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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128)화 (128/130)

128화

“대마법사님께서 흥미를 느끼실 만한 책을 가져왔어요.”

아샤 대사제에게 부탁해서 받은 책들이다. 옛날, 정령사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절에 쓰인.

불의 교단의 중심부가 날아가 버리자 치트룸 왕실에서는 재빨리 손을 놓았다.

그리고 왕이 그럴 거라 충분히 예상했던 각 신전은 우리 일행이 빠져나오자 단숨에 광신도들을 일소했다고 한다.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려 연락한 그녀에게 염치 불고하고 부탁했더니 잔뜩 보내주었다. 그중 반은 우리 가문의 도서관에 보관하고, 반은 이곳에 가져왔다.

“흥미야 있네만, 뭔가 내게 바라는 것이 있을 테지?”

“맞아요.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요.”

“으음. 말해 보게나.”

브라시다스는 팔짱을 끼며 등을 뒤로 기댔다.

회의적인 태도였지만 이왕 운을 뗀 거 그대로 가야 했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화상 흉터를 없앨 수 있는 약을 만들고 싶어요.”

“그거라면 회복 마법이나 신성…….”

심드렁하게 보편적인 답을 하던 브라시다스가 멈칫하더니 몸을 조금 앞으로 내밀었다.

“설마, 자네?”

“맞아요. 마력 폭주로 일어난 사고나 정령의 힘 때문에 입은 화상은 아무리 신성력을 써도 흉터가 남죠. 제 손처럼요.”

“황자님을 찾아오려는 것은 이해하네만, 자네가 감당할 수 있겠나? 사람도, 시간도, 물자도 얼마나 들어갈지 모르는 일일세.”

“저도 알아요. 이게 눈 가리고 미로에서 빠져나온 다음에 울타리에 박힌 바늘 하나를 찾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걸요.”

“그런데도 만들겠다는 겐가.”

“하지만 제게는 힌트가 있어요. 이것만 구할 수 있으면 앞 단계는 건너뛰고 울타리에 박힌 바늘 찾는 정도로 난이도가 내려갑니다.”

“그게 뭐지?”

“그건, 죄송하지만 비밀을 유지하기로 개비와 약속했어요.”

“정령과…….”

대마법사쯤 되면 눈치도 비상해지는 모양이었다.

개비의 이름을 딱 한 번 꺼냈는데도 브라시다스는 뭔가 가늠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금전적인 문제는 걱정 마세요.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께서는 당연히 쌈짓돈을 터실 테니까.”

아픈 손가락을 찾아오겠다는데 그 정도 지원도 하지 않을 분들은 아니었다.

나는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양심적으로 제 사재도 보탤 거지만요.”

“허허허.”

평소처럼 너털웃음을 지으면서도 브라시다스가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입장도 이해했다. 마법 학교 교수로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고, 개인적으로 팔로스도 제자로 두고 있으니 시간이 빠듯하겠지.

‘하지만 내겐 아직 이게 있다는 말씀.’

검지를 꼿꼿이 든 나는 허공으로 마력을 짧게 쏘아 보냈다.

무색투명해야 할 마력이 불의 기운에 물들어 불그스름했다. 그것을 본 브라시다스의 동공이 천천히 확장했다.

나는 씩 웃으며 확인했다.

“흥미, 있으신가요?”

끄응, 소리를 내던 브라시다시는 졌다는 듯 양손을 들었다.

“일단 내가 아는 의사와 약제사 길드에 연락을 넣도록 하지.”

개발팀을 꾸리겠다는 뜻이다. 확답이었다.

나는 금방이라도 새되게 튀어나갈 듯한 목소리를 애써 다잡았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마찬가질세. 시작하기로 한 이상 대충할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게나.”

“에이, 그건 저도 알…….”

그간 몇 차례나 실험당하며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브라시다스는 내 말을 다 듣지 않고 이어 경고했다.

“그리고 각오하게나.”

“…그것도 알아요.”

쓰읍. 날 굴리는 것도 대충하지 않겠다는 선언에 나는 쓴 입맛을 다셨다.

“팔로스는 수업 중인가요?”

“음, 슬슬 끝날 때가 되기는 했군.”

어디서 수업을 듣고 있는지 위치를 듣고 나가려던 나는 빙글 몸을 돌려 인사했다.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스승님.”

심각하던 브라시다스의 얼굴에 웃음이 조금 올라왔다.

“이제야 받아들일 마음이 생겼나, 제자님?”

“학적에는 올리지 마세요. 너무 나이롱… 아니, 띄엄띄엄 배우는 제자라 팔로스한테 미안할 지경이 될 테니까.”

“열심히 배우겠다는 뜻인가?”

“저 바빠요!”

흥, 하고 나오는 뒤로 웃음소리가 들리다가 문에 가로막혀 사라졌다.

- 진짜로 할 거야?

몸을 숨긴 개비가 들뜬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해야지. 언제 또 자리를 비울지 모르는데.”

가볍게 대답한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호위 중인 클리데인에게 오케이 사인을 보냈고, 그는 곧바로 다른 기사들을 데리고 멀찍이 떨어졌다.

그것을 확인한 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 브라시다스에게 말했던 힌트, 그건 바로 물의 정수였다.

- 물의 정수가 불의 기운을 누르고 치유 효과를 볼 수 있게 해줄 거야.

하지만 개비는 경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인간들에게 알리면 안 돼. 나 때문에 다른 정령의 보금자리까지 침범당하게 할 수는 없어.

나는 물론 개비를 존중했다. 그간 녀석이 겪은 일을 알면서도 반대할 수 있을 사람은 없을 터였다.

“그런데 물의 정수는 어떻게 가져와?”

- 우리가 직접 가서 따 와야지. 그런데 네가 거기 들어갈 방법을 찾아봐야겠어. 아무리 내 계약자라도 인간이라 출입을 허가할지 모르겠다.

산까지 가는 길에 작은 언덕을 넘었다 했더니 굽이굽이 이어져 있는 걸 본 기분이다.

하지만 벌써 힘이 빠질 수는 없지. 나는 주먹을 꼭 쥐며 말했다.

“브라시다스가 팀을 다 꾸리기 전에 해내야 해.”

그래서 마법 학교에 들르는 김에 지금껏 미뤄왔던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

팔로스를 괴롭히는 녀석들의 무리, 그리고 그 집안.

지금껏 채권 변제를 몇 번이나 요구했음에도 그들은 꿈쩍하지 않았다.

혼사로 얽힌 귀족 사회는 얼굴 붉힐 일을 꺼려서 소송까지 가는 일이 드물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나는 거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우리 가문은 아니거든.”

큰 형부는 북부 토박이 가신 가문 출신이고, 작은 형부 쪽은 마침 얽힌 쪽이 하나도 없었다.

“뭐, 형부 성격에 신경 쓰지 말고 혼쭐을 내주라고 하겠지만.”

소송? 그건 어느 세월에 붙들고 있을까. 법정 공방이 오래 걸리는 건 이쪽이나 한국이나 똑같았다.

‘외출 전에 지시했으니 아마 지금쯤 압류 진행 중이려나.’

편안하게 그리 생각하던 참이었다. 기다리던 목소리가 나를 크게 불렀다.

“누나!”

팔로스는 커다란 가방을 멘 채 달려와서 나를 이리저리 살폈다.

“들었어요. 다치셨다면서요.”

“이제 괜찮아.”

“정말요?”

“그럼. 내가 다쳤다는 소식은 어디서 들었어?”

“스승님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어머나. 그러면 이것도 들었으려나?”

속닥속닥.

나도 조금이나마 마법을 배우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해 주자 팔로스는 뛸 듯이 좋아했다.

“누나, 대단해요! 정령력하고 마력을 같이 쓰는 사람은 누나가 최초일 거예요!”

옛날 옛적, 정령사가 한창 많았을 시절엔 있었겠지만 아무렴. 이 세대에서는 내가 최초겠지.

“팔로스, 사람이 많이 안 다니는 건 어느 쪽이니?”

“네? 그건 왜…….”

“이 누나의 미모에 학생들이 홀리면 안 되니까?”

“아… 하긴.”

본인 입으로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고 할 만도 한데, 팔로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납득하고 나를 이끌었다.

‘음. 이렇게 하면 사람이 참 머쓱해지는구나.’

그리고 팔로스가 데려온 곳은, 식사 시간이 다가와서 그런지 정말 사람이 없었다. 내가 요구했지만 원하던 장소가 이렇게 바로 나올 줄이야.

“아 참, 누나하고 만나면 드리라고 하신 게 있었어요.”

내가 두리번거리는 사이, 팔로스는 가방을 뒤적이더니 손이 꽉 찰 만한 크기의 상자를 꺼냈다.

들이미는 서슬에 얼결에 받았지만 일단은 질문부터 하기로 했다.

“나한테? 누가?”

“그게… 저희 부모님이요.”

휴가 내내 함께 지내더니 많이 친해진 모양이었다.

‘다행이야.’

나쁜 사람들이라면 혼내 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역시 사이좋은 편이 훨씬 낫다.

“뭘 바라고 한 일은 아니지만, 안 받으면 우리 팔로스가 섭섭해하겠지?”

나는 눈을 찡긋해 보이고는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푸르스름한 돌을 잔뜩 엮은 팔찌가 들어 있었다.

- 어!

잠잠하던 개비가 나보다도 먼저 반응했다. 뒤이어 나도 얼떨떨하게 입을 열었다.

“이거…….”

물의 정수잖아?

- 그것도 전부. 이건 그냥 팔찌가 아니야. 물의 정령을 지키는 바다 일족의 손님이라는 표식이지.

숨을 들이켜는 내게 팔로스가 말했다.

“증조할아버지가 바닷가에 쓰러진 사람을 돌봐줬는데, 어느 날 그 사람은 없어지고 팔찌만 남아 있었대요.”

“증조할아버지……? 그럼 대를 이어서 소중히 보관하던 것일 텐데, 내가 받아도 될까?”

“그래서 드리는 거랬어요. 누나는 더 좋은 게 많으시겠지만, 모두가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니까 부디 받아주셨으면 좋겠다고요.”

개비도 나를 보챘다.

- 인간들 손에 두는 것보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게 낫겠어. 더는 필요 없게 되면 내가 바다 일족에게 돌려줄 테니까.

결국 나는 팔찌를 꺼내 착용했다.

“고마워, 팔로스. 부모님께도 감사하다고 전해 드리렴.”

“마음에 드세요?”

“응. 무척.”

나는 웃으며 팔로스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정말 복덩이라니까!”

이 애가 의도했든 아니든 내게 도움을 준 것이 벌써 몇 번째인지.

그런데 이 훈훈함을 못 견디고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남의 집안을 깨부수고도 시시덕거릴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팔로스의 입학 지원서를 넣을 때부터 걸리적거리던 직원과 예비 마법사들.

기대하던 면면 그대로에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놀란 팔로스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였다. 물론 채무자들에게 던지는 말은 서릿발 같았다.

“그러게 갚으랄 때 갚았어야지.”

“이사장님은 돈도 많으시면서 꼭 그러셔야 합니까? 사람 사는 데 돈이 다입니까?”

“아무리 많아도 중한 것이 돈이야. 그리고 사람 사는 데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돈이 없으면 사람은 못 살지.”

일부러 살살 긁는 말투로 이죽거리자 그의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어떻게 하면 압류를 취소해 주시겠습니까?”

“글쎄? 진심으로 사과하면 생각해 볼 수는 있겠지.”

“무슨 사과를 하라는 말입니까?”

“그걸 모르는 점에서 탈락이네.”

진짜 나쁜 사람은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산다던데 정말이었구나.

오스틴 같은 놈한테 댈 수는 없겠지만 살면서 만나는 이런 놈들도 만만치 않은 빌런이었다.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젓자 그를 따라온 녀석 중 한 명이 나섰다.

“자, 잠깐. 팔로스한테 과제를 떠밀고 안 하면 때렸어.”

“때렸어?”

지그시 내려다보며 되묻자 녀석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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