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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124)화 (124/130)

124화

우리가 오기 전에 폭발하기라도 했는지 천장이 날아갔지만, 개비와 내 눈에는 주위에 짙게 몰린 힘이 마치 안개처럼 위를 덮은 것이 보였다.

“저기가 중심지인가 보다.”

그런데 나와 달리 개비에게는 또 다른 힘의 결도 보이는 듯했다.

- 응. 뭔가 마력이 섞인 것 같기는 하지만.

“마력?”

- 이놈들은 전혀 마법을 쓰지 않던데……. 아무튼 그만 놀고 저기로 가자.

“그래. 일단 가보면 알겠지.”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에사디엔이 재빨리 기사들에게 휘파람으로 신호를 보냈다.

“휘익!”

내가 모르는 약속이 되어 있었던지 잠시 한자리에 머물러 있던 일행들이 하나로 뭉친 공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아챈 불의 전사들은 몸을 던져가며 더더욱 격렬하게 공격해 왔지만, 애초에 그들과 우리의 힘의 격차가 너무 컸다.

“저 사람들은 이 힘을 끌어다 쓰지 못하는 모양인데?”

- 정령사의 재목이 아닌데도 억지로 힘을 주입해 만든 것이니 그렇지. 저런 자들은 처음에 받은 힘이 떨어지면 보통 사람으로 돌아가.

그 허탈함이 어느 정도일지 상상할 수 있었던 나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면 결국 요시초 가루를 들이붓다가 인간도 식물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릴 것이다.

“미뉴엘, 저와 기사들은 바깥에서 저들의 진입을 차단하겠습니다.”

에사디엔이 조용히 의견을 전해 왔지만, 개비가 바로 반대했다.

- 아니야, 함께 들어가도록 해. 저들이 정령의 힘으로 공격하면 너희를 보호할 수단이 없어.

“하나 혹여 저희가 돌파당하기라도 하면…….”

- 괜찮다. 이렇게 힘이 충만할 때는 나도 다른 정령의 힘을 조금은 빌려 쓸 수 있거든.

무슨 말인지 궁금했지만 나는 일단 불기둥을 넓게 뿌려 아등바등 달려드는 적들을 물러서게 했다.

물론 진짜로 미쳐서 몸이 타든 말든 개의치 않고 달려드는 광신도도 있었지만 끝까지 내 곁에 남은 에사디엔의 칼에 바로 목숨을 잃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에사디엔과 나까지 안으로 들어서고 나자 개비가 바닥을 강하게 밟았다.

- 합!

짧은 기합 소리와 함께 주변의 기운이 개비를 둘러싸고 소용돌이치다가 어느 순간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드드드드, 하고 지진이 난 듯 땅이 흔들리며 방금 우리가 들어온 문 앞으로 덮치듯 솟아올랐다.

“우와…….”

잠시 감탄하던 내가 개비에게 물었다.

“그러면 이따가 우리는 어떻게 나가?”

- …….

이 녀석, 다음 일은 생각을 안 했구나.

- 아, 아니거든! 어차피 일이 끝나고 나면 다 무너질 텐데!

팩, 하고 앵돌아진 녀석이 귀띔도 없이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따라 포르르 날아갔다.

“하여간 애가 따로 없다니까.”

그 뒤를 따라가며 중얼거리자 호통이 들려왔다.

- 다 들린… 으악!

중간에 뚝 끊겨버렸지만.

“뭐야, 왜 그래?”

깜짝 놀란 나는 재게 발을 놀려 계단을 한 번에 서너 칸씩 뛰어 내려갔다. 그런 와중에도 에사디엔은 내 옆에 꼭 붙어 넘어지지 않도록 손을 잡아주었다.

그렇게 내게 온 신경을 쏟던 그는 제단 앞에 서서 개비를 한 손에 쥔 사람을 발견하자 다정함을 모조리 날려버리고 험악한 기세를 뿜어냈다.

“오스틴!”

솔직히 나는 에사디엔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저걸 보고 놀라지도 않네.’

오스틴의 모습은 정상이 아니었다.

로콰이트 황가 특유의 금발은 이미 빛을 잃었고, 한쪽 눈은 아예 사라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끔찍한 것은, 파스스 흩어지려는 모래를 보이지 않는 힘이 억지로 붙이는 것처럼 그의 모습이 희미해졌다가 다시 선명해지기를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기괴한 모습으로도 오스틴은 안부 인사라도 하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건넸다.

“또 만났군. 질긴 인연이야.”

저놈이 어떻게 개비를 만질 수 있는 거지?

나는 불안함을 티 내지 않으려 최대한 냉정하게 이죽거렸다.

“인연은 무슨. 징그러운 악연이지.”

“여전히 입이 매섭군.”

“반역자가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어느 틈에 모래의 신한테 세례라도 받은 거야?”

“하, 세례라.”

이유 모를 씁쓸함이 배인 탄식이었지만 나는 굳이 묻지 않았다. 그런 나를 감싸며 에사디엔이 명령했다.

“정령을 놓도록, 오스틴.”

“싫은데.”

오스틴은 반대쪽 손으로 돌 제단 위를 탁탁 두들겼다.

“정령을 이 제단에 바치고 더한 힘을 얻겠어.”

거참 원대한 계획이기는 한데.

개비한테는 녀석의 집을 달팽이처럼 이고 다녀주는 내가 있는 것이 오점이었다.

나는 에사디엔에게만 들리도록 거의 입술을 움직이지 않은 채 속삭였다.

“개비가 놈한테서 잠깐 떨어지게만 해주세요.”

그러면 개비는 곧바로 정령석 안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아래층으로 내려갈 겁니까?”

에사디엔의 질문에 나는 잠시 힘의 위치를 가늠해 보고 끄덕였다.

“네.”

“다녀오시는 동안 저는 이번에야말로 오스틴을 처리하겠습니다.”

몸도 성치 않은 에사디엔에게 이미 반쯤 인간의 범위를 벗어난 듯한 오스틴을 맡겨야 한다니.

걱정이 치솟은 탓에 나는 그의 손가락 하나를 꼭 쥐었다.

“제 걱정은 마십시오. 기사들이 저를 받쳐줄 것이고, 라망드 사제도 있으니까요.”

하지 말란다고 멈출 수가 있으면 그게 걱정인가.

여전히 어두운 표정의 내게 에사디엔이 익숙한 말을 건넸다.

“빨리 해치우고 오십시오. 다치지 마시고요.”

나는 그만 웃어버리고 그의 손을 놓아주었다.

“응. 사랑해요.”

덩달아 짧게 웃은 에사디엔이었지만, 돌아서는 순간 그의 얼굴은 냉정하게 가라앉았다.

그가 오스틴에게 달려들자 기사들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완벽한 타이밍으로 뒤에 따라붙었다.

마치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면서 차례로 오스틴을 공격하는 움직임이 몇 번이고 합을 맞춘 사람들 같았다.

‘카르이넨의 검을 쥐고 싶다더니…….’

이 정도면 어머니나 언니도 허락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조마조마함이 동시에 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검 세 자루가 오스틴을 동시에 관통하며, 드디어 그의 손에서 개비가 떨어졌다.

정령석으로 녀석이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아래층으로 뻗은 계단으로 달려가던 나는 라망드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해.’

‘잘 다녀와.’

말을 하지 않아도 그런 뜻이라는 걸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개비를 놓친 오스틴은 악에 받쳐 이를 갈았다.

“해보자 이거지.”

음산한 중얼거림과 함께 그의 등 뒤로 돌풍이 일었다.

‘조금이라도 내가 도와야 하는 건 아닐까.’

멈칫, 멈춰 선 내게 개비가 단호하게 말했다.

- 정신 차려. 우리 몫은 아래에 있어.

“…….”

나는 이를 악물며 다시 발을 뗐다. 뒤에 남은 사람들을 믿어야만 했다.

* * *

오스틴이 있던 층과 달리 지하 2층은 심할 정도로 어두웠다.

뿐만 아니라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더 공기가 차가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리 지하는 서늘하다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거의 북부의 겨울과도 비슷할 정도였으니까.

화르르!

짙은 어둠 때문에 불을 일으켜도 딱 발아래까지만 빛이 닿았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해도 해도 이상하네.’

그렇게 생각하며 마지막 계단을 밟은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빛을 잡아먹은 것을 내뱉는 것처럼 사위가 갑자기 밝아졌다.

“……?”

반사적으로 올렸던 팔을 내리고 보니 주변은 설국이었다.

“아니. 잠깐만? 지하로 내려왔는데?”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온 것도 아니고 그냥 계단을 밟아 내려왔을 뿐인데.

더군다나 조금 전까지 내가 있던 곳은 무더운 사막 국가, 치트룸이었는걸.

당황해서 주변을 휘휘 둘러보자 희끄무레한 땅과 하늘의 경계가 비로소 잡히고, 평평한 설원이라고만 생각했던 땅에도 높낮이가 생겼다.

그리고 저 앞에 웬 산장 한 채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갑자기 웬 산장? 주변엔 아무것도 없는데?”

투덜거리면서도 나는 홀린 듯이 산장으로 다가갔다.

창문 안쪽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웃으며 유쾌하게 떠들고 있었다.

‘저 브랜드는!’

북쪽 얼굴. 국가 지리학. 검은 야크…….

나는 그들의 생김새며 눈에 익은 브랜드를 보고 탄식과 함께 뻑뻑한 눈을 문질렀다.

누가 보여주는 것인지는 몰라도, 이 사람들의 모습은 현실이 아니었다.

“하아.”

한숨과 함께 산장에서 조금 물러서자 저 먼 곳에서부터 눈 무더기가 쏟아져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산 하나가 통째로 굴러오는 것처럼 거대한 눈사태였다.

이미 땅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는데, 산장 안에 있는 사람들은 즐기느라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아무리 현실이 아니라지만 곧 닥칠 안타까운 장면에 입을 막으려던 차였다.

“안 돼! 도망쳐! 제발 나오란 말이야!”

“라페슈?”

너는 또 왜 여기서 나와?

하지만 그녀는 내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창문에 매달려서 피를 토하듯이 외쳤다.

“도망쳐! 도망쳐! 그러다 죽는단 말이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것처럼 눈이 산장을 삼키듯 덮쳤다.

“윽.”

끔찍한 광경에 나도 모르게 다시 한번 팔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역시 몇 초가 흘러도 아무런 느낌은 없었고, 팔을 내렸을 때는 산장은 흔적조차 없어졌다.

어쩌면 아래 산장이 묻혔을지도 모를 눈밭 위에서 라페슈는 잔뜩 웅크린 자세로 덜덜 떨고 있었다.

- 이 아이도 다른 세계에서 온 모양이다.

다시 내 곁으로 현신한 개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런가 봐.”

그것도 나와 같은 세계.

내가 마지막 순간의 기억 때문에 불을 무서워했던 것처럼, 라페슈도 눈사태로 사망했기 때문에 추운 날씨를 싫어했던 것이었다.

나는 그것도 모른 채 실내에서도 두꺼운 겉옷을 입었다고 빈정거렸다.

빙의자라서 나와 친해지려고 한 건데, 그것도 모르고 덮어놓고 피하기만 했다.

나는 라페슈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옆에 서자 비로소 그녀가 중얼거리는 말이 들렸다.

“추워, 추워…….”

그 모습이 애처로워서 앙상한 어깨를 살짝 짚고 온기를 흘려 넣어주었다. 그제야 라페슈는 내 존재를 인식하고 올려다보았다.

“이런 데 있지 말고 따뜻한 곳으로 나가자.”

“따뜻한… 곳?”

“응. 저 불빛을 따라가면 돼.”

나는 어느새 허공에 동동 뜬 횃불 모양으로 변한 개비를 가리키며 조곤조곤 말했다.

이어서 라페슈도 녀석을 발견하고는 낯빛이 확 밝아졌다.

아직 혈색이 돌아오지 않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고,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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