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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노래-6화 (6/365)

6화. 둥지

도대체 얼마 만인가.

햇살의 감촉을 느껴보는 게.

포근함을 간직한 온기, 살결에 내려앉은 기분 좋은 간질임.

이 모든 게 낯설고 어색하게만 느껴지는 걸 보니 셀 수 없을 만큼 오랜 시간 동안이겠지.

하나,

무엇보다 제일 어색한 것은 투명한 유리와 같았던 내 몸이 제법 사람 살결과 흡사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는 거다.

아니, 아니지.

제일 어색한 건 따로 있다.

그래.

내가 눈을 뜬 이곳.

그리고 이곳의 사람들.

입술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인상적인 남자를 제외하곤 누구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적어도 그 하나뿐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비범한 크기의 천막도 그러하고, 당장 눈에 보이는 낡은 침낭만도 다섯이 넘었으니까.

북받쳐 오르던 슬픔이 어느 정도 누그러진 뒤에는 후회가 급격하게 밀려왔다.

끝부분이 희미한 꿈속, 아련함에 쫓겨 대답하듯 나도 모르게 그 남자에게 내 이름을 알려줬다는 사실 때문에.

이따금, 천막 바깥에선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가만히 귀 기울여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들어보고 싶었지만,

찌르르.

귓바퀴를 쿡쿡 찌르는 햇살에 모든 감각이 매몰되어 있던 터라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덕분에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머릿속 기억을 더듬는 것뿐.

나는 세공소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전혀 알 수 없는 곳에서 눈을 떴다.

뭔가 이상하지?

그래, 저 두 사건 사이에 채워져 있어야 할 기억이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정확히는….

그녀가 내게 이름을 지어준 그 직후부터 이 천막 안에서 눈을 뜬 순간까지의 기억.

마치 스스로 불어 꺼트린 촛불처럼.

식은 연기와 같은 의문만이 가득한, 암흑과도 같은 그 기억은 지금으로선 무슨 수를 써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그 떠올릴 수도 없는 기억을 되짚어보려다,

되려 참혹했던 기억들만이 생생해졌을 뿐.

“흐윽…. 흐윽….”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쓰라린 기억 탓일까?

갑자기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흡사 깨진 유리 파편을 혀로 휘감아 잘근잘근 씹는 것처럼….

가슴 속을 짓이기는 무시무시한 통증과 함께!

“헉…! 헉…!”

이대로 가다간 가슴이 뻥 하고 터져버리는 건 아닐까?

싶은 찰나에, 통증은 허무하리만큼 빠르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내 가쁘던 숨도 금방 진정 되었고,

갈빗대를 부숴버릴 만큼 요동쳤던 심장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다는 듯 그 움직임이 급격히 침착해졌다.

뭐지?

뭘까?

고통에서 우러나온 당혹감이 아니다.

그래, 나는 지금 당황하고 있다.

떠오르지 않는 기억처럼, 이제껏 내 몸에선 느껴본 적 없는 이 기이하고 신기한 통증에 대한 당황.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꺼트린 촛불이 밝히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래도 아리아,

너만큼은 꺼트린 촛불 곁에 없어서 다행이다.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어서,

다행이야.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불쑥.

천막 입구가 튀어나오더니 이내 뒤로 활짝 거둬졌다.

동시에 너머에서 쏟아지는 햇빛, 그리고 그 햇빛을 가로지르며 나타난 한 여인.

방금 쏟아진 햇살에 적신듯한 금발을 휘날리며 대뜸 내게 다가온 그녀는 내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무시무시하구나, 너?”

“무엇이?”

그녀의 물음에 답하자,

대뜸 그녀의 두 뺨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세상에…. 네 목소리는 무서울 지경이다, 얘! 하마터면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어!”

그러나 이어진 내 불쾌한 표정을 보았는지, 그녀는 금세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내 옆에 자연스레 앉았다.

“미안해, 널 조롱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 안드레가 엄청난 보석을 가져왔다고 하기에 도대체 그게 뭔지 궁금했었거든. 그러다 아침에 맥레인 아저씨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 세상에, 사람을 보석으로 만들었다니.”

“…그래, 나라도 놀랐을 거야.”

이어지는 내 대답에 그녀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 빨갛게 상기된 볼을 두 손으로 감싸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이상해, 네 목소리엔 무슨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것 같아.”

그녀의 말에 나는 말 없이 손가락으로 내 목을 짚었다.

“목이 왜?”

“두 번째 유리의 시험은 목소리를 세공하는 작업이었어.”

내 말에 그녀는 순간 넋 나간 표정으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이내 씁쓸한 표정과 함께 고개를 떨궜다.

그때 나는 별자리를 품은 눈동자를 통해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에게도 뼈아픈 과거가 있을 거라는 사실을.

하지만 그녀는 곧장 어여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내게 말했다.

“세 번째는?”

“눈에 시약을 뿌렸어. 눈동자를 녹이게 만드는….”

내 대답에 그녀는 불쑥 고개를 내밀어 내 두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네 번째는?”

“유리 같은 피부가 돋아날 때까지 살가죽이 벗겨졌지.”

이어진 대답에,

그녀는 내 눈치를 조심스레 살피다가 슬쩍 두 손으로 내 팔을 쓰다듬었다.

직후, 그녀와 다시 눈이 마주쳤을 때.

“다섯 번째는….”

나는 그녀가 묻기도 전에 대답하려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살살 가로저으며 옆 탁자에 놓여 있던 손거울을 들어 나를 비췄다.

“자 봐, 네 눈동자를, 네 살결을. 네 목소리만큼이나 아름다운 모습을.”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

그 모습은 내가 알던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덥수룩한 검은 머리카락, 그 아래 반짝이는 눈동자, 붉은 입술, 새하얀 살결, 분홍빛이 감도는 코끝과 두 뺨.

슬쩍,

내 얼굴을 어루만져보자 손가락으로 전해져 오는 생생한 온기.

잃어버린 기억만큼이나 낯선 그 모습에 나는 한동안 거울 속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런 내 모습을 킥킥거리며 지켜보고 있던 그녀는,

이내 내 앞에서 손거울을 치워버리곤 제법 털털한 모습으로 손을 내밀었다.

“지나간 건 지나간 거야, 지금의 너보다 더 중요한 건 없지. 난 케니, 그냥 케니라고 불러줘. 성은 없거든.”

“디안, 나도 따로 성은 없어.”

난 그런 그녀가 내민 손을 슬쩍 잡았다.

이번엔 꿈속 아련함에 대답하듯 말한 것도, 그렇다고 이름을 순순히 말해줬다는 사실에 대한 후회도 들지 않았다.

그래,

이건 순전히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나와의 동질감 때문에.

가시 돋친 과거로부터 쉼 없이 뛰어와 상처투성이가 되어버린 지금의 모습이 서로 닮은 것 같아서.

그래서 그녀의 악수에 응한 것이다.

“디안, 이쁜 이름이네.”

“너도 좋은 이름이야, 케니.”

케니는 또다시 내 얼굴을 넋 놓고 쳐다보다가 아차 하는 표정과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밖에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

“뭘 기다리는데?”

“너를.”

나를?

케니의 눈짓에 따라 조심스레 누워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깃털처럼 가벼운 몸, 산뜻함만이 감도는 어깨 위.

내가 기억하고 있던 몸 상태와는 거리가 먼 이질적인 감각을 업은 채.

천천히 케니, 그녀의 뒤를 따라 천막 밖으로 향했다.

밝은 햇살.

그 결을 오선지 삼아 노래 부르는 새들의 지저귐.

포근한 바람에 맞추어 실룩이는 내 머리카락.

매캐한 연기 냄새, 찌들은 연초 냄새.

그것들을 이따금 중화시키는 향기는 분명 케니의 목덜미에서 흘러나온 것이겠지.

더러는 처음 맡아보는 꽃향기가 콧속을 후벼팠다.

햇살에 잔뜩 찌푸린 눈이 어느새 촉촉해지고,

이윽고 섬광에 먹먹했던 두 눈이 초점을 되찾는 순간.

들어왔다.

날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제일 처음 눈을 마주친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는 날 보며 혀를 찼다.

“허, 마치 달이 별들이랑 떡쳐서 나온 사생아같이 생겼구만.”

그런 그의 옆구리를 세게 치며 타박하는,

맨 처음 봤던 사내.

“엔제이, 병신 새끼야.”

이어서 체격이 크고 호쾌한 인상을 한 남자가 성큼성큼 내게 걸어왔다.

그리곤 자연스레 내 어깨에 손을 올린 채.

“소개하지, 세공소에서 온 디안이라고 한다.”

날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해 소개하기 시작했다.

“알다시피 여기 모여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전쟁이 빚어낸 광기의 피해자들이지, 디안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여기 시몬 바스티유는 그들의 유일한 안식처지.”

이어서 날 내려다보던 그 남자는,

“디안, 반갑다. 난 시몬이다.”

흐트러짐 없는 당당한 모습으로 내게 말했다.

“네가 과거에 어떤 일을 당했건 혹은 어떤 일을 벌였건. 그건 이제 상관없어.”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정형되지 않은 카리스마.

그것에 압도된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적어도 그가 한 말들이 내겐 너무나 기대고 싶은 것들이었기에.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몬 바스티유의 가족이 된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너를 위해 움직여 줄 거야.”

가족,

과거로부터 도망친 나에게 가장 동떨어져 있는 단어.

물론 그가 말하는 가족은 내가 생각하는 가족의 의미와는 사뭇 동떨어져 있겠지만.

그깟 아이러니함이 무슨 대수겠는가.

난 시몬, 그를 바라보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대뜸 내 등을 두들기더니 호탕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하! 우리에게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오늘 밤은 모두 모여서 술이나 한잔하지!”

그 말에 몇몇은 동조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거나 박수 소리를 내었지만,

또 몇몇은 영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적어도 엄청난 물건인 건 맞네, 장물아비한테 팔아도 땅을 살 수 있을 만큼 받겠어.”

“아직도 모르겠냐? 보스는 저놈을 두고두고 써먹을 생각인 거야.”

의도적으로 내게 들리게끔 이야기를 나누던 무리가 날 노려보며 사라지기 무섭게,

케니가 대뜸 내 옆에 붙어왔다.

“가족 중엔 꼭 저런 사람이 있기 마련이지.”

“저런 사람이란 게 어떤 사람인데?”

“속물인 사람.”

“아.”

이어서 케니는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시몬은 단 한 번도 우릴 이용하려 들지 않았어, 오히려 우리가 시몬의 이름 아래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거지.”

그런 나와 케니 사이가 불편했는지,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앳된 남자가 성큼성큼 우리에게 걸어왔다.

“케니, 뭐해?”

약간 성이 난 듯한 그의 물음에,

“안드레, 네가 데려온 디안과 이야기를 잠깐 나누고 있었지.”

그녀는 대번에 그를 누그러트렸다.

“디안, 널 데리고 온 사람이 바로 안드레야.”

그녀의 말에 안드레는 부쩍 두 어깨를 치켜세우더니, 실룩거리는 입술로 내게 말했다.

“그… 그래,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야. 이름이 디안이라고 했지?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면 나한테 말하라고.”

난 그런 그에게,

진심으로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고마워, 날 그런 곳으로부터 꺼내줘서.”

내 진심이 통했을까,

아까의 가벼운 시기는 어디 갔는지, 그는 대번에 진지한 표정을 하며 내 손을 붙잡았다.

“그래, 적어도 여긴 그곳에 비하면 천국일걸.”

그렇게 안드레가 자리에서 사라지기 무섭게 케니는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사실 안드레는 옆에서 구경만 했을걸?”

그런 그녀의 말에,

나는 깨어나서 처음으로 슬쩍 미소지으며 답했다.

“그래, 그는 입보다 표정으로 먼저 말하는 거 같네.”

사람을 상품으로만 취급했던 자들의 손에서 벗어나, 사람과 사람으로서 관계를 맺는 이 순간이.

너무나 행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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