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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127)화 (127/130)

127화

라페슈는 미뉴엘에게 밀쳐지며 머리를 바닥에 세게 부딪혔다.

중간에 취소된 마력 폭주의 여파까지 겹쳐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린 후, 다시 눈을 떴을 때 시야에 들어온 것은 낯선 천장이었다.

정해진 시각이 되어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러 들어온 시종은 그녀가 깬 것을 보고 조용히 다른 사람을 불러왔다.

‘프레세리아로… 돌아왔구나.’

치트룸 사람들과 달리 자신처럼 흰 시종의 피부를 보고 안심했던 라페슈는 잠시 후 그와 함께 들어온 사람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트, 트레고스난 영식.”

불의 교단의 본거지가 뒤집히면서 더는 정령력을 주입받을 수 없어진 불의 전사들이 하나둘씩 쓰러졌다.

부정적인 분위기는 순식간에 퍼지는 법이라 치트룸의 군사들은 기세가 꺾여버렸고, 테오도르는 그 틈을 노려 과감하게 공세를 밀어붙여 승전보를 울렸다.

그러나 승리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친구 두 명이 아직도 의식을 찾지 못한 채로 침대에 누워 있다. 테오도르는 도무지 자신의 승전을 기뻐할 수 없었다.

‘특히 황자님께서는…….’

온통 붕대로 뒤덮인 모습을 떠올리자 눈앞의 여자를 어떻게 처리해도 성에 차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주먹을 한 번 꽉 쥔 것으로 그 욕구를 눌러버렸다.

“왜 치트룸으로 갔는지, 거기서 뭘 했는지, 뭘 보고 들었는지 단 하나도 빼놓지 말고 전부 말씀하십시오.”

“그,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

“시간순으로 말씀하시는 게 가장 편할 겁니다.”

“그럴…까요.”

처음에는 꽤 더듬거리던 라페슈는 말을 할수록 탄력을 받는지 나중에는 테오도르가 필기하기 힘들 정도로 말투가 빨라졌다.

그는 그녀가 무슨 선택을 했든 한심하게 여기는 것을 티 내지 않을 정도로 사무적이었고, 그녀는 오히려 그 모습에 용기를 얻어서 속에 담아뒀던 말을 전부 쏟아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두서없는 진술 가운데에서 치트룸의 상황만 골라 기록해 둔 테오도르가 펜을 집어넣었다.

라페슈는 지금껏 로봇처럼 이야기를 들어준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제가 미쳤다고 생각하시나요?”

“…….”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테오도르는 라페슈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를 포기하고 대답했다.

“글쎄요. 누구나 다 자기 삶의 주인공 아니겠습니까.”

* * *

“미뉴엘은.”

의식을 되찾자마자 에사디엔이 물은 것은 미뉴엘의 상태였다.

“아직입니다.”

테오도르의 목소리다. 흐릿했던 시야가 서서히 바로잡히며 잔뜩 울상을 지은 그의 얼굴이 보였다.

‘울었군.’

코가 시뻘건 걸 본 에사디엔은 혀를 찼다. 그의 유일한 친구는 안 그럴 것처럼 생겨서 퍽 마음이 약했다.

“내가 설마 죽을 거라고 생각했나.”

“그것도 그랬지만… 황자님!”

테오도르는 만류하려 했지만 에사디엔의 손이 더 빨랐다.

몸을 칭칭 감은 압박감에 팔뚝을 넘어서까지 이어진 붕대를 본 그가 목을, 이어서 얼굴을 더듬었다.

“거울을 가져와라.”

곧 준비된 거울 앞에서 에사디엔은 의사에게 명령했다.

“붕대를 풀어라.”

“하오나, 황자님…….”

“얼굴만. 조금이면 된다.”

의사는 걱정스럽게 보는 테오도르와 간호사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화상은 말 그대로 퍼부어진 신성력 덕분에 치료된 상태고, 지금 붕대 아래 붙인 것은 잔열을 빼는 약초였다.

의사가 걱정한 것은 얼룩덜룩하고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삼황자가 받을 충격이었다.

“…….”

그러나 에사디엔은 고요하기만 했다. 오히려 의사를 닦달하는 것은 테오도르였다.

“흉터를 없앨 방법은 없나?”

“사제가 말하기를 정령의 힘과 마력이 뒤엉킨 탓에 어렵다고…….”

없다는 뜻이다.

에사디엔은 이미 미뉴엘의 불길에 손을 다친 바 있어 그 사실을 익히 알았으면서도 마음이 내려앉는 듯했다.

잠시 거울을 응시하던 그는 다시 눈을 감았고, 간호사가 다시 붕대를 매주자 자리에 누웠다.

“테오.”

“예.”

“고맙다.”

뜬금없는 감사 인사에 순박한 눈이 둥그레졌다.

“뭐가…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가만히 눈만 감고 있는 모습에 에사디엔이 다시 잠들었다고 생각한 테오도르는 사람들을 데리고 나갔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병실은 다시 적막에 휩싸였다.

시간이 지나 밤이 찾아올 때까지.

길게 드리운 달빛 끄트머리가 침대 다리를 슬금슬금 기어오를 때쯤, 미뉴엘이 머무르는 병실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에사디엔은 고양잇과 동물처럼 발소리도 없이 들어와 침대가에 가만히 앉았다.

미뉴엘은 아직도 곤히 잠들어 있었다.

“미뉴엘, 제가…….”

한참이나 고요히 얼굴을 들여다보다 나온 첫마디였다.

갈라진 목소리는 한번 말문이 열리자 느릴지언정 꾸준히 이어졌다.

“제가… 당신 곁을 떠나겠습니다.”

하루아침에 엉망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누구는 연민을 담아, 또 누구는 혐오스럽게 쳐다보리라.

“당신이 그러리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제가 버틸 자신이 없습니다.”

타인의 연민이나 혐오가 아니라 미뉴엘이 그를 보며 미안해하는 것.

그것이 가장 견디기 힘든 일이 될 터였다.

“그 감정으로 평생 당신을 묶어둘 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라도 미뉴엘의 옆자리를 독차지하고 싶었다.

비록 그런 욕망을 드러낼 수는 없어도.

“당신은… 행복해질 자격이 있으니까요.”

내게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해줬던 것처럼.

미뉴엘은 오랜 고생이 드디어 끝난 참이다. 앞으로는 고통 없이 행복하기만 바랐다.

진심으로.

“그러니 흠 없는 사람과 만나셔서…….”

말을 잇는 에사디엔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는 미뉴엘은 미칠 것만 같았다.

‘흠 없는 사람 누구! 다른 사람 만나서 뭐 어쩌라고!’

잠이 깨기는 한참 전부터 깨 있었다. 그러니까 에사디엔이 곁에 와 앉았을 때부터.

특유의 향기가 의식을 불러내듯 깨어났는데 말을 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이 마치 몸 안에 의식이 갇힌 것만 같았다.

묘한 것은 눈을 감고 있는데도 에사디엔의 모습만은 유체 이탈을 한 것처럼 선명히 보인다는 점이었다.

지금 그의 속눈썹 끝에 맺힌 눈물방울 하나까지도.

‘가긴 어딜 가겠다고 그러는 거야.’

속상했다. 답답했다. 긴 부정 끝에 드디어 다시 에사디엔의 손을 잡았는데 저런 소리나 하고 말이야.

‘몸만 움직이면 확 침대로 엎어치기 하는 건데!’

체급 차이가 있는데 잘도 그러겠다.

미뉴엘은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며 이를 박박 갈았다.

엎어치기를 못 하면 명치라도 겁나 세게 때려서 정신 차리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상태를 알 리 없는 에사디엔은 입술을 깨물며 거친 몸짓으로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 서슬에 안에 담아두었던 은빛 사슬이 덩달아 쏟아지듯 흘러나왔다.

‘내가 준 목걸이…….’

에사디엔은 마치 미뉴엘이 보는 걸 아는 듯이 씁쓸하게 웃으며 목걸이를 더 깊숙이 집어넣었다.

“이것만은… 가져가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 소중히 간직하며 살겠습니다.”

아니야, 에사디엔. 그거 아니라고.

미뉴엘은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그거 걸고 나랑 같이 살자고요! 이 바보가 정말!’

가지 마. 아무 데도 가지 말란 말이야!

그러나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가위에 눌린 것처럼 끝내 입은 열리지 않았다. 말이 되지 못한 소리는 신음이 되어 맴돌 뿐이다.

“흐으…….”

결국 미뉴엘의 눈에서도 눈물 한 줄기가 흘렀다.

지금껏 고요하게 자던 그녀가 울자 에사디엔도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뉴엘…….”

손수건으로 조심조심 닦아주었지만 뽀얀 얼굴은 여전히 젖어 있었다.

머뭇거리던 에사디엔의 입술이 남은 눈물을 훑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한동안 그 자세로 있던 그가 잠에서 깬 것처럼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걸어 나간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 * *

내가 마침내 눈을 떴을 때, 에사디엔의 병실은 이미 깨끗이 빈 상태였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번에는 테오도르조차도.

로콰이트로 돌아온 나는 요양을 핑계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침실에 틀어박혔다.

멍하니 창밖을 보며 에사디엔이 남기고 간 작은 상자를 열었다 닫는 것이 내 일과였다.

- 괜찮냐.

그러기를 며칠이나 흘렀을까. 개비가 펑 소리를 내며 나타났다.

“왔어?”

완전히 힘을 되찾은 개비는 이제 거의 팔로스와 또래로 보일 정도로 자란 상태였다.

- 그게 뭐야?

“…반지.”

나는 닫았던 상자를 마지막으로 열고는 반지를 꺼내 왼손 약지에 꼈다.

“예쁘지?”

나뭇잎 모양으로 세공된 콘플라워 사파이어와 쿤자이트가 엇갈리며 원을 그리는 디자인.

‘사실은, 미뉴엘.’

내 침실로 향하는 계단 위에서 머뭇거리며 품에 손을 넣던 에사디엔을 기억한다.

“…이왕이면 직접 끼워주지.”

- 미안하다.

개비는 쭈뼛거리며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니야.”

나는 녀석의 볼을 꼬집으며 살짝 웃었다.

“지금 이 상황이 기쁘진 않아. 하지만… 너나 에사디엔을 이해할 사람은 나뿐이니까.”

개비는 계약서에 얽힌 존재이고, 에사디엔은…….

“하아.”

나는 큰 한숨을 내쉬며 반지 낀 손바닥을 문질렀다.

나는 손바닥의 흉터조차 밝히기 꺼렸는데 전신을 다친 에사디엔은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 그래서 그대로 둘 거야?

개비는 팔짱을 끼고는 양반다리를 한 채 허공에 동동 떠서 물었다.

나는 아까보다 조금 더 깊게 웃었다.

“그럴 리가.”

에사디엔은 나를 사랑한다.

떠나겠다고 말하던 순간마저도 그 마음은 마치 손에 쥘 수 있을 것처럼 흘러넘쳤다.

“그러면서도 내가 준 목걸이를 걸고 도망가다니, 발칙한 황자님이야.”

당연히 찾아서 데려올 것이다.

일단은 준비를 마치고 나서.

멍하게 흘려보내던 며칠은 생각을 정리하고 계획을 세우는 기간이었다.

“너도 돌아왔으니 이제 움직여야지.”

- 그래, 어디부터 갈까?

나는 묘하게 의욕적인 개비의 손을 잡고 침대에서 벗어났다.

“마법 학교부터.”

내가 세상모르고 자는 사이 신년제도 지나가 버렸고, 마법 학교는 막 신학기에 들어서 활기찬 모습이었다.

“오오, 제자님, 이렇게 다시 보니 좋구먼.”

여전히 나를 흔쾌히 반겨주던 브라시다스는 내가 얌전히 인사만 건네자 눈을 가늘게 뜨며 지그시 나를 들여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어디가 안 좋은가, 해서 말일세.”

“무슨 말씀이세요.”

나는 피식 웃으며 얌전히 앉았다.

‘하여튼 감은 좋다니까.’

내 계획에는 브라시다스가 꼭 필요했다. 다른 마법사라고 절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 한 명이 있으면 말 그대로 일당백이니까.

게다가 나는 추노… 아니, 에사디엔을 되찾아오는 데 시간을 무한정 투자하고 싶지 않았다.

‘일 초라도 더 같이 있고 싶으니까요.’

에사디엔이 그렇게 말했을 때는 민망해했어도, 사실 그 마음은 나도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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