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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125)화 (125/130)

125화

눈을 떴을 때, 나는 라페슈의 어깨를 꼭 붙든 채 그녀와 함께 누워 있었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 주위를 둘러싼 힘이 너무도 불안정하게 일렁였기 때문에.

“우으… 뭐야, 여기? 사방이 요시초로 가득하잖아.”

개비가 침울한 목소리를 발했다.

- 요시초를 이용해서 불의 힘을 쓰다가 나중에는 저 아이의 마력을 섞어서 더욱 증폭한 모양이야.

개비는 내가 깨어나기 전부터 힘을 흡수하고 있었는지 이미 빵빵하게 불어난 모습이었다.

- 소화하기 힘들어……. 하여간 인간들의 욕심이란!

욕심은 동물이라면 다 가진 거지만 잔뜩 화나고 힘든 개비에게 기름을 부을 필요는 없었다.

나는 거의 절반은 뜯겨나간 요시초들이며 엉망으로 깨져나간 돌조각의 잔해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이렇게 불안정한 거였구나.”

잘못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됐다. 위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을 일행 중 한 명도 죽는 사람 없이 함께 귀환해야만 했다.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최대한 조심조심 힘을 골라 흡수하는 작업에 막 들어갔을 때였다.

“음…….”

멍한 표정의 라페슈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셀레스테 양? 가만히 있어요.”

뭔가를 찾는 것처럼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내 목소리에 비로소 이쪽으로 완전히 고개를 돌렸다.

“내가 주인공인데. 너는 악녀면서 왜 사랑받아?”

“…뭐라고요?”

초점 없는 눈으로 말하는 모습이 오싹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너만 없으면 되는데.”

거 말이 너무 심한 것 아니오?

솔직히 조금 충격 받았지만, 곧 수습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정신 차려요.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아니! 네가 없으면 내가 다시 주인공이 될 거야!”

갑자기 쟤가 왜 저래.

너무 급발진이라 이상하다 싶은 와중, 끝으로 갈수록 라페슈의 목소리에 쉰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뭔가 다른 존재가 그녀의 입을 빌려 말하는 것처럼.

‘이곳을 가득 메운 에너지인지, 아니면 또 다른 존재인지.’

또다시 오싹한 생각이 떠오르자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현실에 집중했다.

앞에는 상태가 이상해진 라페슈, 뒤에는 과식으로 괴로워하는 개비. 난장판이었다.

“개비, 너는 차라리 정령석 안으로 들어가서 네 세계를 확장하는 게 낫겠어.”

넘치는 힘을 처리하려면 성대한 대폭발을 일으키지 않는 이상 그 방법이 최선이었다.

- …좋아.

개비의 모습이 사라지고 팽만해진 힘이 쑥 빨려나가자 그제야 압력이 덜어지며 숨통이 트였다.

하지만 내가 숨을 몰아쉬자마자 라페슈의 몸이 나를 덮쳤다.

“돌려줘! 내 자리를 돌려줘!”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어서 금방 밀어냈지만 안도감보다 짜증이 먼저 찾아왔다.

“너 정말 미쳤니? 주인공이고 아니고, 그런 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해?”

와다다 쏘아붙여 놓고 불쑥 후회가 되었다.

‘얘는 지금 정상이 아니지.’

성질을 내도 알아듣는 사람한테 내야 의미가 있는 거다.

나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쉰 뒤 다시 작업에 들어갔다.

“일단 쉬고 있어요. 여기서 나간 뒤에 얘기하죠.”

“넌 몰라. 중심에 서지 못하는 사람의 기분을 몰라!”

이번에는 겹쳐진 쉰 소리 없이 오롯이 라페슈의 목소리만 들렸다. 정말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아.”

나는 요시초에서 계속해서 뿜어져 나오는 정령력을 정령석 안으로 꾸준히 밀어 넣으며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우리가 발 딛고 숨 쉬는 곳이 현실이랬어요. 그러니까 여기를 상상의 공간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개비에게 들었던 말을 전하며 라페슈가 정해진 역할에 대한 미련을 버리길 바랐다. 진심으로.

‘역할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자칫하다가는 강박에 시달리기 딱 좋은데, 그러면서도 주인공 자리를 지키려고 한다면… 과연 어떨까.’

라페슈가 딱 그런 케이스였다.

있는 대로 발버둥 쳤는데 그저 일이 잘 풀리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하니 같은 빙의자로서 연민이 솟아났다.

“현실에는 주인공도, 악녀도 없는 거잖아요. 그냥 각자 자리에서 살아가는 거… 억!”

짜악!

손바닥이 얼굴을 매섭게 후려치는 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허.”

나는 얼얼한 뺨을 문질렀다. 이제 이 세상에서 내 얼굴을 때린 사람은 두 명이 되었다. 오스틴과 라페슈!

아프기도 하고 어이도 없었다.

“아까는 힘이 하나도 없는 것 같더니. 시늉이었어?”

“닥쳐. 급도 안 되는 게.”

순간적으로 아픔이 멀어지고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급? 한우도 아니고, 사람한테 ‘급’?

“정말 안 맞는 사람하고는 끝까지 안 맞는구나.”

같은 빙의자인 처지에 그녀의 마음도 이해 못 하고 밀어낸 데 대한 미안함이 한순간에 싹 사라졌다.

그러나 개인적인 감정보다 더 급한 일은 따로 있었다.

개비가 나를 흔들 기세로 다급히 말했다.

- 미뉴엘, 마력이 저 여자애를 중심으로 모이고 있어. 이대로라면 남은 자연력까지 모두 합쳐져서 정말 큰일이 날 거야.

“폭발하면 어느 정도인데?”

여차하면 위층에 있는 일행들만 데리고 튈 생각으로 물었는데,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답이 돌아왔다.

- 이 도시 하나는 지도에서 가뿐히 지워지겠지.

“허허.”

실소밖에 나오질 않았다.

“이런 일을 벌일 마력을 가졌으면서도 네가 주인공이 아니라고? 내 자리를 내놓으라고?”

물었지만 라페슈는 또 초점이 흐려진 채 입술만 달싹거리고 있었다.

이제는 마력을 감지하지 못하는 내게도 느껴질 정도로 흐름이 급격해졌다. 머리카락이며 옷자락이 강풍을 직격으로 맞은 것처럼 거세게 펄럭거렸다.

“아이, 진짜!”

나는 결국 탄식과 함께 라페슈를 밀쳐내고 흐름의 중심에 자리했다.

“아아악!”

비명이 절로 나올 정도로 마력이란 건 거칠었다.

- 야, 미뉴엘! 이 막무가내야!

개비가 덩달아서 지르는 비명도 함께 귓전을 어지럽혔다.

‘아, 뭐 그럼 다른 방법이 있나.’

“끄아아악!”

입으로는 착실히 비명을 지르면서도 나는 개비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너는 요시초에서 나오는 정령력이라도 처리해 줘! 아예 다 없애버리면 더 좋고.’

그리고 나도 비명만 지르면서 가만히 견디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이리저리 핀볼처럼 부딪치는, 전혀 통제되지 않는 마력을 이대로 뒀다간 대폭발 대신에 내 몸이 터져나갈 것 같았으니까.

‘젠장, 도와주세요! 플렌드나 님! 브라시다스 님!’

방법을 찾다가 급기야는 신과 대마법사를 찾기에 이르렀다.

두드리면 열린다고 하던가? 그러자 어떤 목소리가 선명하게 뇌리를 스쳤다. 신의 목소리는 아니고, 팔로스가 한 말이었다.

‘스승님이 그러시는데요, 마법은 마력을 정해진 길로 이끌기만 해도 반은 성공한 거랬어요.’

그러니까… 그 ‘정해진 길’이 대체 어떤 길이냐고!

그러는 사이에도 통증은 점점 심해져만 갔다. 너무 아파서 정말 엉엉 울기 직전이었다.

‘이게 폭발을 막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지연시킬 뿐인 걸까?’

오로지 고통뿐, 흐름에는 전혀 변화가 보이지 않아 허무해지려던 찰나. 실낱처럼 남은 이성이 속삭였다.

‘이렇게 파괴적인 힘이 내 안에 들어온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잖아.’

그래, 그랬다.

깨달음의 순간, 내 안을 누비던 불길의 경로는 아직도 생생하게 몸 구석구석에 새겨져 있었다.

이대로라면 밑져야 본전이었다.

나는 눈을 꾹 감고 떠오른 방법을 곧바로 시도했다.

* * *

어느 쪽이 우세하냐고 한다면, 오스틴이 아니라 이쪽이었다.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는.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며 서로의 빈자리를 메우는 전법 덕분에 아무리 오스틴이 인간 같지 않아졌다지만 아슬아슬하게 이쪽이 우세한 상태.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스틴에게 상처를 입히고는 있지만 별 의미가 없었다.

스슷!

피가 튀는 건 잠시뿐이고, 흐르는 모래 위의 발자국이 금세 사라지듯 오스틴의 부상도 사라졌으므로.

‘소모전이다.’

에사디엔은 표정을 굳혔다. 이대로라면 먼저 지치는 쪽이 진다.

그의 마음을 읽은 듯 오스틴이 씩 웃으며 쇄도했다. 정확히 지난번 부상을 입혔던 그 자리였다.

“역시 네놈의 명줄은 질기구나, 에디.”

에사디엔은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무엇에 찔렸는지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오스틴의 손이 거대한 송곳처럼 변하며 회전했다.

역겨운 모습이었지만 에사디엔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잊은 모양이군. 당신을 쓰러뜨린 건 나였다.”

“사경을 헤맨 주제에 입만 살았군.”

“그렇다고 해도 사실은 변하지 않지.”

오스틴의 입매가 비틀렸다.

그의 손과 에사디엔의 검이 부딪치며 망치로 철을 때린 것 같은 소리가 퍼졌다.

카앙!

오스틴의 손속을 한 번 막자마자 검신에 금이 갔다.

카앙!

그리고 한 번 더. 두 번째에는 금이 간 부분을 중심으로 검의 절반이 날아갔다.

그때부터 오스틴은 신이 난 사람처럼 에사디엔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옛날처럼 애원해 보라고! 너 같은 더러운 피한테는 그게 어울려.”

더러운 피라니.

의미 모를 말에 에사디엔의 눈매가 움칫 조여들었다.

“온 사방이 버러지투성이지만 특히 그중에서 네놈이 제일 더럽지.”

극적인 효과를 노리는 것처럼 오스틴은 말을 잠시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폭탄을 터뜨렸다.

“남매 사이에서 나온 씨니… 오죽하겠나.”

쩡 소리가 날 것처럼 공기가 얼어붙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가장 침착한 사람은 당사자인 에사디엔이었다.

그는 도리어 그 말을 듣기 전보다 더 차분해진 상태로 말했다. 네가 그런 생각을 했는데 당시 귀족들은 어땠겠냐고 여기는 듯한 투였다.

“이미 지오나의 이름으로 공인을 받은바, 나는 폐하의 친자가 아니다.”

심판과 정의의 신의 이름을 듣고도 오스틴은 코웃음 쳤다.

“그따위 구슬은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지.”

말에서도 냄새가 난다면 이 순간 오스틴의 말에서는 희미하게 악취가 느껴졌을 것이다. 불신자의 냄새였다.

에사디엔은 짙은 피로와 함께 회의감을 느꼈다. 어머니로도 모자라 고작 이런 자에게 휩쓸려 인생을 허비하다니.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퍼즐 조각을 맞추는 것처럼 일의 선후 관계가 정리되고 있었다.

‘폐하께서 아무 거래도 없이 그 모욕을 가만히 감내했을 리 없으시다.’

어릴 적에는 몰랐으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랬다.

산도르 후작가가 황제의 거수기라는 조롱을 들으면서도 지금껏 숨을 죽이고 지낸 이유가 비로소 보였다.

‘그런 와중에도 어린아이에게 독을 불어넣었군.’

그러나 연민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차분하게 내리깐 눈길에 오스틴이 발작적으로 달려들었지만 에사디엔은 흔들리지 않았다.

“당신은 평생 이용당했군.”

프레세리아에서는 믿었던 외할아버지에게.

치트룸에서는 손을 잡았던 사도에게.

“나보다는 당신이 순진한 벌레에 걸맞은 것 아닌가?”

내친김에 도발까지 해버리자 오스틴의 눈이 시뻘게졌다.

또다시 그의 손이 기괴하게 변하며 달려들었으나, 그 순간 에사디엔은 자신의 검에 어떤 힘이 깃드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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