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꿈 한탕
머릿속이 복잡하다.
알고 있던 모든 기억이 모호해지는 기분.
거기에 아까 들이킨 밀주 한 모금이 더해져 속까지 매스껍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스스로 되물어 봐도 꺼트린 촛불은 당최 다시 켜지지 않는다.
오히려 내 일부분이 더욱 짙은 어둠으로 얼룩지는 듯한 느낌뿐.
돌아오는 길에 시몬은 내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기억이란 건 원래 변덕스러운 기분만큼이나 불현듯 떠오를 수도 있고, 되려 가라앉을 수도 있다면서.
해서 그 잃어버린 기억을 찾으려 애쓰지 말라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시몬은 내게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그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야 비로소 내 존재를 스스로 확신할 수 있을 거라면서.
해서 필연적으로 그 잃어버린 기억들을 상기해야 할 순간이 올 것이라고 했다.
그래, 그의 말이 맞아.
그 기억은 언젠가 내가 되찾아야 할 나의 일부분.
짙은 어둠으로 얼룩진 내 일부분을 말끔히 지워줄 유일한 수단.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언젠가 내게 불현듯 찾아오겠지.
안드레와 촙은 창백해진 날 챙겨준다며 일부러 바람결을 타지 않았다.
다그닥, 다그닥.
땅을 치대는 발굽 소리에 맞춰 흔들리는 내 몸.
그것조차 지금은 가누기가 힘들어 안드레의 등에 이마를 파묻어야 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날 걱정하는 안드레의 물음에,
괜히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 나는 찬찬히 그에게 답했다.
“감정받았어.”
“감정?”
“내가 어떤 보석인지.”
“그… 그렇구나, 기분이 꽤 엿 같겠는데.”
“왜?”
“사람이 아니라 물건으로 취급받았잖아.”
“그럼 안드레 너는?”
“어?”
“너는 날 사람으로 생각해?”
이어진 내 물음에 안드레는 별 고민 없이 답했다.
“적어도 밀주를 그렇게 들이키는 물건을 난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러니까 내 말은 넌 사람이라는 거야.”
안드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옆에 바짝 붙어있던 촙이 사족을 붙인다.
“게다가 존나 똑똑하기도 하고.”
고작 밀주 한잔에 피어난,
어찌 보면 내 또래에선 흔할지도 모르는 치기 어린 우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령 그것이 진짜라고 한들,
지금의 내겐 유일한 위로였으니 무슨 상관이겠는가.
“적어도 보스는 정말로 네 기억을 되찾아주고 싶었을 거야.”
촙은 담담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재키 그 새끼 방식으로 일을 저질러버린 탓에 더 혼란스러워진 것뿐이라고.”
촙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분명 보스라면 그에게 어울리는, 좀 더 신사적인 방법으로 일을 해결했을지도.
이쯤 되니 궁금한 게 하나 생긴다.
“재키는 어떤 사람이야?”
내 물음에 안드레는 침을 뱉으며 답했다.
“그 새낀 사람이 아니야, 짐승 새끼지.”
촙 역시 침을 한가득 모아 뱉고는 거들었다.
“동쪽에서 이름 좀 날린 흉악범 새끼야, 우리 조직에 합류한 지는 1년 정도 됐고.”
“촙,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 어째서 재키 같은 흉악범이 우리 조직에 일원이 될 수 있지?!”
“잘 알면서 왜 그래? 우리 보스가 그놈한테 ‘큰 빚’을 졌잖아. 놈은 모르겠지만 보스는 받은 은혜는 끝까지 돌려주는 사람이고.”
둘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나는 이젠 자연스레 그 둘 사이를 끼어들었다.
“무슨 빚을 졌는데?”
그런 내 질문에 촙이 자연스럽게 받아쳤다.
“예전에 아시리카 보급로를 덮치려고 했었어, 지금 생각해보면 미친 짓이었지.”
“그게 왜 미친 짓이야, 촙? 우린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그 보급로를 그대로 냅뒀으면 서쪽 지역의 마을들은 쑥대밭이 됐을걸.”
“아무리 그래도 군인들을 건드려선 안 됐어. 맥레인 아저씨랑 매튜 아저씨도 끝까지 반대했잖아.”
“그럼 어떻게 해, 시몬 바스티유가 만들어진 이유가 그거인걸. 난세에 버려진 이들을 구원하라!”
“어쨌든 그 아시리카 보급로 건으로 인해서 재키를 만나게 됐고, 위기의 순간을 그놈 덕분에 극복할 수 있었어.”
둘의 언쟁 끝에, 촙이 말을 얼버무리며 대충 내게 설명을 마쳤다.
“하지만 촙, 네 말에 어느 정돈 동의해. 그 건만 아니었으면 재키를 만날 일도 없었을 텐데.”
그들에게도,
설명하기 힘든 과거사가 있는 것 같다.
그것도 아주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처럼.
어찌 보면 내겐 다행일지도 모른다.
나라는 매듭이 추가된다 한들, 엉킨 실타래는 변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 내가 있을 곳은 여기다.
나를 받아줄 수 있는 곳도,
여기뿐이야.
그렇게 거점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저 멀리서부터 덩치 큰 사내가 성큼성큼 우리에게 뛰어왔다.
“이제야 왔군!”
엔제이, 그가 덥수룩한 수염을 실룩거리며 안드레와 촙을 반겼다.
아니, 그런 줄 알았는데.
“디안, 널 기다리고 있었어!”
뜻밖에도 그는 날 기다리고 있었다.
* * *
엔제이의 손에 이끌려 천막 안으로 들어온 지 십여 분이 지났을까.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안절부절못하는 엔제이의 모습에 나까지 초조해질 지경이었다.
이윽고 천막 안쪽에서 걸어 나오는 말끔한 백발을 한 매튜의 모습에,
엔제이는 마치 성난 짐승처럼 그에게 달려들었다.
“매튜, 어때요? 내 말이 맞죠?!”
“진정 좀 해, 안 그럼 짐승한테나 쓰는 진정제를 놔줄까?”
“아… 알겠어요! 진정할 테니까 얼른 말씀해 보세요!”
매튜의 차분하고 냉철한 목소리에 금방 꼬리를 내린 엔제이는 자기 덩치보다 한창 작은 의자에 얼른 앉았다.
이에 눈 위로 슬쩍 올려놓았던 단 안경을 제대로 고쳐 쓴 매튜는 손에 든 낡은 종이를 유심히 보다,
이내 한숨을 픽 쉬었다.
“그래 엔제이, 네 말대로야. 이건 제대로 된 건 같은데.”
“맞죠? 맞다니까?! 내가 제대로 물어왔다니까?!”
매튜의 말에 금방 흥분해서 들썩거리는 엔제이.
그런 엔제이의 모습에 매튜는 말없이 책상에서 철제 주사기를 꺼내 들었다.
“매튜? 그건 왜요?”
“아무래도 써야 할 것 같아서, 신성한 캠프 안에서 짐승이 날뛰는 꼴은 볼 수 없잖아.”
“에… 에헤이, 장난이 너무 지나치시잖아요!”
“무엇보다, 네가 이렇게 오밀조밀한 계획을 세웠을 리가 없잖아. 디안, 와서 놈의 어깨를 잡아.”
“매튜?!”
어벙한 엔제이의 표정, 그와 반대되는 매튜의 단호한 얼굴.
난 그런 매튜의 날카로운 눈빛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슬금슬금 다가와 엔제이의 넓은 어깨를 붙잡았다.
“말해, 엔제이를 언제 죽였지?”
“매튜!!”
“추악한 ‘호리즌’ 새끼, 엔제이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오다니.”
“호리즌? 그게 무슨 소리야! 난 그런 괴물이 아니라고!”
“그건 널 마취해서 가죽을 벗겨보면 알게 되겠지.”
“매튜! 이런 씨발! 난 엔제이라니까!”
손쉽게 내 손아귀에서 벗어난 엔제이가 벌떡 일어나 씩씩거리자,
매튜는 그제야 주사기를 내려놓고.
“하… 하하하!!”
폭소하기 시작했다.
그 모든 상황이 내겐 너무나 갑작스러워서,
그저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매튜, 두 번 다시 이런 장난치면 아무리 당신이라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엔제이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매튜에게 열변을 토해보지만, 매튜는 그저 배꼽을 잡고 웃을 뿐이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던 매튜는 또 뭐가 그렇게 웃긴지 다시 한번 숨넘어갈 때까지 웃다가 가까스로 진정하고는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디안, 너무 놀랐다면 미안하구나. 그러니까 이건… 장난이야. 전부다.”
그 말에 그제야 나는 어깨에 들어가 있던 힘을 쭉 뺐다.
“엔제이는 제법 그럴싸한 계획을 세우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거든. 그러니까 나로선 의심하는 게 당연할 수밖에.”
이어지는 매튜의 넉살 좋은 웃음에,
나도 덩달아 입꼬리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매튜! 저도 이런 생각쯤은 할 수 있다니까요?!”
“그래, 엔제이. 넌 병신같지만, 언제나 병신같지는 않지. 사실 방금 너한테 한 장난도 조이가 내게 부탁한 거야.”
“조이? 조이 크레비디?!”
“이번에 디안을 구해오는 과정에서 네가 팔뚝만 한 똥을 쏴 제꼈다던데.”
“그… 그건!”
“그것에 대한 일종의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해. 그나마 조이여서 내 장난으로 그친 거지, 맥레인에게 제대로 밉보였다면 넌 정말 큰일 났을 거야.”
“그… 그러니까…!”
매튜의 말에 엔제이는 뭔가 항소하듯 대꾸하고 싶었으나, 결국 스스로 인정하고 입을 싹 닫아야만 했다.
“그나저나 엔제이, 정말 대단한걸? 정말 너 혼자 생각한 거야?”
“매튜!! 진짜라니까요?!”
“하하, 알았어. 알겠다고.”
인자한 웃음 속에 밴 주름 속엔,
날카로운 냉철함이 감돌고 있다.
매튜는 그런 사람 같아 보였다.
이지적이고 냉철하지만, 또 가벼워질 줄도 아는 사람.
“좋아, 그럼 바로 착수하도록 하지. 디안, 가서 케니를 데려와.”
자리에 앉은 매튜가 단 안경을 위로 젖히며 내게 말했다.
난 그런 그의 말에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 나와,
“케니?”
케니가 있는 천막으로 향했지만,
그녀는 그곳에 없었다.
“디안, 왜 그렇게 날 애타게 찾아?”
뒤에서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 동시에 내 등 뒤로 왈칵 안기는 한 소녀.
“헉! 케니?!”
그녀는 언제나 내 뒤에서 불쑥 나타났다.
“무슨 일이야?”
그녀의 부담스러운 접촉에 괜히 안드레가 보고 있지는 않을까, 나도 모르게 여기저기 살피기 바쁘다.
“매튜 씨가 케니, 널 부르셔.”
“풋! 매튜 씨? 그냥 편히 아저씨라고 불러. 너도 이제 엄연한 우리 조직의 일원이잖아?”
“그… 그래.”
“한없이 가벼운 시작이지만, 시작과 동시에 한없이 무거워져 버리거든, 우리 조직의 관계라는 게.”
곧 그녀는 제법 진중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이미 너는 우리에게 있어서 한없이 무거운 사람이야. 박힌 곳에서 빼낼 수 없을 만큼 말이야. 그리고 그게 시몬 바스티유고.”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되려 인정받는 이 순간이 너무나 묘해서.
세공소에 있었을 때는,
인정받기 위해 스스로 유리가 돋아날 때까지 살가죽을 뜯었었는데 말이야.
그렇게 케니와 함께 천막 안으로 들어서자 매튜는 고갯짓으로 우리를 의자에 앉혔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이번 엔제이가 가져온 건은 나와 케니, 그리고 디안 셋이서만 진행한다.”
이어지는 매튜의 말에 엔제이가 발끈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게 어딨습니까?!”
그러나 매튜는 단호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이번 건에 넌 별로 어울리지 않아, 단정하고 제법 화려한 것이 어울리지.”
그 말에 케니가 입을 가린 채 킥킥 웃었다.
“케니, 너는 디펠리스 수도에서 파견 나온 간호사 역을 맡을 거다. 복장은 이미 있을 테니 어렵진 않을 거야, 그렇지?”
“물론이죠.”
“디안은 다섯 손이 공인한 연금술사 역을 맡게 될 거다. 사실 너는 그냥 심각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모든 사람이 속아 넘어갈 거다.”
매튜의 자신만만한 어조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리고 난 너희 둘을 급하게 모시고 온 마부가 될 거란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뭔데요 매튜 아저씨?”
이윽고 케니가 궁금증 가득한 표정으로 본론을 물었다.
그러자 매튜가 엔제이를 한 번 그윽하게 쳐다본 뒤 우리 둘을 내려다보며 입을 연다.
“꿈을 털 거다.”
그 말과 동시에 우리에게 내민 낡은 종이.
어디 붙어있던 건지 각 모서리엔 못 자국이 나 있다.
그 안에 내용은 이러했다.
[디에레타, 9살. 영원히 잠든 소녀를 도와주세요]
45일, 무려 45일입니다.
별과 달의 여신, 다미르와 똑 닮은 눈동자를 가진 우리 사랑스러운 딸 디에레타가 잠든 지 말입니다.
가난한 농부에 지나지 않는 우리에게 도시 병원은 응답이 없고, 금에 눈이 먼 연금술사들은 꿈에 눈이 멀게 생긴 우리 딸을 본 척도 않습니다.
제발 우리를 구원해주시길 바랍니다.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