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꿈 한탕 (2)
오래전,
그러니까 햇수로 따지면 30년 전 정도려나.
아직 청년이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그런 건장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을 때였지.
지금과는 다르게 젊었을 적엔 시몬보다 덩치가 컸었으니까.
불행하게도 그 당시에 난 건장한 신체를 빼고는 가지고 있는 게 거의 없었어.
머릿속엔 햇살을 얼마나 먹여야 곡식이 고개를 숙이는지에 대한 지식뿐이었고.
마음속엔 거둬들인 곡식 중 9할을 세금으로 바쳐야 한다는 사실에 증오만이 가득 차 있었지.
그러던 중,
내가 살던 마을에 어떤 방랑객이 방문했는데, 글쎄 그가 ‘괴물 사냥꾼’이라는 거야.
숲 어스름에서 기어 나온 귀물.
비바람과 함께 나부껴 들어온 기물.
밭을 탐하는 배불뚝이 거인.
꿈을 훔쳐먹는 말라깽이.
신비롭고 기묘하지만, 흔하고 골치 아픈 것들이기도 한 그놈들을 전문으로 사냥하는 그런 사냥꾼.
젊은 나이에 그런 사람을 만나니 괜히 가슴이 뛰더군.
그는 내게 자신이 했던 일들을 친절히 말해주었는데,
세상에.
완전 다른 세상 이야기 같았지 뭐야.
익사체를 먹고 불어난 ‘에몬’을 사냥해달라는 의뢰를 받고 가 봤더니, 스스로 배가 터져 죽어버리는 바람에 손 한번 안 써보고 의뢰비를 받아냈다던가.
평소엔 바람결로 위장했다가 기회를 틈타 사람의 체취를 뺏어 먹는 ‘보’를 죽이기 위해 수도 앞마당만 한 밭을 태워버렸다던가 하는,
그런 이야기들 말이야!
난 그에게 완전히 매료되었어.
마음속 증오는 그 감정을 더욱 부추겼지.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모든 걸 정리하고 무작정 그의 뒤를 따라다니고 있었네?
3년,
3년이란 시간 동안 그를 쫓아다니며 난 새로운 세상에 적응했어.
내 앞에 고개 숙이는 건 일평생 곡식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어느새 사람들이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이더군.
무지했던 말투는 독한 술에 말랑해졌고,
불과 3년 전엔 꿈도 못 꿔봤던, 낯선 여인들과의 일탈도 밥 먹듯이 하며 점점 난 그 세상의 주인공이 되어갔단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는 내게 더는 가르칠 게 없다며 서로 헤어질 때가 되었다는 한마디를 끝으로 어느 날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어.
그때부턴 나 혼자 움직였지.
처음엔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뿐이었는데,
제법 잘하더라고 내가.
그렇게 홀로 정처 없이 동쪽으로, 동쪽으로, 마치 언젠가 끝에 도달할 것처럼 움직이다가.
불현듯,
맞닥뜨린 곳이 바로 운명의 도시.
‘사하린’이었단다.
아마 거기서부터가 내 진정한 인생의 시작점이지 않을까 싶은.
시몬과 맥레인을 만난 도시였지….
* * *
솔솔 마주 오는 바람과 함께.
은은하게 실려 오던, 가슴 뛰는 이야기가 퍼뜩 그쳤다.
매튜.
그는 잠시 무안한 표정으로 날 보더니 이내 싱긋 웃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런, 이야기가 샛길로 새버렸구만.”
좋았는데.
지름길은 아니지만, 제법 기분 좋은 샛길이었는데.
“저 얘기를 몇 번이나 들었는지 참.”
물론 그 샛길을 지독히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하도 많이 가봐서, 이젠 빙 돌아가는 길임을 알아챈 거겠지.
그렇게 케니는 한숨을 퍽 내쉬며, 그러면서도 은은한 미소와 함께 매튜 아저씨를 못 말리겠다는 듯 바라보았다.
“오래 살다 보면 이야기에 많은 갈래가 생겨나는 법이지.”
“그래서요 매튜 아저씨? 이제 슬슬 우리가 무슨 작업을 해야 하는지 알려줘야죠?”
유독 매튜 아저씨에게만큼은 유순한 케니가 웃음기 섞인 말투로 그에게 묻자,
그는 잡고 있던 고삐를 슬슬 흔들어 말들을 재촉시킨 뒤 한껏 낮은 목소리로 순식간에 우릴 집중시켰다.
“그러니까 우리 불쌍한 디에레타양이 잠에서 깨지 못하는 건, ‘디글렛’이라는 괴물 때문이야. 아마도.”
“아마도?”
“높은 확률로.”
“그럼 확실한 건이 아니란 거네요?”
“높은 확률이란 건 바꿔 말하면 거의 확실하단 소리지.”
매튜 아저씨의 미꾸라지 같은 말솜씨에 케니는 결국 어깨를 으쓱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서, 디글렛이 뭐 하는 놈인데요?”
그녀의 물음에 매튜 아저씨가 부쩍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잇는다.
“도둑놈이지, 흔히 사냥꾼들 사이에선 ‘까마귀 왕’이라고도 불리는 아주 탐욕스러운 도둑.”
“주로 뭘 훔치는데요?”
“반짝이는 거.”
매튜 아저씨의 말에 케니의 두 눈이 반짝였다.
이를 놓치지 않은 그가 비장한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놈들이 훔치는 물건의 규모는 한낱 까마귀랑은 차원이 다르지. 그리고 이번 건은 아마도 그 규모가 무시무시할 거야.”
궁금증에 둘 사이 대화를 비집고 들어가 본다.
“규모가 크다는 걸 어떻게 알죠?”
내 질문에 매튜 아저씨는 상냥한 눈으로 날 바라보며 대답했다.
“9살밖에 되지 않은, 우리 불쌍한 디에레타양이 그놈의 표적이 되었으니까.”
“이제 제대로 설명을 좀 해주시죠, 매튜 가버드 아저씨.”
케니가 팔짱을 끼며 단호하게 말한다.
이에 매튜 아저씨는 씩 웃으며 서둘러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디글렛은 주로 금이나 보석류를 훔치는 괴물이야, 그 도벽이 인간성에서 비롯된 도벽과는 차원이 다른, 말 그대로 괴물 같은 도벽을 가진 놈이지.”
그리곤 손가락을 펼쳐 허공에 네 개의 네모를 그린 그가 설명을 이었다.
“일례로 디글렛 하나가 네 개의 도시 은행 금고를 단 반나절 만에 털어버린 사례가 있어, 그 정도로 훔치는 것에 한해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
“그런데요?”
“근데 그 디글렛이라는 놈이 정말 지독한 이유는 따로 있어, 바로 놈이 숨는 장소 때문이야.”
“어딘데요?”
“꿈.”
매튜 아저씨의 말에,
나와 케니는 멍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봐야만 했다.
“그게 가능해요?”
“그래, 디안. 세상은 늘 가능한 일들만이 일어나지. 놈은 아주 강력한 요술을 부린단다.”
“그래서 그 여자아이의 꿈속에 디글렛이 숨어들었다는 거네요?”
“정확해 케니.”
“그러면 규모가 크다는 건 무슨 이유에서죠?”
“말했듯이, 디글렛이 숨어든 꿈이 바로 아홉 살짜리 소녀의 꿈이기 때문이지.”
매튜가 씁쓸한 웃음과 함께 손가락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는다.
“어린아이의 꿈은 광활하거든, 비옥한 상상력의 땅이 끝없이 펼쳐져 있지. 반면… 나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꿈은 비좁아진단다. 꿈 일부분을 현실과 맞바꿔야 하니까.”
그리곤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환기시킨다.
“아마 디글렛이 내 꿈속에 들어오려면 금화 두어 개정도 밖에 들고 오지 못할 거다. 엔제이는 엄두도 내지 못할지도.”
“풉”
케니가 결국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아저씨?”
“왜 그러니, 디안?”
“만약 그 아이를 계속 그대로 방치하면 어떻게 되죠?”
“그렇게 되면… 아이는 영영 깨어나지 못하겠지.”
그 말에 아까까지 웃음기가 감돌았던 분위기가 팍 식었다.
하지만 매튜 아저씨는 오히려 기운 넘치는 목소리로 그 분위기를 확 물리쳤다.
“연금술사는 귀족들에게 달콤한 말 몇 마디를 속닥거리기 위해 없는 말도 지어내기 바쁘고, 수도 병원은 절대로 진흙을 밟는 일이 없으니 우리가 하는 수밖에.”
“그러네요, 그래서 계획은요?”
기합이 확 들어갔는지 부릅뜬 눈으로 입을 여는 케니에게 아저씨는 끌끌 웃으며 대답했다.
“일단 디글렛을 유인해야 해, 놈이 탐낼 만큼 아주 아름답고 반짝이는 것으로. 놀랍게도, 우리 엔제이가 그 해결책을 미리 생각해두고 있었더군.”
그 말을 끝으로 매튜가 날 보며 싱긋 웃는다.
그런 그의 웃음을 따라간 케니도 날 한참 쳐다보더니,
이내 보기 좋은 미소를 씩 짓는다.
“디안처럼 반짝이고 아름다운 것도 없지, 디글렛이 미친 듯이 달려들 거야.”
아저씨?
“그럼… 전 어떻게 하죠?”
“걱정하지 마, 다 해결책이 있으니까. 그 전에 케니, 잘 챙겨왔니?”
“네, 디펠리스 수도 간호사 복장이랑, 연금술사들이나 입을법한 로브 한 벌.”
“좋아, 도착하면 일단 그것부터 갈아입으렴.”
매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케니가 내 앞에서 웃옷을 훌렁 벗어버렸다.
해를 정면에서 마주친 것마냥, 얼른 고개를 돌린 나는 순간 철렁거리며 떨어진 심장을 주워야만 했다.
“킥! 부끄러워하긴!”
“이런…. 너무 짓궂잖니 케니!”
매튜 역시 당황했는지 정면을 본 채 목을 빳빳이 고정시켜야만 했다.
도망치듯 짐칸에서 기어 나온 나는 자연스레 비어있는 기수 옆자리에 앉았다.
동시에 풍성한 맞바람이 내 머리칼을 휘젓는다.
매튜는 슬쩍 날 보더니 그대로 시선을 정면으로 향한 채 말을 이었다.
“케니, 지금부터 아주 오만한 수도 간호사가 되어야 할 거다. 디펠리스에서 비밀리에 파견된 굉장한 실력자 행세를 해야 해, 알겠지?”
“걱정하지 마세요!”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하의를 갈아입고 있었는지 우당탕거리는 진동이 내 엉덩이를 두들겼다.
“그리고 디안, 넌 소녀의 꿈속에 직접 들어가게 될 거란다.”
“제가 잘 해낼 수 있을까요?”
“넌 시몬 바스티유의 일원이야, 내게 넌 가족이고. 우린 가족을 절대 버리지 않아.”
매튜가 눈가의 주름을 잔뜩 쥔 웃음으로 말한다.
“어색하겠지, 만난 지 채 삼 일도 되지 않은 자들이 내뱉는 가족이라는 말이. 하지만 무법자들에겐 전부야. 그 가족이라는 말이. 사소하지만 이내 끈끈해지고, 나약하지만 어느새 든든한 기둥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래, 내게 자유를 준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이번엔 내가 그들에게 줄 차례다.
내가 그들의 가족이라는 그 믿음을.
“어쨌든 디안, 출발 직전에 촙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매우 많은 교양을 쌓았다고 들었다.”
“상류층 인사들과 어렵지 않게 대화할 정도로요.”
거의 아양과 교태로 점철된 지식이지만.
“그럼 다섯 손의 연금술사를 연기하는 데 그리 어려움은 없을 거다. 대충 어려운 말들을 골라서 내뱉고, 거만한 표정을 짓기만 하면 되거든. 대부분은 케니가 알아서 주도할 거니까 편하게 따라오기만 하면 돼.”
꿀꺽.
두근두근.
30년 전, 매튜 아저씨가 이런 마음이었을까.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그 시작점에 선 기분이.
이런 거였을까.
묘한 흥분과 고취감이 날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그나저나, 시몬과 함께 근처 마을에 들렀다지?”
“네.”
“세상 구경은 좀 했고?”
지린내와 지독한 향수가 공존하는 주점이라면 실컷 구경했죠.
“네, 제법.”
“그리고 또?”
“보스가 제 기억을 되찾을 수 있게 도와주셨어요.”
“시몬이? 그게 무슨 말이냐?”
“감정사에게 데려가 절 감정하도록 했어요.”
내 말에,
아저씨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지난 후에야 아저씨는 천천히 닫았던 입을 열었다.
“시몬은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이상적인 사람이란다. 그와 함께라면 뭐든지 이뤄낼 수 있을 것 같거든. 지금도 마찬가지야.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어, 다만…. 그는 오래전 큰 상처를 받았단다. 그 이후부터 그의 마음이 살짝 망가진 건 아닌지 걱정이 돼.”
난 그런 아저씨의 말을 묵묵히 들어야만 했다.
“마을에서 있었던 일은 그리 오래 담아두고 있진 말아라. 시몬도 가끔 서툰 실수를 할 때가 있거든.”
“감정을 받은 이유가 제 기억 때문만은 아니란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보스는 정말로 제 기억에 도움이 될까 해서 절 데리고 간 거예요. 그렇지 않았다면 보스가 그렇게 친절했을 리가 없겠죠.”
내 말에 매튜 아저씨가 말없이 웃었다.
“그래, 그는 친절하고 자상한 사람이야.”
아직도 눈에 선하다.
조심스레 피투성이가 된 난쟁이를 풀어주고, 끝까지 정중하고 신사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보스의 모습이.
내 대답에,
매튜 아저씨는 안정을 얻은 걸까.
금세 홀가분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저 준비 다 했어요. 디안, 이제 네 차례야.”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케니가 내 목덜미를 잡고 뒤로 끌었다.
“케니?!”
* * *
말끔하고 유려한 검은색 정복.
마찬가지로 말끔하게 넘긴 백발.
거기에 냉철하고 이지적인 외모까지.
매튜 아저씨는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있었다.
물론 케니에 비하면 매튜 아저씨는 약과였다.
몸에 달라붙는, 가슴이 드러난 흰색 의복에 둥근 모자.
그리고 그사이에 삐져나온 밝은 금발.
장난기 가득한 소녀로만 보였던 케니는 성숙하고 정숙한 여인으로, 그러니까 표정부터가 아예 다른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반면에 나는….
“디안…?”
케니가 날 보며 놀란다.
매튜 역시 말없이 대뜸 내 앞에 슬쩍 고개 숙인다.
“내려오셨습니까, 디안 공.”
이에 질세라, 케니도 금방 죽을 맞춰왔다.
“오늘 공과 동행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처음 들어보는, 정말 차분한 케니의 목소리.
분위기에 휩쓸려 나도 한 번 장단에 맞춰본다.
“그럼 지체 말고 가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 * *
작은 마을.
여기저기 난잡하게 널브러져 있는 분변.
진한 흙과 오물 냄새가 진동하는 거리.
와중에 거리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말끔한 벽돌집과 남루한 집의 괴리.
그 사이에서 마차가 세워지고.
세 사람이 내리면,
주위의 시선이 순식간에 집중된다.
누구는 눈조차 마주치기 무서워하고, 누군가는 버릇처럼 고개를 숙이고, 또 누군가는 손바닥을 맞대며 구걸하듯 중얼거린다.
그런 그들 사이를 유유자적하게 지나친 세 사람이 어느 집 앞에 멈추자.
기다렸다는 듯,
건물 안에서 창문으로 밖을 지켜보고 있던 한 쌍의 부부가 맨발로 달려 나온다.
“제… 제발!”
“자비로우신 귀인분들이여 우리 딸을…!”
이에 말끔한 백발의 노인이 그들을 저지하며,
“무례한 놈들, 더러운 몸뚱이 치우지 못해?!”
그런 그를 말리는, 천사 같은 미소를 머금은 금발의 여인이,
“그만, 아말다의 이름으로 민생에 뿌리내린 불행을 지나치는 건 신을 거역하는 것.”
이윽고,
노인과 여인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걸어 나온,
경악스러울 만큼 아름다운 청년이.
“꿈속에 붙들린 애처로운 아이의 울부짖음이 들리는구나.”
입을 열자 주위에서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그 청년의 말에 부부는 바닥에 거의 밀착하듯 엎드리며 울부짖었다.
“제발!! 저희 딸을 살려주십시오!”
“지고하신 귀인님!”
순간의 정적.
이제 구경나온 마을 사람들은 모두 아름다운 청년의 입술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그에 화답하듯,
그의 입술은.
“내 외면할 수 없으니, 도와주겠다.”
구원을 이야기했고,
곳곳에선 찬양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