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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129)화 (129/130)

129화

“다음.”

시작하는 사람이 생기자 나머지도 앞다투어 잘못한 일들을 말했다. 하지만 불손한 말투나 반항적인 눈빛은 그대로다.

‘평생 사과하는 법은 못 배우고 자란 건지.’

속으로 혀를 찬 나는 팔로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꼭 용서해 줘야 해요?”

“당연히 아니지. 네가 원하는 대로 해.”

“그럼 안 할래요. 저 말고도 클래스에서 좀 어리다 싶으면 다 괴롭히는 놈들이에요.”

팔로스는 언젠가 내가 몰래 지켜봤을 때처럼 차갑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 착한 애가 이토록 화를 내게 하다니.

나는 심드렁하게 직원에게 물었다.

“들었나?”

“애한테 그런 걸 물어봅니까?”

“그건 빚쟁이 마음이지.”

직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결국 분통을 터뜨리듯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사과하면 변제해 준다고 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고 했지 확답한 적 없는데. 그리고 자네는 사과조차 하지 않았고.”

사람이 화가 나면 눈에 보이는 게 없다던가?

그는 거친 기세로 내 목을 향해 팔을 뻗었지만, 일 초도 허용하지 않고 목에 드리워진 검을 느끼며 멈춰야만 했다.

나는 코웃음 쳤다.

“목숨 아까워하는 걸 보니 화가 덜 났나 보군.”

그러나 그가 제압된 모습을 보고 정말로 화가 난 학생이 냅다 내게 마법을 쓸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파앙!

곁에 있던 팔로스가 당장 막아버렸지만.

“미성년이라고 만만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면목 없습니다, 아가씨.”

클리데인에게 따끔하게 말한 뒤 나를 공격한 녀석을 향해 고개를 흔들었다.

“집안이 쓰러지면 일 년이라도 빨리 마법사가 될 생각을 해야지, 나를 공격해? 싹수가 노랗다 했더니 끝까지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이만하면 됐다.

나는 팔로스의 손을 잡고 돌아섰다. 뒤에서 놈들이 기사들에게 끌려가지 않으려 버티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누나, 괜찮으세요?”

“그럼. 내가 대응하기도 전에 네가 마법을 시전했잖아.”

하지만 팔로스가 걱정을 놓지 않는 통에, 나는 결국 불꽃으로 저글링 하는 걸 보여주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 * *

에사디엔 삼황자가 사라졌다.

그러나 미뉴엘은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은 사람처럼 분노하지도, 실망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은 채 조용히 방 안에서만 머물렀다.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오히려 가족들이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이었다.

그러기를 며칠, 갑작스럽게 외출했던 미뉴엘은 묵혀뒀던 채권을 다 털어버리고 돌아왔다.

그것이 시작이었던 것처럼 그녀가 집을 비우는 날은 점점 늘어갔다.

‘대체 어디 가서 뭘 하는 거지.’

그래도 오늘은 미뉴엘이 오랜만에 외출하지 않고 테라스에 앉아 아직 창백한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결국 그녀를 먼저 찾아간 건 라망드였다.

테라스의 유리문을 두들기려던 순간, 에사디엔의 목소리가 그의 머리를 스쳤다.

‘그대의 말이 진심이라고 믿었다.’

미뉴엘의 옆자리를 아득바득 차지한 에사디엔에 대한 질투심으로 방문을 닫아걸었을 때였다.

라망드는 문고리를 부수며 들어온 그에게 숫제 짜증을 냈다.

‘무슨 소리십니까? 나가시죠.’

‘미뉴엘이 누구를 만나건, 누구를 사랑하건 그대는 그 자리에 있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지금 그대의 모습을 보라.’

‘…….’

‘나는 신념을 가진 그대를 존경했다, 사제여.’

‘나도 사람입니다. 난 표현해서도 안 되는 겁니까?’

‘그대가 놓기에 내가 먼저 기회를 움켜쥐었다.’

그래, 그래서 좋은 친구로 돌아가려 노력했다.

‘하지만… 황자가 사라진 지금이라면.’

고개를 저었지만 그 생각은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라망드는 그 상태로 노크하고 테라스로 나갔다.

“라망드!”

“미뉴엘, 괜찮아?”

“응? 뭐가?”

오늘 미뉴엘은 기분이 상당히 좋아 보였다. 라망드가 곁에 앉자마자 훈훈한 온기가 훅 끼쳐왔다.

“요즘 바빠 보이더라. 채권 얘기 들었어.”

“인생에 기회는 한 번뿐인데, 난 너무 많이 줬어.”

망고를 우물거리며 포크를 허공에 휘두르는 모습이 그늘 한 점 없었다.

그냥 이대로 에사디엔의 이야기는 영영 꺼내지 않고 덮어버리고 싶기도 했지만, 라망드는 그러지 않았다.

“내 말은… 삼황자님이 사라지셨는데 괜찮냐는 뜻이야.”

“아.”

이쪽은 각오하고 물은 것인데 미뉴엘의 대답은 산뜻하기만 했다. 아니, 입가에 어린 웃음이 더 진해진 것 같기도 했다.

“괜찮아. 그 사람은 돌아올 거야. 행적 추적도 시작했거든.”

황제의 수사관들로도 모자라 아버지의 사람들까지 풀었다. 세상이 아무리 넓다 한들 에사디엔이 숨을 곳은 없었다.

‘지난번처럼 약을 먹은 것도 아니고. 사람 모습이라면 못 찾을 수가 없지.’

게다가 선전 포고도 하지 않았던가.

몰래 튀면 대륙 끝까지 사람을 풀어서라도 찾아내겠다고.

‘일단은 찾는 게 우선. 그다음에는 약을 완성할 때까지 지켜봐야겠지.’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 중이기도 했지만, 예감이 좋았다. 또다시 흥얼거리는 미뉴엘의 손목에서 투명한 청색 돌들이 달그락거렸다.

그 팔찌를, 그리고 넷째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반지를 본 라망드의 표정이 조금 가라앉았다.

“기다리려고? 언제까지?”

“글쎄… 내 준비가 끝날 때까지 오지 않으면 그때는 내가 가야겠지.”

“준비라니?”

처음 듣는 이야기에 얼떨떨해진 라망드에게 미뉴엘은 차근차근 설명했다.

“신성력으로도 지울 수 없는 흉터에도 듣는 연고. 그걸 만들 거야.”

“그래서… 요즘 그렇게 자주 외출하는 거였구나.”

“맞아.”

미뉴엘은 생긋 웃었다. 완전히 팀이 꾸려지기 전에 몰아치듯이 브라시다스에게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은 가뿐히 묻어두었다.

‘떠올리기만 해도 피곤해.’

“사실은 다 완성되면 말하려고 했어. 뭐든 그렇지만, 특히 약이란 건 실패작이 무수히 나올 테니까.”

미뉴엘은 고민하지 않고 그 길을 택했다.

에사디엔의 아름다움에 반했지만, 사랑하는 것은 얼굴이 아니라 그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녀 자신 때문에 생긴 상처인데 꺼릴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돌아오지 못하게 막는 장애물이라면, 그녀는 모든 것을 투자해서라도 그를 없앨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음… 약이 만들어지는 동안에 개비하고 정령석을 원래 있던 곳에 돌려보내야 하기도 하고. 바빠서 굳이 에사디엔을 원망할 겨를도 없어. 좋았던 모습만 떠올리는 게 좋은걸.”

딱딱하던 에사디엔이 점점 녹아가던 모습. 엘의 모습으로 애교를 부릴 때의 모습. 사랑한다고 말하던 모습.

그를 떠올리는 미뉴엘의 미소가 조금 더 따뜻하고 부드러워졌다. 그 변화를 똑똑히 목격한 라망드의 목소리가 기어이 떨렸다.

“그렇게… 사랑해?”

‘황자님이 그렇게 좋아?’라고 묻던 과거와는 다른 무게감에 미뉴엘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응. 사랑해.”

“…….”

“그리고 믿어. 그 사람은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걸.”

“…왜?”

“그야, 그렇게 떨어트렸는데도 계속 내 곁으로 돌아왔으니까.”

내 옆이 자기 자리라고 했으니까.

대답하는 미뉴엘의 눈썹이, 코가, 입술이 너무나도 찬란하게 빛나서 라망드는 도저히 그녀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시선을 피한 것도 잠시, 그의 눈은 다시 미뉴엘에게 향했다. 그리고 홀린 것처럼 그의 입이 움직였다.

“내가 네 버팀목이라고 그랬지, 미뉴엘.”

“응.”

답을 들은 라망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

미뉴엘이 따라 일어설 것을 알았던 라망드는 곧장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끌어안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미뉴엘은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라망드를 마주 안으며 물었다. 손으로는 그의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 위로하면서.

그 자연스러움이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무엇보다도 명확하게 못 박았다.

누구보다 스스럼없고 가깝지만, 또 그렇기에 더는 가까워질 수 없는 관계.

라망드는 그것이 못 견디게 좋으면서도 끔찍하게 싫었다. 미뉴엘의 어깨에 기댄 그의 얼굴이 괴로우면서도 슬프게 일그러졌다.

‘나는… 안 되는구나.’

라망드는 깨달았다. 그의 다짐은 오만함이나 다름없었다.

미뉴엘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가정을 꾸려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때까지 그녀에게 그런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전 미뉴엘이 그러지 않았던가. 인생에 기회는 한 번뿐이라고.

그녀가 잠시 삼황자와 이별하고 정령과 계약했을 때, 라망드의 기회는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진 것이었다.

“…미뉴엘.”

“응.”

“너도 내 버팀목이야.”

“오. 드디어 너한테 이런 말을 듣다니, 좀 감동적인데?”

웃음 섞인 말을 들으며 라망드는 눈을 꾹 감았다.

‘네 하나뿐인 버팀목이 내가 되면 안 될까?’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을 누르는 것처럼.

“사실 나한테는 너뿐이야.”

“나도 그래.”

가벼운 대답에도 라망드의 심장이 떨어지는 것을 미뉴엘은 몰랐다. 그래서 마음 편히 말할 수 있었다.

“생명의 은인이고 가장 친한 친구이면서, 오빠 같기도 하고 동생 같기도 했으니까. 그런 존재는 내게 너밖에 없어.”

“…….”

“그리고 이제는 정말 가족이고.”

라망드는 눈물이 고인 눈을 애써 하늘로 향하며 웃었다.

“하하. 맞아.”

이것으로 멈춰야 했지만, 입술은 기어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혹시라도 황자님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미뉴엘.”

“그럴 리는…….”

“나한테 와.”

부정하는 것마저 끊으며 훅 들어온 말에 미뉴엘의 눈이 조금 커졌다.

“오라니?”

“난 슬슬 서멘더로 돌아가려고 해.”

“아…….”

미뉴엘의 얼굴이 조금 흐려졌다. 하지만 그뿐, 예전처럼 안달복달하며 라망드를 잡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정말 대사제가 될 준비에 들어가는 거야?”

“…내가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난 일반 사제로 사는 것에 만족해.”

“마음씨도 착하시지, 우리 대사제님.”

미뉴엘은 키득거리며 라망드의 손을 잡아끌었다.

“저녁 먹으러 가자. 오늘은 메추리를 구워준댔어.”

“메추리?”

“…….”

“미뉴엘?”

“아. 에사디엔이 있었으면 또 야채 먹으라고 잔소리할 텐데 말이야.”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즐거워하는 미뉴엘을 보니 더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말로 나는 안 되는구나.’

사랑했던 시절의 문을 닫아야 하는구나.

‘그러나 플렌드나 님.’

만에 하나라도 당신께서 이 종을 불쌍히 여기시어 다시 한번 기회를 내리신다면.

그렇다면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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