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7화 (7/365)

7화. 나쁘지 않은 나쁜 놈들

안나,

안나 오피렛.

수십 년 전 이름난 가문의 시종으로 있다가 돌연 안주인을 찌르고 달아난 범죄자.

라고 세상은 말했다.

실상은 모진 학대를 참지 못한 우발적인 살인.

그 학대의 내용을 듣자 하니 가문의 가주에게 겁탈당해 애를 밴 것을 안주인이 알아차렸고,

이에 안주인은 그녀를 붙잡아 손수 몽둥이찜질을 시켜 유산시킨 뒤 과다출혈로 죽게끔 방치했다.

하지만 안나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기어이 밧줄을 풀어 본능적으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몽둥이 파편을 집어 안주인의 목을 찔러 죽이고 탈출했다.

고 안나는 말했다.

식은 새벽, 아직 해조차 눈뜨지 않은 어스름.

제일 먼저 일어나 바삐 요리를 만들던 그녀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

이제는 굉장히 오래된 이야기라며,

그저 식은 웃음과 함께 입을 여는 그녀의 모습이란 도저히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 내 모습을 살피던 안나는 요리하던 손을 잠시 멈추고, 내 옆에 앉아 빙그레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러다 시몬을 만났고, 그가 나를 받아주었지. 그때 시몬이 내게 했던 말이 아직도 생각나.”

“어떤 말인데요?”

“소수의 잣대로 세워진 법이 날 지켜주지 못한다면, 스스로 법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가 법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다고.”

그래, 맞는 말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 거대한 천막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리고 세상은 그런 사람들을 무법자라 부르지. 존나 웃기지 않냐 애송아?”

주섬주섬,

낡아빠진 부츠를 고쳐 신고, 기름지고 더러운 손으로 머리를 대충 넘기며 나타난 초로의 남자.

“맥레인, 웬일로 일찍 일어났어?”

“안나, 당신 푸념이 천막 안까지 다 들려서 겨우 잠들었던 숙취가 올라와 버렸어.”

“쯧, 아침 일찍부터 어딜 가려고?”

안나의 물음에 대충 옷매무새를 다듬은 맥레인은 나를 슬쩍 노려보며 대답했다.

“큰 건인 줄 알았는데, 쪽박을 차버렸잖아. 알다시피 지금 우리 조직은 힘든 상태야, 재정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애한테 지금 면박 주는 거야?!”

“애라니, 딱 봐도 다 자란 청년이고만.”

“얼씨구, 아까는 애송이라더니.”

“그치, 애송이는 맞지. 그렇지 애송아?”

맥레인의 물음에 난 그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슬슬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정말이지,

거칠고 야성적인 사람이었다.

첫인상은 제법 무겁고 진중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웬걸 안나가 말하는 그 무법자라는 단어와 제일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니.

“애송아, 얼른 조직에 보탬이 되어야 할 거다. 조직에 보탬이 되지 못하는 놈들은 우리 일원이 될 자격이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맥레인.”

“씨라고 해야지.”

“알겠습니다, 맥레인 씨.”

내 대답에 그는 슬쩍 눈썹을 찌푸리더니 얼른 안나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래서 안나, 저놈을 조수로 쓰려고?”

“아니”

“그럼 쟤는 왜 새벽바람부터 깨어있는 건데?”

“맥레인, 저 아이는 어제까지만 해도 보석으로서 갇혀 지내던 신세였어. 어쩌면 평생 맛보지 못했던 자유를 오늘에야 비로소 느끼고 있는 걸 수도 있지, 그렇지?!”

안나는 굵은 눈썹을 잔뜩 찌푸리며 날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물음에,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봐, 맥레인. 저 아일 좀 냅둬.”

단호한 안나의 말에 멋쩍은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던 맥레인은 슬쩍 내 눈치를 보더니 이내 쓰고 있던 모자를 푹 눌러썼다.

“오늘은 메뉴가 뭐야?”

“베체인 스프.”

“이러다 뱃속에 숲이 하나 생기겠군.”

“숲이 생기면 뭐하나, 지독한 술비와 새카만 연초 안개가 하루도 빠짐없이 끼는데.”

안나의 심통스런 대꾸에 맥레인은 그제야 너털웃음을 지었다.

“미안해 안나.”

그러면서 대충 그릇에 퍼 올린 스프를 급하게 들이킨 그는 빠르게 품에서 연초 하나를 꺼내 모닥불 근처에 앉았다.

“잠은 잘 잤냐, 애송아.”

“보다시피요.”

“하! 벌써 비꼬는 법을 배웠군?”

씩 올라간 맥레인의 입꼬리,

그 틈새를 비집고 나오는 감색 연기.

난 그런 그에게 멋쩍어 어쩔 줄 몰라 하는 마른 입술에 침을 발라가며 겨우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절 구해주셔서.”

힘겹게 꺼낸 말이었지만,

맥레인은 내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그저 연초 태우기에만 집중했다.

“턱수염이 덥수룩한 사람이 알려줬어요, 맥레인 씨가 아니었다면 절 이곳에 데려오지 못했을 거라고.”

내 말에 한참 동안 대꾸조차 하지 않던 맥레인은 그렇게 손에 들고 있던 연초를 다 태우고 나서야 그 입을 열었다.

“알면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빨리 찾아라, 애송이.”

툴툴,

자리를 털고 일어난 그는 그렇게 홀연히 말을 묶어놓은 숲을 향해 걸어나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던 나에게,

안나는 웃으며 말했다.

“이해하렴, 제법 표현하는 게 서투니까.”

“그는 어떤 사람인가요, 안나?”

이어지는 내 물음에 안나가 대답하려는 찰나,

“시몬 바스티유의 시작을 함께한 사인방 중 하나지!”

내 등 뒤로 갑작스럽게 튀어나와 와락 안긴 여인.

“케… 케니?!”

귀 뒤로부터 풍겨 나오는 향기.

등에 왈칵 쏟아진 부드러움에 놀란 나는 튀어 오르는 생선처럼 허리를 펼 수밖에 없었다.

“일찍 일어났구나, 케니?”

그녀를 반기는 안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불쑥 내 볼에 코를 파묻는 케니.

“우리 디안 얼굴이 꿈에서도 아른거려서요. 안녕 디안?”

“…그래, 안녕.”

“자세히 보니까, 네 눈동자 되게 이쁘다. 정말 밤하늘 같아.”

“…그래서, 맥레인 씨가 조직의 원년멤버였다고…?”

부담스러워하는 내 모습이 더욱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는 끝내 날 뒤에서 껴안은 채로 말을 이어갔다.

“응, 시몬, 매튜, 맥레인…, 그리고 엘라. 이렇게 네 명이 시몬 바스티유의 초석이었지.”

“엘라…?”

길었던 하룻밤 사이, 유일하게 누구의 입에서도 오르내리지 않았던 낯선 이름.

내 의문에 케니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금세 내게서 떨어졌다.

“네게 알려주는 것 자체가 큰 실수가 될 것 같아서 여기까지.”

그녀의 굳은 표정으로 미루어보건대,

구태여 내가 알아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래.”

맥레인의 말 대로,

난 아직 이 조직 안에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으니까.

“그럼 난 조금만 더 자야겠어.”

케니는 그렇게 말하곤 내 얼굴을 몇 초간 지긋이 바라보다가 흥얼거리며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동시에 한창 요리에 몰두하고 있던 안나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프 한 그릇을 내게 내밀었다.

“먹어보렴, 마른고기 몇 개를 넣었단다. 너한테만 특별히 주는 거야.”

정겨운 그녀의 말에 얼른 스프를 크게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었지만,

“으… 우욱…!”

급하게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야만 했다.

그렇게 근처 나무에 그대로 들이박을 기세로 기댄 채,

“우욱… 우웩!!”

한참 동안 묽은 액체를 미친 듯이 게워내야 했다.

그렇지, 셀 수 없이 긴 시간 동안.

끓인 유리를 꾸역꾸역 마시고, 날카로운 조각들을 우적우적 씹어먹어야만 했던 난.

한낱 보석이었었지.

아직,

가볍게 목 너머로 넘길 수 있는 스프마저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도, 아니 아무것도 아닌.

그런 존재였었지.

“허억…. 허억….”

구역질 끝에,

마지막으로 입 밖으로 게워낸 것은.

씁쓸한 웃음이었다.

* * *

어스름을 꿰뚫고 강렬한 햇빛이 세상을 적셨다.

반쯤 누렇게 물든 잎사귀는 이제 새벽의 흔적인 찬바람에 춤을 췄고.

형형색색의 별자리들은 자신의 자리를 지킨 채, 푸르름에 몸을 감췄다.

보석에서 벗어난 내게 찾아온,

두 번째 아침은 그러했다.

“디안, 잘 잤나?”

퉁퉁 부어버린 얼굴로 날 반갑게 맞이하는 시몬.

“네, 보스.”

난생처음 꺼내 보는 생소한 단어였건만, 어색하기는커녕 가슴 한쪽이 두근거리기만 한다.

“안나! 맥레인은 어디로 갔나?”

“새벽부터 건수를 잡으러 나갔지.”

“자식, 어젯밤에 술을 많이 안 마신 이유가 있었구만?”

허리에 손을 얹은 채 거나하게 하품한 시몬은 곧바로 여유로움이 넘치는 손짓으로 이제 막 일어난 조직원들을 불러들였다.

“엔제이, 버드, 촙, 이리 다 모여라.”

그리곤 거침없이 그들에게 또박또박 명령을 내린다.

“엔제이, 북쪽으로 올라가서 건수가 있나 좀 알아봐. 버드는 매튜를 따라 거점을 지키고 촙은 안드레와 같이 마을로 갈 준비를 해.”

시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짧고 붉은 머리, 길게 내려앉은 코, 주먹만 한 녹색 눈동자.

어벙하게 튀어나온 앞니가 인상적인 촙이라 불린 남자는 그렇게 시몬의 말을 들은 그 자리서 큰 목소리로 외쳤다.

“안드레!”

그의 부름에 멀리서부터 쏜살같이 달려온 안드레.

“나? 나 왜?!”

“마을로 내려갈 준비 해!”

“드디어 내 몫을 받는 거야?!”

“잔말 말고!”

그들의 모습을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구경하고 있던 나는 괜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그 광경을 즐겼다.

뭔가 잔뜩 부산스러운 분위기가 팽배한 이 현장 자체가 내겐 지극히 자유로움을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대뜸 시몬이 내게 성큼성큼 다가온다.

“디안, 너도 마을 구경 좀 해 봐야지.”

“네, 보스.”

“따라나서라.”

두근두근.

가슴이 뻐근해질 정도로 심장이 뛰었다.

“안드레, 네 말에 디안도 같이 태워라.”

“예! 보스!”

시몬의 뒤를 졸졸 따르던 내게 잔뜩 어깨에 힘주며 다가온 안드레.

“따라와.”

그 말에 이번엔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말은 처음 타보냐?”

“응.”

“멀미 같은 건 잘해?”

“잘 모르겠는데.”

“그럼 안 하길 빌어야 할 거야. 토하면 그대로 널 공중에서 내다 버릴 거니까.”

“안 할게, 무조건.”

“…좋아.”

내 빠릿빠릿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내심 내가 따라다니는 걸 즐기며 이곳저곳을 구태여 빙빙 돌다가 말이 있는 쪽으로 갔다.

“발굽에 바람기름이란 걸 바를 거야, 아주 중요한 작업이지.”

“어떻게 하면 되는데?”

그는 내게 작은 나무로 된 통을 건네었다.

“어떻게 하긴, 안에 있는걸 손으로 덜어 펴 발라야지, 해봐.”

그 말을 듣고 통을 열자 안엔 무색의 연고가 가득 담겨 있었다.

“이게 바람기름이란 거구나.”

“정령들이 남기는 흔적이기도 하고.”

이어서 안드레의 깐깐한 지시에 따라 말발굽에 바람기름을 정성스레 발랐다.

“좋아, 그렇게 펴 바르면 일시적으로 말은 정령처럼 달릴 수 있게 돼.”

“그럼 이걸 사람에게 바르면 어떻게 되는데?”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나지.”

“왜?”

내 순수한 궁금증에 안드레는 입술을 움찔거리더니,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 얼른 타기나 해!”

대뜸 내게 신경질을 내었다.

“다들 준비 마쳤나?”

뒤이어 시몬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말을 타고 나타났고, 그 뒤를 촙이라 불린 사내가 따랐다.

마찬가지로 안드레의 허리를 꼭 붙잡고 있던 나는 그와 거의 동시에,

“네, 보스.”

대답했고, 이에 안드레는 심기가 불편한 듯 내게 눈치를 주었다.

“시몬 바스티유에 젊은 피들이 많아지니 나까지 혈기가 왕성해지는 기분이군.”

그런 모습이 좋았는지, 시몬은 기분 좋은 미소와 함께 고삐를 붙잡고 외쳤다.

“그럼 가자, 시몬 바스티유의 문제아들아!”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타구니로부터 느껴지는 강직한 근육의 박동.

동시에 안면을 두들기는 날카로운 바람.

온몸을 준동시키는,

두구두, 두구두.

발굽 소리.

그러나 잠시 후, 몸이 붕 뜨는 듯한 기분과 함께 멎은 발굽 소리.

이윽고 강렬한 바람에 먹먹해지는 두 귀.

그리고,

가공할 속도로 나아가는 말.

밑을 내려다보니 말은 방금 막,

바람을 박차며 나아가고 있었다.

쉬이이- 쉬이이-

이따금 귓가에 갈라져 들어오는 바람 소리를 제외하곤 고요하고 평온한 기운만이 감돌았다.

반면 주위 풍경은 내 눈동자 안에서 길게 늘어져 언제 찢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고,

하체로부터 느껴지는 말의 무시무시한 움직임은 까딱 방심하면 욕지기가 마려울 수준이었다.

그렇게 입을 꾹 닫은 채 안드레의 등에 기대어 가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몸이 쑥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더그덕 더그덕 하는 발굽 소리가 들려왔고, 늘어져 있던 주위 풍경도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야 디안, 토 안 했지?”

안드레의 물음에 난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킥, 처음 치곤 잘 참았는걸? 그나저나 주위 좀 둘러봐, 이곳이 차스탄 마을로 가는 길목이니까.”

그의 말에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피자,

세상에.

길게 뻗은 도로 위로 수많은 말과 마차 행렬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부채로 얼굴을 가린 화사한 여인, 정복을 입은 남자.

갑주를 두른 청년과 안장에 검을 채우고 두건을 푹 눌러쓴 방랑자까지.

밤하늘만 담기를 허락받았던 내 두 눈이,

지금 새로운 세상의 한 장면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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