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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126)화 (126/130)

126화

검 자루를 단단히 말아 쥔 에사디엔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속도로 반 토막 남은 검을 휘둘렀다.

툭!

묵직한 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큭.”

그리고 처음으로 오스틴이 신음을 흘리며 물러섰다. 어깨를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먼지 같은 모래가 파스스 흩날렸다.

그의 팔이 재생될 것을 각오했던 에사디엔은 한숨을 삼키며 뒤쪽으로 흘긋 눈짓했다. 라망드가 지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날카로운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신성력이었군.’

거기에 더해 뭔가를 준비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에사디엔은 더는 못 쓰게 된 검을 버리고 여분의 검을 뽑았다. 검신이 휘어 있어서 취향이 아니었으나 어쩔 수 없다.

휘었으나 끝은 역시 뾰족하다. 그 검첨으로 오스틴을 가리킨 그가 판결을 내리는 지오나 신처럼 냉엄하게 말했다.

“당신은 이제 내게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될 수 없다.”

흔적만 희미하게 남은 흉터일 뿐.

오스틴은 이제 에사디엔에게 아무런 상처도 줄 수 없는 존재로 전락했다.

완전히 달라진 그의 마음가짐을 느끼고 오스틴이 이를 갈았다.

“네놈이… 감히 버러지 같은 입을 잘도……!”

“내가 정말 벌레라면 왜 그렇게 분노하는 것이지?”

“…뭐라?”

“벌 한 마리가 지나간다고 해서 괴롭히고, 또 괴롭히고, 끝까지 따라가 결국 죽이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에사디엔은 잊었다는 듯 덧붙였다.

“인간이라면.”

“…….”

“왜냐하면 인간이라면 벌레를 괴롭히기보다 다른 일을 하느라 바쁠 테니까.”

미뉴엘이 간혹 바닷빛이라고 일컫던 푸른 눈이 오스틴의 몰골을 훑었다.

“하긴 더는 인간이라고 보기 어려운 몰골이군.”

신성력으로 피해를 입다니, 마치 마계에서 올라온 몬스터 같지 않은가.

웃지는 않았지만 에사디엔은 명백하게 오스틴을 비웃고 있었다.

“나는 마법에는 문외한이지만, 한번 추측해 볼까.”

마력은 없으나 기사들은 자신의 검이 무언가를 가르고 들어갈 때 느껴지는 감각만큼은 확실히 기억한다.

에사디엔도 마찬가지였다.

황제를 구출하던 날, 오스틴의 몸통에 핵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지만 빗나갔다.

그러나 황성을 수복하던 날은 심장에 이어 무언가 돌 같은 것을 부수는 느낌이 선명했다.

“그것 때문에 정령을 파괴해서라도 흘러나가는 힘을 보충하려 한 것이겠지.”

더불어 생명을.

“하.”

짧게 웃은 오스틴의 눈이 번뜩였다.

“마음이 바뀌었다. 그래… 처음부터 네놈들을 모두 제단에 바쳐야 했다!”

포효와 함께 어깨에서 떼어낸 오스틴의 손이 기사들의 방향으로 쭉 그어졌다.

동시에 일어난 모래 섞인 바람에 기사들이 자세를 낮추면서도 뒤로 쭉 밀렸다.

그 빈틈을 오스틴은 놓치지 않았고, 기사 한 명을 포크로 꿰듯 길어진 손톱으로 찌르려던 순간.

“지금입니다!”

라망드의 외침이 자욱한 먼지바람 사이를 갈랐다.

에사디엔은 마치 그와 마음이 통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달려들고 있었다.

“칫.”

오스틴이 혀를 차며 에사디엔을 향해 다시 손을 쳐들었을 때였다.

“……!”

그의 발밑에 플렌드나의 문양이 나타나며 환하게 빛을 발했다.

“무슨 짓을!”

오스틴은 눈을 부릅뜨며 외쳤지만 몸은 이미 그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발이 땅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허리가 뻣뻣해졌다.

손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꽈득!

신성력이 어린 에사디엔의 검이 그의 왼쪽 가슴을 꿰뚫었다.

“…컥.”

침묵 끝에 오스틴의 입에서 모래와 섞여 진흙처럼 보이는 핏물이 터져 나왔다.

증오 어린 초록빛 눈과 무심한 푸른빛 눈이 엇갈렸다.

“미뉴엘을… 폐하를, 그리고 누님을 다치게 한 대가다.”

오스틴은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벌렸지만 에사디엔은 그대로 검을 횡으로 그었다.

쿵.

눈도 채 감지 못한 오스틴이 쓰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기사들이 숨을 몰아쉬며 지켜보는 가운데 플렌드나의 문양이 빛을 잃었다. 그리고 겨우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던 오스틴의 몸은 완전히 모래로 변했다.

사아아.

사막 한가운데에서 날 법한 소리와 함께 남은 흰 모래 위로 선명하게 금이 간 검붉은 보석이 하나 툭 떨어졌다.

* * *

미뉴엘이 무모한 도전에 몸을 맡겨버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개비는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저런 생각을 하다니 역시 내 계약자는 대단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하필이면 제가 불의 정령이라, 정령력이 미뉴엘의 몸을 누빌 때도 불 속성을 강하게 띠는 경로로 다녔다.

따라서 그 길을 따라 밟는 마력도 점점 뜨겁게 달궈지는 중이었다.

- 젠장! 마력의 열기는 나나 네가 어떻게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미뉴엘!

정령, 그것도 불의 정령의 계약자가 마력 때문에 한 줌 불티로 화해 사라진다면 망신도 그런 대망신이 없었다.

개비는 발만 동동 구르다 그대로 몸을 솟구쳤다.

지하 1층 바닥으로 머리를 빼꼼히 내밀고 보니 마침 오스틴이 쓰러진 후라 기사들이 여기저기 드러누워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라망드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데도 그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치료하느라 바빴고, 에사디엔은 지긋지긋한 오스틴이 또 살아 돌아올까 봐 검붉은 보석을 거의 가루로 만들며 확인 사살 중이었다.

- 여봐라, 엘!

“개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든 에사디엔이 정령만 혼자서 보이는 것에 미간을 찌푸렸다.

“미뉴엘은 괜찮습니까?”

개비는 긴말하지 않았다.

- 빨리 아래층으로 내려와. 너만!

지난번 물의 정령을 지키는 일족과 마주했던 개비는 확신했다.

‘엘한테서 느껴지는 기운은 분명히 물, 그것도 바다에 가까운 성질이야.’

미뉴엘에게 큰소리쳤듯, 힘이 충만하면 다른 정령의 힘을 조금은 끌어 쓸 수 있다.

그러나 상극인 물의 힘은 거의 다룰 수 없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엘 녀석이라면 내 모자란 힘을 대신해 어떻게든 미뉴엘을 살릴 수 있을 거야.’

아래로 먼저 내려와 보니 개비가 자리를 떴던 그 잠시 동안 미뉴엘은 더욱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득달같이 따라 내려온 에사디엔이 물었다.

걱정스러움과 미안함이 불쑥 솟았지만, 정령은 계약자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다룰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개비는 애써 감정을 숨기며 명령조로 답했다.

- 네 몸으로 식혀줘야지 어쩔 수 없다.

머뭇거림이라고는 없이 곧장 개비의 말에 따르려던 에사디엔이 잠시 멈칫했다.

“개비, 당신께서는 분명 제게 어떤 힘이 있다고 판단하여 이러시는 거겠지요.”

- 그래. 빨리 해라, 애 죽는다…….

애타는 개비의 목소리에도 에사디엔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그럼, 저 요시초라는 풀이 제 힘에도 작용하겠습니까?”

- 오… 그래. 너는 그래도 머리를 쓰는 편이로구나.

방법이 떠오르면 바로 행동에 옮기는 미뉴엘이나 걱정에 눈이 가려진 개비와는 달리 이성적이었다.

그러나 에사디엔의 마음이라고 급하지 않을 리가 없어서, 그는 요시초를 손에 잡히는 대로 뜯어서 씹어 삼킨 후 바로 미뉴엘을 껴안았다.

별안간 다가온 서늘함에 놀란 미뉴엘이 눈을 떴다. 열이 잔뜩 올라 눈의 실핏줄이 전부 터졌는데도 그녀는 에사디엔을 보고 곧바로 밀어내려 했다.

- 함부로 움직이지 마!

개비의 호통에 멈춰야 했지만.

그러면서도 바르작거리는 미뉴엘을 더 세게 끌어안으며 에사디엔은 조용히 속삭였다.

“밀어내지 마십시오. 당신 곁이 제 자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그래도… 나를 이렇게 붙잡다니, 바보예요? 뜨겁지도 않아요?”

“저는 괜찮습니다.”

에사디엔은 눈을 살짝 접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오스틴은 죽었습니다. 우리도 어서 돌아갑시다.”

평소 보이던 그대로의 미소에 미뉴엘은 조금 안심했다.

하지만 아무리 개비가 뒤에서 지원해 주고 있어도 이대로라면 에사디엔이 위험해질 수 있었다.

‘빨리, 나도 빨리 끝내야 해.’

미뉴엘은 한층 더 집중력을 끌어올려 마력을 인도했다.

개비가 열기를 중화시켜 주려 해도 효과가 크지 않아서, 그녀를 껴안은 에사디엔의 옷자락이 점점 타들어 가는 것도 모른 채.

다시 떠올리기도 싫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시간이 지나고, 결국 어찌어찌 마력을 갈무리하는 데 성공한 미뉴엘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 옆으로 오스틴을 상대하자마자 고통을 참느라 모든 기력을 소진한 에사디엔도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흐으…….”

미뉴엘의 상태도 정상은 아니었다. 마력의 지독한 여파로 열기가 그대로 남은 탓에 머리가 지글지글 끓는 것 같고 정신이 혼미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그녀의 눈에는 에사디엔이 심하게 다친 것밖에 보이지 않았다.

얼굴은 물론이고 온몸을 뒤덮은 화상. 그녀를 품었던 가슴 부분은 그중에서도 상태가 가장 심각했다.

“대체 왜, 이렇게 될 정도로 참는 건데……!”

차마 건드릴 엄두도 내지 못하고 미뉴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를 지키려고 데려온 거지만 막상 결과가 이렇게 되니 착잡해진 개비가 씁쓸하게 말했다.

- 어째서겠냐.

“…….”

- 포션하고 같이 이거라도 먹이도록 해.

개비가 푸른빛이 도는 반투명한 돌멩이를 내밀었다.

- 물의 정령을 지키는 일족에게서 받아 온 물의 정수야.

평소였다면 이제 에사디엔을 물의 정령과 계약시킬 생각이냐고 놀리듯 물었겠지만 지금 미뉴엘에게는 그럴 기력이 없었다.

“제발… 이대로 날 두고 가면 안 돼요. 살아나기만 해줘요……. 제발.”

눈물조차 고이지 않는 것은 너무 지쳐서일까, 슬픔이 커서일까, 아니면 차마 미안하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죄책감 때문일까.

미뉴엘은 휘청거리는 몸에 어떻게든 힘을 주며 에사디엔에게 포션을 있는 대로 뿌렸다.

폭주를 버틴 대가인지 조금이나마 다룰 수 있게 된 마력으로 그의 몸에 남은 열기를 가져오고, 물의 정수라는 돌멩이도 포션과 함께 삼키게 하자 점점 흐려지던 숨소리가 그나마 안정되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안심할 단계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개비… 빨리 사람을.”

- 으, 응! 알았어!

곧 꺼질 듯한 불씨처럼 희미한 목소리에 노심초사하며 지켜보던 개비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위층으로 사라졌다.

곧 발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지만 미뉴엘은 그들이 내려올 때까지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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