙들었다.

이를 악물고 대답을 피하는 라페슈를 보며 두어 번 혀를 찬 사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옴짝달싹 못 하는 어린애 정도야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넘어오기 마련이었으므로.

“죽어… 헉!”

죽으라고?

라페슈는 귀를 의심하며 고집스럽게 아래로 향했던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시야에 들어온 것은 뒤에서부터 입이 꿰뚫린 채 쓰러지는 사도의 모습이었다.

죽기 전 마지막 말이 ‘죽어’일 거라고 상상할 사람이 대체 얼마나 있을까.

현실감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라페슈가 발작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그 예쁜 입 다물어.”

건조한 목소리가 거칠게 명령할 때까지.

깜짝 놀라서 기계적으로 명령에 따른 라페슈가 이번에는 딸꾹질을 시작했다.

“황, 끕, 황자님!”

그래도 얼굴 몇 번 더 본 사람이라고, 이렇게 구해 준 것만으로도 방치한 과거를 다 잊을 정도로 반가웠다.

오스틴은 그사이에 생기가 쪽쪽 빨려 가관인 라페슈의 모습에 눈썹을 찡그렸다.

그뿐, 안부도 묻지 않고 벽에서 돋아난 손을 부순 그는 가느다란 라페슈의 손목을 붙잡고 다짜고짜 끌어당겼다.

“악! 잠시만요……. 힘이 없다고요!”

기어이 다리에서 힘이 풀려버린 라페슈가 제대로 걷지 못하자 아예 포대 자루처럼 어깨에 짊어지고 성큼성큼 움직였다.

그제야 숨을 조금 돌린 라페슈가 추궁했다.

“왜 저한테 거짓말했어요?”

“…….”

“왜 이런 데다 날 가둔 거예요?”

“…….”

무시를 참는 것도 두 번이 한계다. 라페슈는 소리 지르며 발버둥 쳤다.

“못 들은 척하지 말고 내려줘요! 프레세리아로 돌아갈 거야!”

그제야 오스틴이 짧게 코웃음 치며 빈정거렸다.

“프레세리아? 어디서 지내게? 갈 곳은 있고?”

라페슈는 그의 어깨에 눌려 아픈 배를 애써 무시했다.

왜 다들 속이라도 들여다본 것처럼 그녀에게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입술을 깨무는 그녀에게 오스틴은 차가운 현실을 내뱉었다.

“셀레스테 자작가로 돌아가고 싶었다면, 글쎄. 멸문했다는 걸 알려줘야겠군. 혹여나 셀레스테의 이름을 쓸 생각은 말아야 할 거야. 네 가족은 반역죄로 처형됐으니까.”

“뭐, 뭐라고요?”

“반역죄로 처형됐다고. 부자들이 나란히 성벽에 목이 매달렸지.”

세상에.

눈앞이 아찔했다. 그 사람들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지만, 아니 오라비들을 생각하면 짜증이 날 정도였지만 죽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디로 갈 거냐니까?”

다그치는 소리에 악에 받친 라페슈의 발버둥이 조금 더 거세졌다.

“왜 그걸 물어봐요? 당신하고 무슨 상관인데! 나한테 거짓말이나 했으면서! 자작가도 당신이 망친 거지?!”

“그렇다면 어쩔 건데.”

“…뭐요?”

“어차피 자작가로 돌아갈 생각도 없었으면서. 싫어했잖아. 신분 높은 사내나 낚아 오라는 오라비들한테 신물이 나지 않았던가?”

“…….”

거꾸로 짊어진 자세 때문인지 머리에 피가 쏠린 라페슈는 눈앞이 어질어질해서 도저히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시야를 확보하려고 아등바등하는 사이 오스틴의 등에 묻은 피가 보였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셀레스테 자작가가 반역죄로 멸문했고, 그렇게 망친 사람이 오스틴이라면 그가 바로 반역자라는 뜻이었다.

실패한 반역자.

‘내가 대체… 누구 손을 잡은 거야.’

또다시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허억…….”

점점 더 숨 쉬기가 힘들어 입을 크게 벌렸지만, 효과는 없었고 결국 눈앞이 까맣게 꺼져버렸다.

몇 초, 혹은 몇 시간 후일까.

갑작스럽게 주위가 서늘해지면서 깜빡 정신을 잃었던 라페슈도 천천히 눈을 떴다.

동시에 지긋지긋하기만 한 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우엑. 최악이야.”

진절머리를 치자 오스틴도 그녀의 정신이 돌아온 것을 깨닫고 피식 웃었다.

“라페슈 양, 내가 알려주지. 그대가 있어야 할 곳을.”

그게 어디냐고 물어볼 틈도 없이 오스틴은 라페슈를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짐짝 취급이었다.

다행히 온 사방이 풀 천지라 라페슈는 푹신하게 안착할 수 있었지만 기분이 더러운 건 여전했다.

“거기가 네 자리야.”

“나더러 이 풀로 옷이라도 지으라는 거야?”

백조 왕자에 나오는 막내 공주도 아니고.

하지만 신경질도 거기까지였다. 라페슈가 앉은 자리 주변으로 웬 빛이 번쩍거리더니 복잡한 문양들이 차례로 그려지듯이 드러났다.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흡인력이 그녀를 덮쳤다.

“꺅!”

명상의 방에 있을 때는 긴가민가할 정도였다면 지금은 진공청소기 안으로 빨려드는 것만 같았다.

라페슈는 정확히 무엇을 빼앗기는지 모르면서도 본능적인 공포감에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싫어!”

그러나 오스틴은 허공에 대고 팔을 허우적거리는 라페슈를 보면서도 감정 없는 사람처럼 말했다.

“돼.”

무표정했지만, 라페슈에게만큼은 보였다. 사실 오스틴의 눈동자, 그 안에는 웃음이 넘치고 있었다.

“네 마력은 내가 잘 쓰도록 하지. 물론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 말을 듣자 라페슈의 내부에서 지금까지 그녀를 지탱하던 뭔가가 부러지는 것만 같았다.

‘왜 내 주위에는 이런 인간들뿐일까.’

피죽도 못 먹게 가난한 주제에 유서 깊은 가문이라는 자긍심밖에 없던 템페스트 남작도.

감옥에 갇힌 채 죽었다더니 이번에는 반역죄로 사형당했다는 셀레스테 자작도, 그녀를 결혼시키려던 오라비들도.

무엇보다 오스틴 로콰이트. 이런 인간을 믿고 잠시나마 설레기까지 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가느다란 손가락 아래에서 요시초가 짓이겨져 푸른 물을 흘렸다.

“…그때.”

그것이 마치 피 같다고 생각하며 라페슈는 말을 이었다. 목구멍이 말라붙어 흘러나오는 소리도 엉망으로 갈라졌지만 미처 자각하지도 못했다.

“그때, 나한테 공감한다고 했던 것도 거짓말이지.”

‘나도 그랬어요. 삶이라는 게 참 복잡하지요?’

그 다정한 말에 그만 넘어가 버렸다. 외로웠으니까.

라페슈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금방 사랑에 빠지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그때만큼은 정말로… 그녀에게 공감하고 위로해 주는 이의 한마디가 절실했다.

“나쁜 자식… 내가 뭘 잘못했다고.”

“과도하게 순진한 것도 잘못이지.”

흠, 하는 소리와 함께 어느덧 사방을 빼곡하게 메운 문양을 둘러본 오스틴이 피식 웃었다.

“그대의 경우에는 멍청할 정도였고.”

“사람이… 언제든 사람을 이용할 마음을 먹은 채로 살아야 해?”

“그걸 안 하니까 너희가 버러지처럼 사는 거야.”

“버러지?”

하.

하하.

라페슈는 천천히 어깨를 들썩거렸다. 사방이 온통 풀로 가득해서 그런지 눈앞이 초록색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미개하게, 이따위 신분제가 좋다고 사는 주제에, 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나더러 버러지?”

오스틴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지금까지 라페슈가 보였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였다.

“황족이랍시고 사람들이 무슨 물을 어떻게 길어 마시는지도 모르면서. 하수 처리장도 지을 줄 모르면서. 그런 주제에 나더러 버러지?”

원래대로라면 빙의자인 그녀가 높은 위치에 올라 이 세계를 바꿔나가야 했다. 자세히 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더 좋게. 주인공이니까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라페슈는 그 사실을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재벌가의 늦둥이 고명딸로 태어나 사랑받기만 했던 그녀에게는, 세상이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법칙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럴 수 없는 세계 따위는…….

“그냥 이대로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

어딘지 공허한 울림이 느껴지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벽면을 환하게 메우던 문양들이 일시에 빛을 잃었다.

계획이 틀어지고 있었다. 이를 악문 오스틴이 독기 가득한 눈으로 라페슈를 돌아보았다.

“무슨……!”

그러나 그다음 말은 눈이 멀 정도로 어마어마한 빛이 잡아먹어 버렸다.

그리고 몇 초 후, 전율이 끼칠 정도의 고요함이 깨지며 주위의 것들을 모조리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사방에 가득한 요시초, 석재 타일, 자연의 힘까지도.

마력의 폭주.

라페슈의 안에 실낱처럼 남아 있던 마력이 그녀의 절망적인 감정에 반응해 주변에 존재하는 힘을 모조리 끌어당기고 있었다.

테마리를 비롯해 바깥에 있던 신도들은 중앙 건물의 지붕을 통째로 날려버리는 빛을 보고 경이에 차 그 자리에 엎드려서 절을 올렸다.

하지만 그 안에는 신이 없었다.

깊이 침잠한 라페슈와 시한폭탄처럼 언제든 터질 수 있는 힘만 존재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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