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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노래-4화 (4/365)

4화. 괄목

“내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지, 근데 왜 하필 지금이냐고!”

맥레인이 차가운 표정으로 바닥에 드러누운 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맥없이 쓰러져 허연 거품을 토해내던 말은 이내 몇 번의 발작을 끝으로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말 머리맡에 조용히 무릎 꿇고 있던 엔제이는,

“브라스 금화를 두 개나 주고 산 말인데.”

잔뜩 성이 난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침착함을 애써 유지하던 조이가 결국 참지 못하고 험상궂은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그딴 푸념을 할 때가 아니야! 엔제이!”

그러나 조이의 꾸짖음에,

엔제이는 되려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달려들었다.

“출발 전에 네가 처먹인 사과 때문에 탈이 난 거잖아!”

엔제이의 급발진에 맥레인은,

“마지막 만찬이라도 즐기고 갔으니 다행이지.”

실소를 터트리며 비꼬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조이의 멱살을 부여잡았다.

이에 조이는 처음으로 눈을 날카롭게 치켜뜨며,

“놔, 이 새끼야.”

낮은 목소리로 위협했고 그제야 흠칫 놀란 엔제이가 멱살을 잡던 손을 얼른 놓아버렸다.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시몬은,

“지금부터 무사히 귀환하기 전까지 이 주제로 언쟁을 하면 내가 가만두지 않겠어!”

빠르게 벌어진 상황을 봉합했다.

“맥레인, 어떻게 하면 좋겠어?!”

이어서 시몬은 곧장 불안에 떠는 안드레를 살펴보며 맥레인에게 소리쳤다.

“처음에 보기 좋게 거리를 벌려놨던 게 다 물거품이 됐어. 지금쯤 우리 턱밑까지 쫓아 왔을걸.”

“그렇다면 이제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겠군.”

“도망이야 칠 수 있지, 시간만 벌 수 있다면.”

“시간을 벌어? 어떻게?”

시몬의 물음에 맥레인은 말없이 안장에 채워져 있던 자신의 검을 빼 들었다.

그러자,

“맥레인! 우린 가족을 혼자 두지 않아!”

시몬 역시 곧바로 자신의 안장에서 작은 총 한 자루와 검을 빼 들며 말했다.

“조이, 다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

“맥레인! 내 말 안 들려?!”

“시몬, 꼭 내가 뒈질 것처럼 말하지 마. 이런 적이 한두 번이야?”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넌 항상 네 목숨을 괄시하는 게 문제야!”

“그렇다고 여기서 사이좋게 등 맞대고 싸워?”

이어지는 둘의 실랑이에 조이와 엔제이는 머쓱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바람 잘 날이 없군.”

조이의 푸념에,

“난 아직도 중부 무법지대에서 우리가 손꼽히는 범죄 집단이라는 게 실감이 안 나.”

엔제이가 방금 했던 행동에 대해 사과하겠다는 뉘앙스로 누그러지게 대답했지만,

“그러게 말이야, 너 같은 놈이 끼어있는데. 넌 복귀하고 나서 따로 나와 얘기 좀 해.”

조이는 아까와 같이 날 선 표정으로 엔제이를 침묵시켰다.

이윽고,

“보스…! 어떻게 해요?!”

안색이 하얗게 질린 안드레가 큰소리로 외치자 기다렸다는 듯, 맥레인이 안드레에게 손짓하며 시몬에게 쏘아붙였다.

“저 풋내기를 데리고 싸웠다간 아무것도 못 하고 다 죽어버릴걸?”

맥레인의 단언에 시몬은 결국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겼다.

이후 모든 상황은 매끄럽고 빠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시몬은 안장에 얹어진 그것을 다시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 말에 올랐고, 엔제이는 맥레인의 말에 올라 그를 뒤로 한 채 재빨리 숲을 벗어났다.

그렇게 홀로 남은 맥레인은,

짝다리를 짚고,

짧게 말린 연초를 입에 문 채.

저 깊은 숲 너머에서부터 요란하게 들려오는 바람 소리를 맞이했다.

“작업하는 날이면 꼭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다니까.”

습,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맥레인이 불붙인 연초를 크게 한 번 빨아들였다.

어느덧 어둑해진 숲속,

그사이에 피어오르는 감색 연기는 마치 곧 떠오를 묽은 밤하늘의 한 조각 같았다.

이내,

무수한 바람 소리가 송곳처럼 날카롭게 곳곳에서 날아들었고, 이에 맞추어 다 태운 연초를 바닥에 내팽개친 맥레인이 한 손으로 잡고 있던 검을 치켜세웠다.

동시에 휘익, 하는 휘파람이 들린다.

그러자 맥레인 주변에서,

더그덕, 더그덕.

급하게 바람결에서 내려온 말발굽 소리가 요동쳤다.

수십,

후발대까지 합치면 족히 백은 넘을 엄청난 규모의 귀 큰 자들.

그들이 맥레인을 둘러싼 채 모닥불이 꺼지길 기다리는 맹수처럼 노려보았다.

“너희 두목이 다 피고 남은 꽁초를 버리고 간 것 같군.”

곧 귀 큰 사내 중 하나가 맥레인을 보며 비아냥거리자.

사방에서 차갑고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맥레인은 그저 모자를 더욱 깊숙이 눌러 쓸 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대신 들고 있던 검을 방금 입을 연 귀 큰 사내에게 겨누었다.

“너는 오늘 일어날 일의 유일한 증인이다.”

“뭐?”

맥레인의 알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귀 큰 사내.

“널 발견할 놈들에게 똑똑히 전해, 우릴 쫓은 대가가 무엇이었는지를.”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잇던 맥레인은,

그렇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순간 상체가 잔상에 가려질 정도로 빠르게 검을 휘둘러 쳤다.

푸른 섬광.

살갗마저 찢을 폭력적인 굉음.

그리고,

맥레인의 검으로부터 뛰쳐나온 폭풍의 편린,

그것이 주위에 있던 귀 큰 자들을 한 차례 휩쓸었다.

야만적인 모습으로 뜯긴 팔다리 몇 개가 뒤늦게 여기저기 떨어지고,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진 자들도 있는 와중.

아직도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유일한 증인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뒤늦게 주위를 살폈다.

그런 그를 뒤로한 채,

맥레인은 검을 집에 넣고 유유히 뒤돌아 걸어나갔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후발대,

귀 큰 자들의 두목으로 보이는 이가 눈 앞에 펼쳐진 처참한 광경에 괴성을 지르며 분을 표출했다.

이윽고 유일한 증인의 멱살을 잡고,

“말해.”

물어보자,

“놈입니다…. 일전에 마을에서 우릴 습격한…. 틀림…없습니다.”

죽은 생선 눈을 한 채 떨리는 입술로 답하는 귀 큰 사내.

“이…. 인챈트…. 인챈트가 실려있는 검을 들고 있었습니다…. 마을에서 죽도 못 쓰고 당한 이유가…. 다 있었어요…!”

그 말에,

주위에 있던 귀 큰 자들이 일동 술렁이기 시작했다.

두목 역시 두 눈이 바삐 흔들리긴 마찬가지.

“어떻게 무법자 새끼가 그런 물건을…?”

“우… 우리가 건드려선 안 될 놈들 같습니다….”

귀 큰 자들의 두목으로 보이는 이는 끝내 잡고 있던 멱살을 던지듯 놓고는 한참 동안 주위를 살피다가,

분노에 치를 떨며 무리를 이끌고 깊은 숲속으로 사라졌다.

* * *

“그래서, 정말 네가 주도해서 가져온 거란 말야?”

케니가 보석같이 예쁜 푸른 눈을 번쩍이며 안드레에게 묻자, 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귀쟁이놈들이랑 맞닥트렸는데, 그 상황에서 내가 딱! 탈출구를 여는 데 큰 역할을 했지!”

그의 입에서 나오는 찬란한 무용담에 케니는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연신 안드레를 치켜세워주었다.

조금만 더 추켜세우면 그대로 솟아난 어깨와 함께 하늘로 날아가 버릴 만큼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케니, 아직 내 몫을 배분받진 못했지만 어쨌든 이뤄질 약속인 거….”

이어 안드레가 용기를 내어 조심스레 케니에게 다가가자,

그녀는 슬며시 안드레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밀어냈다.

“약속은 지켜져야만 약속이니까, 알지? 난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는 거.”

이어지는 그녀의 미소에 안드레는,

“그… 그렇지 약속이니까.”

제법 태연한 척을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 몫을 받는 날이 목요일이었으면 좋을 텐데.”

케니의 말에,

“왜?”

안드레가 진심으로 궁금한 표정을 짓자.

케니는 슬쩍 치마를 들어 올린 채 작게 펼쳐진 텐트 쪽으로 걸어가며 답했다.

“목요일은 안나 아줌마가 마을에 내려가는 날이거든, 그 넓은 텐트에 나 혼자라니 얼마나 쓸쓸하겠니?”

케니의 그 속절없는 유혹에,

안드레는 정말 이러다가 얼굴에 불이 붙는 건 아닌지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싼 채 몰래 뒤돌아 방방 뛰어댔다.

그런 안드레를 뒤로 한 채,

텐트로 들어온 케니,

이에 텐트 안에 있던 중년의 여성이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러다 안드레 간장이 죄다 녹아버리겠네.”

“불도 안 때웠는데 살살 녹네요, 입안에 얼음처럼.”

“아무튼, 케니 너도 참 못 말리겠다.”

“제가 원래 좀 촉촉하잖아요?”

“그래서, 정말 안드레가 보석을 갖다 주면?”

“맥레인 아저씨가 안 왔잖아요, 딱 봐도 안드레는 허풍을 치고 있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조금 더 괴롭히려고요.”

“지독하다 지독해.”

“저를 지독하다 하지 마시고, 나를 향한 안드레의 관심을 지독하다 하세요. 전 죄 없어요?”

“하하!”

그렇게 두 여인의 깔깔거리는 소리가 밤늦게까지 텐트 속에서 울려 퍼지는 동안,

커다란 막사 안에선 초조함에 몸 둘 바를 모르던 시몬이 회중시계를 손에 쥔 채 이곳저곳을 쏘다니고 있었다.

“맥레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이에 테이블에 잠자코 앉아 있던 조이가 대번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적어도 길에서 객사할 운명은 아니에요, 맥레인은.”

마찬가지로 조이 반대편에 앉아 있던 엔제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히려 그 귀쟁이놈들을 걱정해야 되는 거 아니야? 솔직히 조직원들에게 차별받는 건 그렇지만 그놈 실력은 진짜잖아.”

“그래서 더 길에서 객사할 운명이 아니란 거야, 그렇게 눈에 띄는 실력을 가진 무법자들 열에 아홉은 밧줄에 목이 매달려 죽으니까.”

“나머지 하나는 뭔데?”

“불에 타죽거나, 목이 잘리거나, 돼지 사료가 되어버리거나.”

“하나가 아닌데?”

“말이 그렇다는 거야, 엔제이 이런 등신 새끼.”

조이의 타박에 엔제이는 묵묵히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던 땅콩을 껍질 채 오물오물 씹을 뿐이었다.

“보스, 아무래도 타고 올 말이 없어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걸 겁니다.”

“그렇겠지 조이?”

“그렇고말고, 이런 상황이 수십 번은 더 있었는데 언제나 돌아왔잖나.”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매튜가 너그러운 말투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시몬을 위로했다.

“그나저나 너희들이 가져온 그 ‘보석’ 말이야.”

쓰고 있던 단 안경을 제대로 고쳐 쓴 매튜가 이내 엔제이 옆자리에 앉아 화제를 돌렸다.

“어떻습니까?”

조이의 물음에 매튜가 고개를 슬쩍 가로저었다.

“예사 것이 아니야. 귀족 놈들의 온갖 취향 섞인 물건들을 감정해 봤지만 이런 건 처음이야.”

그러다 손가락을 하나 치켜세우며 말을 잇는 매튜.

“하지만 말로는 들어본 적이 있어. 인간 보석을 수집하는 극소수의 귀족들이 있다는 거.”

“그것참 지랄 맞은 취미군요. 그러다 보석이 된 인간이 죽어버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때는 우리가 알던 일반적인 보석의 개념으로 돌아가는 거겠지.”

“살아있어도 사치품, 죽어서도 사치품이란 소립니까? 정말 개 같은 운명이로군.”

“어쨌든 지금으로선 정확한 감정이 필요해,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매튜의 말에 이젠 초조해하던 시몬까지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살아있다는 거야.”

말뜻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엔제이가 고개를 까닥이며,

“뭐가요?”

되묻자 매튜는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가져온 그 인간 보석이 살아있다고.”

그 말에 모두가 말없이 서로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보스! 맥레인이 왔어!”

텐트 밖에서 들려오는 부름.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시몬이 자리를 박차고 텐트 밖으로 나서자,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 있던 맥레인이 시몬을 보며 짧게 인사했다.

“다녀왔어.”

“맥레인! 이 자식, 길이라도 잃은 거야?!”

“지나가다 한 미망인의 마차를 얻어탔지.”

“그래서?”

“그것뿐이야. 순 전쟁통에 겪은 얘기들을 내게 들려주는데, 결국 내가 울음을 달래줘야만 했다니까.”

“큭큭, 그럼 그녀의 목적지까지 같이 가주지 그랬나?”

시몬의 말에 뒤늦게 따라 나온 조이도 그제야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랬다간 새벽 내내 맥레인을 찾으러 돌아다녔겠죠, 보스.”

“아무튼 잘 왔어, 잘 왔다고 맥레인!”

그렇게 커다란 막사 안으로 모두 들어가는 중에,

조이가 슬쩍 맥레인의 옆으로 와 묻는다.

“괜찮나?”

“오른쪽 어깨가 좀 나갔어.”

“이제 그 검도 내려놓을 때가 되지 않았나.”

“내가 죽어야만 비로소 놓을 수 있겠지.”

“마치 전쟁이 끝난다는 소리랑 똑같이 들리는데.”

“똑같을 수밖에, 꿈같은 일이잖나.”

맥레인의 씁쓸한 말에 조이 역시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힘줘서 빛을 내는 별들조차 야속해질 만큼.

밤하늘은 깊어만 간다.

그러나 한동안 시몬 바스티유의 거점에선 불빛이 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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