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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123)화 (123/130)

123화

치트룸의 수도를 감싼 성문 안으로 들어가려면 우선 변장이 필수였다.

치트룸에 드나드는 프레세리아인이라고는 소수의 상인이 전부였으므로.

그래서 우리는 에사디엔이 입은 것처럼 딱 눈만 내놓는 옷을 입고 각자 커다란 짐을 등에 졌다. 강도를 당해 낙타를 모두 잃고 겨우 빠져나온 상인들이라는 설정이었다.

의외로 치트룸어에 능통한 에사디엔이 뭐라 뭐라 길게 이야기하고 나자 경비병이 안쓰러워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안쪽으로 손짓했다.

‘오오. 치트룸 말은 또 언제 배웠대?’

에사디엔한테만 보이게 몰래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자 푸른 눈이 곱게 휘었다.

그리고 차례를 기다려 천천히 문 안쪽으로 들어가던 중이었다.

[어이, 거기!]

아까 에사디엔과 말했던 사람이 아닌 다른 경비병이 험악한 얼굴로 우리 일행을 가리켰다.

‘왜 저러지?’

말뜻은 몰랐지만 표정과 어조로 뭔가 어긋났음을 알 수가 있었다.

[무슨 일이신지.]

에사디엔이 서둘러 나섰지만 경비병은 이미 칼을 빼 든 상태였고, 그 끝은 정확히 나를 가리켰다.

[거기 너! 줄 밖으로 나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나 때문에 우리 일행을 막은 듯했다. 나는 에사디엔의 손을 단단히 붙들고 경비병 앞으로 나갔다.

그러자 그는 아무 말 없이 내 얼굴 가리개를 확 벗겨버렸다.

“……!”

구불거리는 연분홍색 머리카락이 쏟아지자 사방에서 시선이 집중됐다. 사교계에 들어섰을 때보다도 더 노골적인 눈빛에 동물원 한가운데 선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이 나를 구경하건, 내가 부끄러워하건 경비병은 신경 쓰지 않고 치트룸 말을 하는 에사디엔에게 쏘아붙였다.

[전부 상인들이라고 하지 않았나? 저 얼굴로 상인이라고? 노예가 아니라? 인장이 없는 걸 보니 안에서 팔아 치우려는 것인가 보군.]

나는 깜짝 놀라서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치트룸어를 잘하는 건 아니었지만 ‘노예’라는 단어쯤은 알아들을 수 있다.

‘노예? 노예… 팔다?’

치트룸은 노예제를 인정하지만, 수도 안에서는 절대로 거래할 수 없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에사디엔은 불쾌한 듯 눈썹 사이를 좁히며 단호한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다시 한번 ‘노예’라는 단어가 들렸다.

[노예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요.]

[그렇다면 상인 패를 보여라.]

[방금 다른 경비병에게 보였…….]

[당신 것 말고! 모든 상인은 자신의 상인 패를 지니도록 정해져 있지 않나!]

불안한 마음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나는 입술을 깨무는 에사디엔을 보고 깨달았다.

‘망했구나.’

그러면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안에 아예 들어가지 못하는 건가.

‘밤에 몰래 숨어들어야 하나…….’

하지만 그 정도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경비병들이 붉게 칠한 포승줄을 꺼내 든 것이다.

‘망해도 그냥 망한 게 아니구나!’

이대로 감옥에 갇히기라도 하면 어쩐다. 오스틴이 반역자가 되면서 자동으로 대사 자리는 공석이 되었을 텐데!

“…….”

에사디엔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는 단 한 걸음 움직인 것만으로 나를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우리 기사들도 조금씩 앞으로 나오며 뒤에서 그와 나를 둘러싸는 듯한 대형을 만들자 순식간에 공기가 긴장감으로 가득해졌다.

그때였다.

[잠시만 기다려주겠어요?]

대치한 두 무리 사이를 유유히 비집고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의 옷을 본 라망드와 나는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놀라 서로를 마주 보았다.

“사제복!”

“플렌드나 님의 문양이야.”

여기에도 플렌드나 신전이 있을 줄이야.

아니,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치트룸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신을 믿는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온화한 미소를 띤 사제가 험악했던 경비병과 몇 마디 대화하자 놀라울 정도로 그들의 분위기가 풀어졌다.

끝내는 그가 사제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모습까지 보자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라망드가 내 턱을 잡고 올리는 바람에 금방 닫았지만.

“체통 좀.”

“그래… 이번엔 네 말이 맞아.”

갑자기 프레세리아의 플렌드나 신전 전체를 대표하게 된 듯해 허리를 빳빳이 세웠다.

그런 내게 사제가 웃으며 인사했다.

“그쪽이 미뉴엘 님?”

상당히 어색한 억양이 섞여 있었지만 프레세리아어다.

“사도님께서 급히 연락을 취해 주셔서, 운 좋게 때를 맞췄네요. 아샤 플렌드나 대사제입니다.”

게다가 대사제라니. 나는 놀라움과 반가움, 무엇보다도 감사함을 동시에 느끼며 예를 표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다 같은 플렌드나 님의 자녀인데 당연히 도와야지요.”

천사다. 천사가 나타났다.

아샤 대사제는 라망드에게도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당신이 라망드 사제로군요. 서멘더에서는 당신을 다음 대사제로 점찍었다고 들었어요.”

“감사합니다만 아직 그런 말씀을 듣기에는 부족합니다.”

“어머. 겸손하셔라.”

“그런데 대사제님, 뭐라고 하셨기에 경비병들이 물러난 건가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묻자 그녀는 한층 목소리를 낮춰 답했다.

“사도님께서 부탁한 수련 사제인데 상인들과 함께 사고에 휘말렸다고 했지요.”

“아하.”

수련 사제는 신성력을 발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으므로 딱 좋은 변명감이었다.

게다가 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서멘더의 신전에서 수련 사제처럼 지냈으므로 딱히 거짓말도 아니었다.

“자, 그럼 이쪽으로.”

아샤 대사제의 배려 깊은 인도에 따라 우리는 다시 평범한 상인인 척 안으로 들어가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 수 있었다.

“사실, 아까는 제 덕분에 살았다고 하셨지만 알고 보면 저희 쪽이 미뉴엘 님의 도움을 받는 거랍니다.”

“네? 제 도움을요?”

내가 낸 헌금이 치트룸에까지 전달되는 건가?

순간적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샤 대사제는 예상과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자칭 ‘불의 전사’라고 하는 자들은 매우 거칠답니다. 다른 신전에 난입해서 기물을 부수고 신도들을 폭행하기도 하지만, 왕실에서 대놓고 비호하는 바람에 당당히 나서서 맞설 수 있는 신전이 없었어요.”

“저런. 고생이 정말 많으셨겠어요.”

그 정도면 신자라기보다 폭력 집단 아닌가? 싶었지만, 그간 겪었던 몇몇 광신도를 떠올리니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놈들은 이성이 없지, 참…….’

우리는 점점 불의 신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샤 대사제가 말해 주지 않아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자연력, 혹은 정령력이라고 부르는 힘의 기운이 조금씩 짙어지고 있었으니까.

정령식으로 표현하자면 ‘맛있는 냄새’쯤 되려나.

“저곳이 그들의 본거지예요. 모래 신의 옛 사원에 새로 담장을 증축했지요.”

입구가 조그맣게 보일 정도의 거리에서 아샤 대사제는 걸음을 멈췄다.

“저들은 제 얼굴을 알아서, 제가 함께 가면 들어가기도 전에 공격받을 겁니다.”

다른 신의 자식, 그것도 대사제나 되는 고위급을 서슴지 않고 공격하다니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웠다.

“신전으로 돌아가는 길은 괜찮으시겠어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성기사들이 뒤에서 지켜주고 있답니다.”

그렇게 말한 아샤 대사제는 얼굴에서 미소를 지운 채 허리를 깊게 숙였다.

“대, 대사제님?”

“신도들을 지키지 못한 자로서 부끄럽지만, 치트룸의 사제들을 대표해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전력을 다할 생각이었지만, 그래야만 할 이유가 또 한 가지 얹어졌다.

그녀가 떠나고 나는 일행들을 둘러보았다.

“맨날 위험한 데만 몰고 다녀서 미안해.”

내 말에 기사들이 다 같이 웃었다.

“카르이넨 기사단원이라면 몬스터도 18대 1로 너끈하게 상대합니다, 아가씨!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어이구. 18대 1의 전설은 어느 세계에나 있는 건가.

진지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나도 그만 풋 하고 웃어버렸다.

“그래. 전술이라면 그대들이 더 잘 알 테니까, 나는 이것만 말할게.”

잠시 말을 끊자 모두 숨을 죽이며 내게 집중했다.

“놈들이 쓰는 힘은 내가 선두에서 무력화한다. 그러니까 그대들은 절대로 죽지 마. 중간에 그룹이 나눠지더라도 어떻게든 살아남아. 알겠어?”

또다시 추모식을, 장례식을 주관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내 바람은 이것 하나뿐이다.

개비부터 기사들까지 누구 한 명 빠지지 않고 멀쩡히 집으로 돌아가는 것.

나는 그 바람을 담아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내 손 위로 에사디엔과 클리데인, 라망드, 기사들의 손이 차곡차곡 쌓였고, 마지막으로 내 손 밑에 개비의 손이 쏙 들어왔다.

“하하.”

작은 웃음이 한 바퀴 돌았다. 우리는 웃는 얼굴 그대로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묵묵히 손을 아래로 힘껏 내렸다.

“가자, 개비!”

- 가! 보! 자! 고!

아니,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워서는.

맛있는 냄새에 잔뜩 흥분한 개비는 신이 나서 날아갔다. 그 뒤를 내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거침없이 따라 걸었다.

힘을 흡수할 때도 소리가 난다면 콰콰콰, 하는 폭포 소리가 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개비에게 빨려 들어가는 힘이 어마어마했다.

- 도망간 고기 한 접시가 열 접시로 불어나 있다고 생각해 봐. 신이 나나, 안 나나.

“접시에 발이 달렸나. 아무튼 대충 이해했어.”

- 너도 나도 오늘은 힘을 마음껏 써도 되겠어!

힘찬 개비의 손짓에 우리를 향해 날아오던 화살들이 허공에서 모두 재로 변해 흩날렸다.

상대가 놀란 사이에 나는 거대한 불덩어리를 연달아 날려 보내며 굳게 닫힌 문을 녹여버렸다.

땡땡땡땡!

다급하게 종 치는 소리가 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불의 전사라는 광신도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별로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대부분은 내 힘으로 날려버렸고, 그 사이를 뚫고 다가오는 자는 곁에 붙은 에사디엔이 순식간에 처리했으니까.

‘게임에서 마나 제한 없이 마법을 쓰는 것 같네.’

자연의 힘이 온통 가득한 곳에서 싸운다는 건 그런 느낌이었다. 오스틴을 상대할 때처럼 힘이 부족해서 허덕일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깽판 치려고 들어온 곳이라는 이유도 더해져, 개비와 나는 뭐가 부서지건 말건 고려할 것 없이 마음껏 날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즐거움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울―렁.

어느 순간, 공기가 점성을 띤 액체에 파문이 일듯이 꿀렁거렸다.

에사디엔이나 기사들이 멈칫하지 않는 걸 보면 공기가 아닌 다른 것이라는 뜻인데.

- 정령력이야. 우리가 너무 빨아들여서 잠시 힘의 공백이 생겼나 봐.

개비의 시선이 단층 건물들 사이에 홀로 선 삼 층짜리 건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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