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6화 (16/365)

16화. 바람처럼

다르다.

어제와 비교해서 모든 게 달라.

달리는 내게 맞불어오던 둔중한 바람도,

금방 무거워지기 시작하던 상체도,

슬슬 열기가 달아올라야 하는 두 다리도.

내 의지를 버겁게 만드는 그 모든 무거운 것들이,

지금은 모두 경쾌하고 가볍다.

물론 달리기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지만, 그 느낌이란 게 있지 않은가?

이로써 잠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느꼈던 미묘한 위화감의 실체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내 몸은,

내 몸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세공소에선 무슨 일이 있었는가.

아리아의 그 여린 눈이 감긴 뒤에 나는,

무엇을 했는가.

보석을 감정하던 난쟁이는 왜 날 호박석이라 했는지,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내 몸에 들어가 있는 ‘내용물’은 대체 뭔지.

막연히 떠오르는 것이라곤,

날 사줄 사람이 돌연 마음을 바꿔 여성인 보석을 사고 싶다고 했고,

그렇게 아리아가 나타났지만, 또 구매자는 돌연 마음을 바꿔 그녀를 호박석으로 만들어달라고 했어.

본디 인간 호박석을 만들려면 유년 시절부터 철저하게 관리되며 만들어져야 했지만,

또 반대로 유리의 시험을 다섯 번이나 거쳤다면 금방 호박석에 이를 수도 있었기에.

그래, 그래서 그녀는 호박석으로 만들어지려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 들어가는 그 내용물은 분명.

구매자의 ‘가보’라 했지.

타다 만 종이 마냥, 깊고 진한 어둠에 얼룩진 기억들을 긁어모아 보니,

정황상 그 난쟁이가 날 보며 말했던 것이 모두 사실이라면.

내 몸에 들어있는 그 내용물이란 건 틀림없이.

구매자의 ‘가보’

“헉… 헉….”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와중에,

내 입에서 거친 숨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슬슬 두 다리엔 버거움이 느껴져 오고 있었고, 살갗에 맺힌 땀방울은 햇살과 그 햇살이 묻은 내 살결을 품어 수정처럼 반짝였다.

천천히 빈손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자,

나는 다시 생각에서 벗어나 지금 내 상황을 직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덕분에,

내 나름대로 결론지을 수 있었어.

생각에서 아무리 헤엄친다 한들 무슨 소용이야?

그렇다고 잃어버린 기억 위에서 멍청이처럼 살아가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의 잔재에 대한 배신이다.

그건 내 출신과 그 출신에서 오는 아픔을 부정하는 것.

그래서 꼭 찾아야만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찾기 위해선,

달려야 한다.

맥레인의 말대로.

지금은 그냥 죽 닥치고, 묵묵히 이를 씹으면서.

그에게서 은화 한 개로 사들인 고통을 소화 시키면 될 뿐이야.

난 눈을 떴고,

그 눈을 뜬 곳이 하필이면 전쟁으로 모든 사상이 증발한 땅인 ‘중립 지역’이었지만.

그 중립 지역에서 자립하며 살아가고 있는, 가족 같지만 가좆 같은 무법자들의 틈에 끼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기회 삼아야만 해.

그러니까 이 말들의 요지는,

내가 강해져야 한다는 거다.

뭐든지,

내가 마음먹은 그 어떤 것도,

여기선 강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흐억… 흐억….”

어제와 달리 좀 늦게,

첫 번째 한계가 찾아왔다.

하지만 역시나 어제완 달리,

난 좀 더 빨리.

이를 씹고 악을 부려 그 한계를 넘으려 했다.

* * *

발작하듯 상체를 일으킨다.

주위를 살펴보니 역시나 작은 천막.

그 구석에 놓여있는 안드레의 가죽 가방.

나는 어제,

또 밤새 멈추지 않고 달리다 혼절했었다.

하지만 그 극한에 치달았던 어제의 내 신체는,

오늘 더 경쾌하고 가벼워졌을 뿐이다.

처음엔 이런 내 몸의 현상이 불편하고 낯설게만 느껴졌지만,

이걸 두 번 경험 해보니.

그래 이것마저도 기회처럼 느껴진다.

기억을 찾아야 하는, 그 실마리에 불과했던 의문점조차 기회로 느껴져.

그래서 난 좀 더 호쾌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안나 아주머니가 해주신 스튜를 해치우고 곧장 숲속으로 향했다.

이제 미음이 아닌, 제법 건더기가 들어간 스튜도 목 너머로 넘길 수 있었다.

혓바닥에 휘감기는 맛이라는 감각이 너무나 황홀해 잘못하면 신음을 내뱉을 정도였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한 고양감에 휩싸인 내겐 그것조차 그저 자극적인 감각 중 하나로 느껴질 뿐이었다.

그렇게 숲속을 헤치고 들어가자 나타난 평지엔,

역시나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맥레인이 무심한 표정으로 날 내리 깔보며 입을 열었다.

“왔냐, 뛰어.”

그 말에 난 곧바로 고개를 끄덕인 뒤, 녹슨 검자루를 부여잡고 숲 깊은 쪽을 향해 냅다 뛰었다.

또 어제완 다른 감각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이젠 마주 오는 바람이 날 앞에서 끌어당기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전엔 뛰어넘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둔덕처럼 솟은 뿌리 덩굴 위를 가볍게 뛰어넘으며,

상체를 솜씨 있게 비틀어 잔가지들을 피하기도하면서.

그렇게 어제보다 훨씬 더 늦게 찾아온 한계를,

어제보다 한참 더 빨리 깨부쉈다.

* *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기어이 의식을 잃어버렸다.

첫날과 비교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오래 뛰었지만 늘 한계는 찾아왔고, 그 한계 너머엔 극복 불가능한 절벽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 눈을 뜬 내겐 또 다르게 느껴진다.

그 절벽을 넘을 수 있을 것 같거든.

이젠 맥레인을 만나기 위해 숲으로 향하는 길이 익숙하다.

그렇게 평지에 다다르자,

어제완 달리 맥레인이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곧 그가 내뱉을 짧은 말을 기다리며 즉시 숲속으로 뛰어갈 준비를 하는데,

맥레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생각보다 몸이 잘 움직이나 봐?”

그리곤 대뜸 내게 다가와 몸 구석구석을 손으로 훑기 시작했다.

“보석으로 만들어지면서 여러 시약을 받아들였다 했지? 그 후유증이라도 생긴 거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회복이 필요 없는 몸이라니, 딱 쓰고 버리기 좋을 말단 잡졸에게 필요한 능력이긴 하네.”

그 말에 난 자연스레 눈썹이 찌푸려졌지만,

맥레인은 좀 더 진지한 눈으로 내게 말을 이었다.

“바꿔 말하면, 그만큼 너에게 부담이 큰 능력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네?”

“안드레도 너와 비슷해, 그놈은 ‘안다 벨루디’란 곳에서 탈출한 실험체였거든.”

“안다… 벨루디?”

“제약 회사야, 연금술사와 달리 그쪽 방면으로 존나 똑똑한 새끼들이 모인 곳이지만, 또 연금술사와 같이 어딘가 약간 나사가 빠진 또라이 새끼들이 모인 곳이기도 하거든.”

맥레인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가리켰다.

“놈들은 생체실험을 밥 먹듯이 해. 그래서 회사 건물 대부분은 중립 지역에 있지, 윤리의식 따윈 따지지 않는 유일한 곳이 바로 이 중립 지역이니까.”

“생체실험…?”

“따지고 보면 안드레도 너와 비슷한 과야.”

유쾌한 그에게서 그런 암울한 과거가 있을 줄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는데.

그만큼 그가 늘 쾌활했으니까.

“어쨌든, 안드레도 내게 싸우는 법을 배우고 싶다며 입단 초기에 날 귀찮게 했어. 그리고 너에게 했던 것처럼 놈에게도 죽어라 달리기를 시켰지.”

“그래서… 어떻게 됐죠?”

“너처럼 회복이 말도 안 되게 빠른 거야. 보통 그렇게 기절할 때까지 뛰면 사흘은 몸져눕는 게 정상이거든.”

맥레인은 관자놀이에 대고 있던 손가락을 떼며,

잠시 씁쓸한 표정을 지은 뒤 품에 있던 연초를 꺼내 들었다.

“알고 봤더니 안다 벨루디가 안드레에게 했던 생체실험 때문이었어. 그 시험의 내용은….”

그리곤 작은 부싯돌을 부딪쳐 연초에 불을 붙인 맥레인은 크게 한 모금을 빨아들인 뒤 감색 연기와 함께 말을 뱉었다.

“신체의 제동 역할을 하는 모든 부분을 거세하는 것이었지.”

“그게… 대체….”

“이를 태면 사람은 뒤질 때까지 뛰지 못해, 진짜 뒤질 것 같으면 달리기를 멈추지. 설령 의지가 있다고 한들 신체가 그걸 억제해. 하지만 안드레는 아니야, 놈은 그 제동이 거세되어서 한계라는 걸 몰라.”

“세상에.”

“한계 그 이상의 모든 행동을 제 수명과 고대로 바꿔먹는, 초 같은 인생을 살고 있었던 거야. 나도 몰랐고, 안드레도 몰라서 그저 미친 듯이 뛰었는데 그놈은 3일을 먹지도 않고 계속 뛰었어.”

어쩌면,

나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안드레는.

“안드레에게 관련된 진상을 알아본 뒤론…, 그에게 검 대신 작은 쇠뇌를 붙여줬지. 재능이 없다고 둘러대면서.”

“그럼 안드레는 자신의 몸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직도 모르는 겁니까?”

“그래, 그걸 알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 같았거든. 그게 아니더라도 한 열흘은 잠 안 자며 우울해할까 봐서. 그 모든 것 때문에 괜히 제 수명만 깎을 것 같으니까.”

이어서 맥레인이 내게 조심스레 물었다.

“너도 혹시 안드레와 비슷한 증상일 수도 있어.”

“그런데 안드레완 달리… 저에겐 이렇게까지 자세히 알려주신 이유가 뭐죠?”

“그야… 넌 어쨌든 명확한 한계가 있었으니까. 점점 늦춰지긴 했지만, 새벽 내내 뛰고 나면 어느 순간 기절했으니까.”

“그걸 어떻게… 늘 안드레가 절 발견하고 천막에 데려오는 줄 알았는데….”

내 말에 맥레인이 머쓱한 표정으로 연초를 바닥에 던지며 말했다.

“어쩌다가 한 번 본 것뿐이야, 새끼야.”

여기서 더 사족을 붙였다간,

뭔 일이 생길 것 같아 나는 그냥 입을 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안드레와는 달리 넌 다른 모종의 이유로 신체 회복이 빠른 것 같은데…. 혹시나 그게 네 수명을 깎아 먹는 걸 수도 있잖아?”

이어서 맥레인은 한숨을 푹 쉬더니,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이렇게 중립 지역에 모여드는 놈들은 하나같이 상처투성이야. 그중에 무법자들에게 꼬여 드는 놈은 진짜배기들뿐이지.”

“진짜배기들?”

“세상에서 낙오된, 존나 불쌍한 새끼들.”

그리곤 그가 허리춤에 손을 얹으며 특유의 진지한 목소리로 내게 묻는다.

“세공소는 진창이 돼서 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는 건 불가능해, 그렇다고 네가 모든 걸 기억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이젠 네 의사가 제일 중요해. 설령 오늘 있었던 행동 때문에 내일 뒤질지라도, 네 의사였다면 존중할 수 있을 테니까.”

“절 존중해주신다고요?”

“어쨌든 너도 시몬 바스티유의 일원이잖아. 아무리 개차반 같은 새끼라도 일단 일원이라면 존중받는 게 마땅해. 그리고… 너도 디글렛을 잡아 한 건 하긴 했잖아? 너랑 나랑 시작부터 좀 꼬이긴 했지만….”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 대답에 맥레인은 괜히 크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제게 기회를 제공해 주신 거요.”

“기회?”

“중립 지역이고 무법자고를 다 떠나서, 지금 이 세상을 좀 더 정상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기회.”

그 말에 처음으로,

맥레인이 작게 미소지었다.

“그래 맞아, 세상은 힘없는 새낄 봐주지 않아.”

“그래서 힘 있는 새끼가 돼 보고 싶어요, 설령 오늘 때문에 내일 뒤질지라도.”

“그래, 네 뜻이 그러하다면.”

이윽고,

평소 내가 알던 맥레인으로 돌아온 그가 냉정한 목소리로 내게 말한다.

“뛰어, 바람처럼 뛸 수 있을 때까지.”

그 말에 나는 녹슨 검자루를 부여잡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숲속을 향해 뛰어들었다.

어제의 바람은 날 당기는 밧줄이었지만,

오늘의 바람은 내 등을 떠미는 손이었고.

어제의 가벼운 발놀림은,

오늘 날개 달린 작은 새 같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결코 바람처럼 뛸 수 없으니까.

나는 오늘도 한계 그 너머를 향해 뛰고,

또 뛸 것이리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