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검과 화약
맥레인과의 소란스러웠던 외출 이후,
내게 주어진 상황은 예상과는 달리 여유로움의 연속이었다.
더군다나 디글렛을 잡아낸 이후부터 조직원들에게 받는 대접도 꽤 좋아져 이젠 혼자 말을 몰고 은신처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도 한다.
덕분에 이젠 제법 말 타는 것도 익숙해졌다.
반면 나와는 달리, 다른 조직원들은 각자의 일로 모두가 바빴다.
촙은 은신처 근방에 있는 마을이란 마을을 모두 돌아다니며 발품을 팔듯 여러 일을 해 조직의 자금을 벌어왔고,
안드레는 엔제이와 북쪽으로 한 주간 사냥을 다녀왔다.
그 사냥이 제법 성공적이어서 근래 아침엔 요리하는 안나 아주머니의 콧노래가 간간이 들린다.
보스는 매튜 아저씨와 항상 붙어 다니며 진지한 표정으로 어떤 대화를 나누는 데에 여념이 없다.
무슨 이야기인지 궁금했지만,
내가 함부로 들어선 안 될 이야기란 건 잘 알고 있다.
케니는 자신이 꾀어냈던 은행가에게 고발을 당해 꽤 넓은 지역에까지 수배가 걸려 당분간은 은신처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는 상황이 돼버렸다.
은행가가 고발을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는 그의 고객인 난쟁이가 심한 폭행을 당했기 때문인데,
그 과정에서 재키 쪽 사람들이 입을 잘못 놀리는 바람에 케니가 연관되었다는 것이 적발된 것이다.
반면,
빌 비트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선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애초에 마구간의 그 남자가 고발을 해봤자 맥레인이 신경이나 쓸까 싶지만 말이야.
그러고 보니,
요즘은 새로운 사람과 부쩍 친해졌다.
‘비질라’라는 십 대 초반의 여자아이인데 가엽게도 그 아이의 작은 얼굴 한가운데엔 커다란 흉터가 있었다.
어떻게 생기게 된 건지, 감히 물어보지 못할 정도로 심한 흉터.
하지만 그녀는 그 흉터가 무색할 정도로 해맑은 아이였다.
이를테면 지금 내 이마에 눌러앉은 따끔한 햇살만큼이나 쨍쨍하달까.
한쪽에 살짝 실금이 간 둥글둥글한 안경을 낀 그 아이는 저녁마다 책 한 권을 들고 내게 찾아왔다.
그 책의 종류는 대부분 단편의 시집이거나 소설이었지만, 의외로 수준 높은 책들도 있었다.
덕분에 내가 눈감고 지나쳐왔을 세상에 대해,
어느 정도는.
그래 서로 통성명을 할 정도는 알게 되었다.
가령 중립 지역이 정확히 어디인지,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같은, 그런 기본적인 거.
어쨌든, 그 고마운 소녀는 가끔 내가 시집을 소리 내어 읽어주면 특히나 좋아해 주었다.
보랏빛 단발머리를 손가락으로 배배 꼬며, 이리저리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아마 오늘 저녁에도 비질라는 품에 책 한 권을 안고서 내게 오겠지.
오늘 촛불 아래 놓이게 될 책은 과연 무슨 책일까.
말 나온 김에 시집이었으면 좋겠다.
가끔 케니와 안나 아주머니도 멀찌감치에서 다가와 내 목소리를 들어주었으니까.
그나저나,
요즘 맥레인이 보이질 않는다.
원체 캠프 내에서 보기 힘든 사람이지만, 안드레와 엔제이가 사냥 다녀올 동안 단 한 번도 못 본 것 같다.
그와 모종이라면 모종이라 할 수 있는 거래를 하고 캠프로 복귀한 직후,
그는 내게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거다.
거래 내용을 잊은 걸까.
생각해 보니,
내 주위에 만연했던 여유로움이 되려 조바심으로 바뀌는 것만 같다.
애초에 그가 나와 한 약속에 대해 아무런 의미도 두지 않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 분명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야.
* * *
날이 저물자,
매튜 아저씨는 모닥불 근처에 앉아 기다란 풀 두 개를 엮어 피리를 분다.
제법,
서로 다른 높낮이의 음들이 아저씨의 입술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튀어나와 신나는 음악을 만들었다.
그런 매튜 아저씨 옆에 슬금슬금 다가와 자리에 앉는 한 남자.
한쪽 눈을 심하게 다쳐 안대를 쓰고 있는 호리호리한 그 남자의 이름은 ‘포키스’
맥레인 만큼이나 캠프 내에서 얼굴을 보기 힘든 사람이다.
늘 말수가 적은 것처럼 보이지만, 조직원들은 그를 굉장히 신뢰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조직 내에서 실력으로는 최고의 신뢰를 받는 것 같은 맥레인과 달리.
그는 그 자체로 신뢰받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사실 나는 아직 조직원 그 누구도 실제로 겪어본 적이 없어 누굴 평가할 위치가 아니긴 하다.
다만,
흘러가는 공기가, 그리고 그 공기 속에 흐르는 의미가 내게 그렇게 말하고 있다.
넋을 놓은 채,
매튜 아저씨와 포키스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닥불을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
“아….”
포키스가 조용히 날 바라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는 말없이 조용히 내게 오라는 듯 손짓했다.
그 손짓에 홀리듯 가보니, 그는 여전히 말없이 자기 옆에 내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도련님이 왔구먼그래.”
매튜 아저씨는 자리에 합석한 날 보며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로 반겨주었다.
날 도련님이라 부른 것은….
내게 붙여진 별명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말 타는 건 좀 익숙해졌나?”
매튜의 물음에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말 타는 데 소질이 좀 있는 것 같은데, 안드레는 말 타는 걸 처음 배웠을 때 고생을 많이 했거든. 엔제이는 다리가 크게 부러진 적도 있어.”
그는 그렇게 말한 뒤 미소와 함께 품에서 작은 술병을 꺼내 한 모금 들이켰다.
“아, 그러고 보니 포키스와는 이야기를 좀 나눠봤나? 포키스? 자네는? 새로운 조직원과 이야기를 나눠는 봤어?”
이어서 나와 포키스를 번갈아 보던 매튜 아저씨는 눈가의 주름을 실룩이며 대화를 재촉했다.
그러자 의외로,
포키스는 제법 다정해 보이는 웃음과 함께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름이 디안이라고 하던데.”
“맞습니다, 포키스 씨.”
“내 이름을 알고 있군?”
“비질라가 알려줬지요.”
“그 아이는 모르는 게 없지.”
선뜻 내게 내밀어준 손을 외로이 둘 수 없으니, 얼른 그의 손을 붙잡고 흔들었다.
“만스타인 세공소에 잡혀 있었다 들었는데.”
“그랬죠.”
“맥레인의 말을 들어보니 세공소는 이미 쑥대밭이 되어있었다더군. 거기에 대해서 뭐 기억나는 거라도 있나?”
“애석하게도 그 부분에 대해선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괜히 아픈 기억을 들춘 건 아닌가 싶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화제를 바꿀까? 내 얘기를 해주지.”
포키스의 말에 나는 자세를 고쳐잡고 그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했다.
그러자 그가 싱긋 웃으며 말을 잇는다.
솔직히 안대를 쓴 그의 인상은 전체적으로 굉장히 날카로워 보여서,
그 거칠어 보이는 맥레인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기가 세 보였는데.
내 짐작이 틀렸다.
역시 겪어보기 전까진 모르겠다.
“난 어렸을 적에 ‘바브사’라는 곳에서 태어났어.”
“바브사…?”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작은 마을이지.”
그의 말을 따라,
머릿속에 거대한 바다를 그려본다, 그리고 그 바다가 적적하게 두들길 해안가를 만들고,
그 너머 작은 마을을 두루뭉술하게 상상했다.
왜인지 그를 닮아 굉장히 정적인 마을 같구나.
“어느 날, 그러니까 내가 아직 어렸을 때. 우리 마을에 라이튼 쪽 군인들이 찾아오더군.”
이어지는 그의 말에 나는 자연스레 빌 비트를 가는 도중 만났던,
그 저급한 군인들이 떠올랐다.
“그러더니 마을의 어린아이들을 모조리 데려가 버렸어. 그 중엔 나도 포함되어 있었고.”
“어째서 아이들을…?”
“작고 민첩할뿐더러, 주입식 교육을 했을 때 가장 효과를 보는 나잇대였으니까.”
“군인으로 만들어진 겁니까?”
“군인 그 아랫것으로 만들어진 거지, 그러니까 그들의 손에 쥐어질 믿을만한 한 장의 패 정도랄까.”
말로만 들어도 끔찍하구나.
“어쨌든 불행 중 다행인지, 난 같은 또래들 가운데서도 가장 특출났었어. 그리고 그 때문에….”
그가 슬쩍 고개를 내려 보이더니, 안대에 손을 가져다 데었다.
그런 그의 움직임의 의도를 파악한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주 천천히,
포키스는 자신이 쓰고 있던 안대를 슬쩍 들쳐 보였다.
“한쪽 눈을 잃어야 했지.”
안대 속 너머로,
드러난 그의 한쪽 눈은.
보석처럼 이질적인 빛을 내며 반짝였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
그곳엔.
울퉁불퉁하고 거대한 유리알이 박혀 있었다.
“어째서….”
“이러면 좀 더 뛰어난 저격수가 될 수 있었거든.”
“유감입니다.”
고개를 숙여 진심으로 그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는 은은한 미소와 함께 얼른 안대를 고쳐 썼다.
“그래서 어쨌든, 놈들의 의도에 따라 난 최고의 저격수가 되었어. 그리고 최고의 저격수가 되자마자 한 일이 바로,”
그리곤 유쾌한 미소와 함께, 손가락으로 허공을 조준한다.
“내게 이런 짓을 한 군인들의 심장을 꿰뚫었지.”
그 말에 이제껏 조용히 있던 매튜가 식은 웃음과 함께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지금은 시몬 바스티유 최고의 명사수이기도 하고. 비록 활을 쏴야 하는 상황이긴 하지만.”
최고의 명사수.
포키스,
저 남자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인하고 멋진 사람이구나.
* * *
비질라는 어느새 내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무료에 잔뜩 지친 케니도 방금까지 내 옆에서 투정 부리다 지금은 내 옆구리에 얼굴을 파묻은 채 잠이 들었다.
그 사이에서 난,
열려있는 텐트 너머로 들려오는 장작을 씹는 불 소리를 벗 삼아.
비질라가 들고 온, 중립 지역에 관련된 책을 활짝 펼쳤다.
이미 거의 다 읽은 상태라 마지막 장이 코앞인 지금.
나는 누군가가 열정적으로 써 내려간, 중립 지역의 생생한 이야기를 두 눈에 거침없이 담아냈다.
그렇게 마지막 장을 넘기니,
그곳엔 하나의 문장이 크게 새겨져 있었다.
[기억하라, 중립 지역의 규칙은 단 하나. ‘대가’를 지불하는 것]
그 어떤 법에도 얽매이지 않는 무정한 땅.
중립 지역.
그곳에 유일하게 불변하는 법칙 하나.
대가를 지불하라.
그러고 보니,
무법자인 맥레인이 구태여 마구간 주인에게 금화 하나를 던져주라고 한 것을 보면.
그래,
그도 중립 지역의 규칙을 지키고 있었던 거구나.
반대로,
나도 모르게 중립 지역의 규칙에 따라 그에게 은화 하나를 주었으니, 그래.
그는 언제가 됐든,
분명 내게 대가를 지불할 것이리라.
* * *
이른 새벽.
이따금 다 타버린 장작으로부터 흘러나온 매캐한 냄새에 슬슬 잠이 깰 것 같았을 그때.
툭.
무언가 텐트 밖으로 튀어나온 내 머리를 두들겼다.
툭툭.
단단한 무언가가.
제법 불친절한 기색이 만연한 그 두들김에 나는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눈을 떠야만 했다.
맥레인.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내 머리맡 위에 서 있다.
그리곤 눈을 뜬 내 머릴 구태여,
두꺼운 부츠로 몇 번 더 두들긴다.
툭툭툭.
허겁지겁,
부스스 일어나 텐트 밖을 나서자 그는 대뜸 외딴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따라가지 않으면 저 부츠로 어딘가를 까일 것 같아 부랴부랴 그의 뒤를 쫓아가니,
평평한 잔디가 펼쳐진 조용하고 구석진 평지가 하나 나타났다.
그곳엔 나와 맥레인 말고도,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조이, 오늘 떠난다고 하지 않았어?”
“가기 전에 한번 보고 싶어서.”
“뭐 좋은 거라고 봐.”
“저 아름다운 얼굴이 얼마나 일그러질지 궁금하잖아, 그리고 맥레인 자네가 누군가를 가르친다니. 그 귀한 구경거릴 내가 왜 놓치겠어?”
조이,
조이 크레비디.
케니가 한 번 그 이름을 거론한 적이 있다.
연락책을 사이에 두고 굉장히 넓은 지역을 돌아다니며 건수를 잡아 오는 사람.
쟁쟁한 재력가들에게조차 떡밥을 던져 낚아채오는 굉장한 수완가.
그리고 아주 오래전부터 맥레인과 같이 활동한 동료.
“어딜 보냐, 애송이 새끼야.”
아차.
바위에 걸터앉아 있는 조이에게 시선을 빼앗긴 찰나 맥레인의 차가운 목소리가 내 귓전을 때렸다.
두근두근,
빠르게 뛰는 심장을 껴안고 맥레인에게 시선을 집중한다.
그러자 그가 또 껄렁하게 대꾸한다.
“뭘 꼬라봐.”
그럼 어딜 보라고.
슬쩍 눈길을 피하자,
맥레인이 대뜸 내 멱살을 잡아챘다.
“바로 그런 거다.”
“에… 예?”
“그런 병신같은 행동이 널 좆밥처럼 보이게 만든다고. 중립 지역에선 절대로 해선 안 될 짓이지.”
이윽고 그가 사정없이 내 멱살을 잡은 채 바닥에 패대기쳤다.
몇 번을 겪어도 적응할 수 없는, 그의 그 무지막지한 악력에 나는 그대로 바닥을 몇 번이나 굴러야만 했다.
“실제로 넌 좆밥이 맞지만, 적어도 좆밥 티를 내선 안 돼. 설령 죽는다고 하더라도 상대방 손가락 하나 정도는 물어뜯는다는 각오를 내비쳐야 한다는 말이야.”
천천히,
맥레인이 품에서 연초를 꺼내 입술에 문다.
그리곤,
“중립 지역엔 변하지 않는 규칙이 하나 있지.”
불을 붙여 감색 연기를 토해내며 말을 잇는다.
이에,
나는 그가 말하기도 전에 담담히 대답했다.
“대가를 지불하라.”
“그럼 더 잘 알겠네, 나약함을 대가로 지불하면 어떻게 되는지.”
이제야 진짜로 알겠구나.
중립 지역이 왜 무정한 땅으로 불리는지를.
이어서,
맥레인이 허리춤에서 한 손에 들 수 있을 만한 길이의 검을 꺼내 내 앞에 던졌다.
“지옥에 온 걸 환영한다, 좆밥아.”
기꺼이.
대답 대신 나는 말 없이 일어나,
내 앞에 놓인 녹슨 칼자루를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