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프레세리아 제국 서남부에는 열대 과일을 주로 재배하는 섬들이 여럿 있는데, 그중에서도 테르주 섬은 크고 단 망고로 매우 유명했다.
일 년 전, 한 용병이 테르주 섬에 둥지를 틀었다.
사막 사람처럼 언제나 얼굴이며 온몸을 가리고 지내지만, 턱선만 봐도 잘생긴 태가 나서 어딜 가나 눈길을 받는 자였다.
화젯거리라고는 이 정도가 다일 정도로 조용한 테르주가 어느 날 갑자기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이 섬의 주인 아가씨께서 오신다지 뭔가.”
“갓 성년이 지났다고 들은 것 같은데, 아랫사람들 생각을 많이 해주셔.”
어딜 가나 ‘주인 아가씨’ 이야기였다.
농부들을 가축처럼 부리던 농장주를 싹 잡아다 벌을 준 일부터, 더 좋은 망고를 위해서라며 농부들이 지내는 집부터 농기구 일체를 전부 새것으로 바꿔준 일까지.
“그런 분께서 복 받으셔야지.”
“그런데 들었나? 아가씨 혼자서 테르주 망고를 다 드신다던걸!”
“하하하! 설마! 식사 대신 망고를 먹는 것도 아니고!”
주인 아가씨의 첫 방문이라 주민들은 더욱 들뜬 채로 기다렸다.
그런데 이게 웬걸.
“아가씨! 아가씨!”
“그쪽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배가 도착하자마자 주인 아가씨께서 사라지는 바람에 항구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기사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걸 보던 농장주들도 저마다 인맥을 통해 아가씨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아가씨 이야기가 나오기 전, 섬 최고의 화제 인물이었던 용병에게도 의뢰가 들어왔다.
“이름과 인상착의가 어떻게 됩니까?”
“미뉴엘 카르이넨 님, 분홍색 긴 머리에 배에서 내리기 전까지만 해도 흰 옷을 입고 계셨다고 하는군.”
수첩을 꺼내 든 채 그대로 굳어 있던 용병은 빠르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이번 의뢰는 받지 못하겠군요.”
“아니, 그러지 말고. 정말 중요한 분이시네.”
“저는 못 찾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봐! 아이, 사람 참…….”
끝까지 붙잡는 농장주를 뿌리치듯 바깥으로 나온 용병은 멍하니 서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대로 있다가는 그녀와 마주칠 수도 있었다.
‘일단 집으로 가서.’
평소보다 훨씬 재게 발을 놀리는 그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이제 테르주에서 떠날 때가 된 건가? …아니, 그건 아닐 것이다. 며칠 숨죽여 숨어 있다 보면 그녀는 곧 떠나겠지.’
다행히 집에 먹을 것은 넉넉했다.
그러나 막상 집에 도착하자 그는 안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바짝 긴장했다.
언제나 단단히 걸어 잠가두었던 문이 살짝 열려 있었으므로.
스응.
반사적으로 검을 반쯤 뽑은 그가 경계하며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강도는 아닌가.’
침입자가 잠시 앉아 있었던 듯 부주의하게 튀어나와 있는 의자 외에는 아무것도 흐트러진 것이 없었다.
입구에서부터 주방, 마지막으로 침실을 확인한 그의 긴장이 탁 풀렸다. 머리 위까지 덮인 이불 틈새로 풍성한 분홍빛 머리카락이 삐져나와 있었다.
탁, 소리와 함께 검이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한숨을 내쉬자마자 또 다른 긴장이 몰려왔다.
머리는 경종을 울렸다.
‘당장 집에서 나가야 한다.’
하지만… 꿈에도 그리던 얼굴이었다. 그가 홀린 듯 침대 가에 앉자 타이밍 좋게도 모두가 찾고 있는 그 아가씨도 이불을 걷어차며 그쪽으로 돌아누웠다.
에사디엔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 웃었다. 미뉴엘은 여전히 잠든 모습마저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웠고… 사랑스러웠다.
“잘, 지내고 있었습니까.”
에사디엔은 울 것 같은 기분으로 그렇게 속삭였다.
아주 작은 속삭임이었는데도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열렸다. 눈이 마주치자 부드러운 하늘빛 눈동자가 얕은 호선을 그렸다.
“안녕, 에사디엔.”
일 년은 생각보다 짧은 시간이었다.
히로비외 화산 아래 자리한 바다 부족의 영역에 방문하고, 기록 담당 정도지만 약 개발에 손을 보태고, 브라시다스와 마력 실험을 하고, 마법을 배우고.
거의 침식을 잊을 정도로 바쁘게 지내다 마지막으로 개비를 북부 끝 보금자리로 돌려보내고, 마침내 테르주 섬에 도착하니 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를 잡아다 앞에 꿇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만나고 싶었다.
집 위치 정도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니 찾는 건 시간문제였다.
마법으로 간단히 자물쇠를 따고 문을 열자 그리운 향기가 가득한 공간이 그녀를 반겼다.
그래서일까, 분명히 집으로 돌아올 그를 맞아 와락 껴안으려고 한 계획과 달리 졸음이 쏟아져 꿀잠을 자버렸다.
‘뭐, 놀라게 하는 건 성공한 것 같네.’
미뉴엘이 생긋 웃어 보이자 에사디엔은 눈을 슥 피하며 발뺌했다.
“…누구신지.”
‘방금 잘 지냈냐고 한 주제에.’
오랜만에 보니까 이런 모습조차 좋았다. 그래서 미뉴엘은 생글생글 웃음을 유지하며 말했다.
“나요? 난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인데.”
오랜만에 직진 미뉴엘에게 받힌 에사디엔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턱을 괴며 그 모습을 흡족하게 감상했다.
“맞죠? 하긴 틀릴 리가 있나. 에사디엔 황자님이 사랑하는 건 이 세상에서 딱 한 명, 나뿐이니까.”
그러나 심호흡 한 번에 에사디엔의 동요는 자취를 감췄다.
“장난은 그만두고 제 집에서 나가십시오.”
“싫어요.”
“그럼 제가…….”
“당신도 나 못 잊었잖아요. 그래서 내가 섬에 왔다는 걸 알자마자 집으로 온 거잖아요. 아니에요?”
도망치려고. 혹은 은둔하려고.
미뉴엘은 치트룸으로 향할 때처럼 온몸을 꽁꽁 싸맨 그가 안쓰러웠다. 이 습하고 더운 섬에서 얼마나 답답했을까.
“나하고 같이 돌아가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내가 여기서 살아야겠네.”
“미뉴엘, 제발!”
능청스럽기만 한 미뉴엘의 태도에 기어이 에사디엔이 폭발했다.
“제게 남은 건, 제가 당신께 드릴 수 있는 건 수치스러움뿐입니다! 저와 함께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혐오스러워하는 시선이 따라붙겠지요! 이런, 이런 몰골로는……!”
그는 마치 피를 토하듯 외치며 눈 아래를 모두 감싸던 복면을 확 내렸다. 열을 올려서 평소보다도 더 얼룩덜룩해 보이는 피부가 드러났다.
하지만 미뉴엘은 그것을 보면서도 침착하기만 했다.
“눈이 나빠져서 잘 안 보여요, 에사디엔. 가까이 와주세요.”
자괴감이 폭발하던 와중에도 그 말에 그의 어깨가 흠칫 튀었다.
“…눈이 그렇게 나빠졌습니까? 혹시 그날의 후유증입니까?”
“그렇다기보다는… 제 손하고 비교하고 싶어요. 조금만 더 이쪽으로 와주세요.”
에사디엔은 순진하게도 천천히 다가왔다.
가만히 거리를 가늠하던 미뉴엘은 그에게 손이 닿자 잽싸게 마법으로 그를 침대에 쓰러뜨렸다.
이 날을 위해, 이 엎어치기를 위해! 일 년 내내 이 마법을 맹훈련했다!
미뉴엘은 에사디엔의 배를 냅다 깔고 앉아 포효했다.
“일 년 만에 한을 풀었다아!”
반면 에사디엔은 혼돈에 빠진 상태였다. 황당해진 그가 말조차 더듬으며 물었다.
“그, 그럼 눈, 눈은 어떻게 된 겁니까?”
“하얀 거짓말이랄까, 데헷!”
“이제는 저를 농락하십니까?”
발끈한 에사디엔이 벌떡 일어나려 했으나 미뉴엘이 한 박자 빨리 마법으로 짓누른 탓에 실패했다.
으휴, 하고 장난스러운 한숨을 쉰 그녀가 말했다.
“왜 이렇게 성격이 급해졌어요? 일단 이것부터 봐요.”
미뉴엘의 손바닥이 에사디엔의 눈앞에 불쑥 내밀어졌다.
푸른 눈이 크게 벌어졌다. 마치 정령석과 접한 적이 없는 것처럼 깨끗한 피부였다.
“미뉴엘, 이게…….”
도무지 믿을 수 없어서 뭐라 말을 잇지 못하던 에사디엔의 시선이 그 손에 낀 반지에 닿았다.
“이것을…….”
“계속 끼고 있었죠, 당연히.”
미뉴엘의 손가락이 에사디엔의 손가락 사이를 슬금슬금 파고들더니 꽉 잡았다.
예전처럼 손깍지를 낀 그녀가 다시 말했다.
“함께 돌아가요. 당신을 위해 약을 만들었어요.”
“약을… 만들었다고요? 그것으로 당신 손의 흉터를 없앤 겁니까?”
“네. 지금 발라볼래요?”
시험용으로 가져온 통을 꺼내자 조심스럽게 일어나 앉은 에사디엔이 홀린 듯이 손에 낀 장갑을 벗었다.
‘정말로 효과가 있을는지…….’
의사의 말을 아직도 기억하는 에사디엔은 기대와 동시에, 아니 기대보다도 심한 불안감이 들었다.
그러나 미뉴엘이 연고를 푹 떠서 그의 손등에 문지르자마자 약은 버터처럼 녹아서 사라지고 그 자리에 흉터가 생기기 전과 똑같이 멀쩡한 피부가 드러났다.
“음, 역시 당신한테는 약효가 훨씬 빨리 도네요.”
미뉴엘은 원인을 아는 사람처럼 중얼거렸지만 에사디엔은 눈앞에서 본 기적 때문에 그 말뜻을 파악할 수 없었다.
“이게, 미뉴엘, 이게 정말…….”
“나랑 같이 갈 거죠?”
에사디엔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미뉴엘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도망친 나를… 지금껏 놓지 않았다니.’
도저히 그러겠다고 할 수가 없었다. 사람이 염치가 있다면 차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보고 싶었어요.”
이렇게 말하며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는데 에사디엔이 딱 잘라 거절하는 건 무리였다.
끝내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미뉴엘은 함성과 함께 그에게 달려들었다.
“와아!”
의식이 있을 때면 언제나 습관처럼 되새겨서일까. 일 년이나 지났는데도 와락 안겨오는 느낌이 어색하지 않았다.
에사디엔은 미뉴엘을 능숙하게 받아 안으며 연한 핑크빛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고맙습니다…….”
저를 잊지 않아주셔서. 찾아주셔서. 포기하지 않아주셔서…….
속삭이는 숨결에 미뉴엘이 간지러워 웃으면서도 잔뜩 뻐겼다.
“더 고마워해도 돼요. 솔직히 좀 힘들었거든요.”
“평생, 매일매일 말씀드리겠습니다.”
굳게 다짐하던 에사디엔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물론… 아직 저와 결혼하실 마음이 있으시다면.”
반지도 봐놓고는.
‘바보.’
하지만 미뉴엘은 그게 에사디엔 나름의 사과라는 걸 알았다. 미안하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이라는 것 또한.
미뉴엘은 그를 더 꼭 안아주며 조건을 내걸었다.
“평생, 매일매일 사랑한다고도 말하기로 약속하면 결혼해 드리죠.”
“너무 쉬운 조건이라 죄송할 따름입니다.”
커다란 손이 미뉴엘의 눈을 천천히 가렸다. 뒤이어 제집을 찾아들듯 에사디엔의 입술이 미뉴엘의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사랑합니다, 미뉴엘.”
“…….”
그러나 미뉴엘은 묵묵부답이었다.
아무런 반응도 없어 에사디엔이 불안해지려던 찰나, 그녀는 눈을 가린 그의 손을 확 내리며 볼의 흉터 위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이어 활짝 웃으며 대답하는 얼굴이 마치 봄날의 햇살 같았다.
“나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