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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노래-17화 (17/365)

17화. 안녕 여름, 안녕 가을

달리기를 시작한 지 나흘째가 되던 날.

맥레인은 돌연 아무런 말 없이 캠프를 떠났다.

그러나 그가 떠나간 뒤에도 난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맥레인이 사라지고 홀로 묵묵히 달리기를 시작한 지 7일째 되던 날.

슬슬,

내 몸으로부터 경이로운 감각들이 하나둘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절절하게 체감했다.

더딤이 없는 육체가 가져오는 파급력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를.

이제 나는 바람을 가르며 달릴 수 있다.

귓가엔 찢어진 듯한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아른거렸고,

앞뒤로 흔드는 팔과 손가락 사이엔 풍성한 바람의 결이 만져졌으며,

내가 스쳐 지나간 자리엔 낙엽이 파도를 치고 가지가 춤을 춘다.

땅을 한 번 박차면 주위 풍경은 한바탕 길게 늘어지고, 발목에 힘을 주어 연달아 땅을 치대면.

정말 이대로 날아가 버리진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마주 오는 바람결에 몸이 빨려들듯 나아갔다.

첫날엔 캠프 주위 숲을 크게 한 바퀴 도는 데만 꼬박 하루가 걸렸지만,

지금은 해가 떨어지기도 전에 숲 한 바퀴를 완주했다.

이 모든 것이 불과 보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달성한 결실.

자유라는 이름 아래 스스로 키워낸 내 첫 과실이다.

그리고 그 과실의 맛은,

감히 석양이 잔뜩 묻은 구름보다 더 달았다 단언할 수 있지.

그렇게 어제보다 더욱 빠르게, 내일보다 한참 늦을 숲 한 바퀴를 모두 완주한 뒤에는.

캠프 뒤에 있는 높은 절벽에 걸터앉아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서 푸름에 가려진 별의 위치를 맞춰보거나, 비질라가 빌려준 책을 탐독하며 지금 이 세상을 배워갔다.

신체가 더딤 없이 나아가는데, 그것에 견줄 만큼은 아니더라도 제법 쓸만한 지식을 갖춰야 할 것 같아서.

오늘 가져온 책은 중립 지역의 근본을 이해할 수 있는 역사에 관련된 책이다.

제법 두꺼운 책이었지만 내겐 그리 버겁게 느껴지진 않는다.

애석하게도,

오로지 시각으로만 하늘의 별자리를 외워야 했던 세공소 시절, 그로 인해 강제적으로 길러진 집중력이 책을 읽을 때 굉장한 이점으로 작용했으니까.

책의 내용은,

왜 중립 지역이 이토록 씁쓸한 땅이 되었는지.

그것을 이해시켜주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티바르 그리고 라이튼.

두 제국이 벌인 전쟁이 장기화가 되면서 전선 역시 고착화 되었는데, 그 고착된 전선이 바로 중립 지역이다.

본디 티바르와 라이튼의 국경이었던 중립 지역은 절반이 안야 숲으로 뒤덮여 있었으나 전쟁으로 인해 숲이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그 숲의 주인이었던 귀 큰 자들 일부가 무법자로 변절했다.

그 외에 계속되는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국경에 인접해 있던 마을과 소도시는 자기방어를 위해 자주적인 독립을 실행하였고, 그 결과는 그 어떤 제국의 법조차 잣대를 들이밀지 못하는 무법지대가 되었다.

이런 배경이 완성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전쟁의 장기화로 두 제국의 움직임이 점점 소극적인 형태를 띠게 되면서 오늘날 초라하기 짝이 없는 소규모 병력으로 조잡한 싸움을 이어나간 것이 가장 결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자연스럽게,

우리가 아는 무법지대인 중립 지역이라는 땅이 성립된 것이다.

마을은 각자 자신들이 세운 법 아래서 살아가고, 그 마을 밖에선 무법이라는 이름 아래 각지에서 모여든 거친 자들이 살아간다.

그리고 그 거친 자들 가운데 한 명이,

바로 나지.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속으로 되뇌어 본다.

그러고 보니 맥레인과 함께 남쪽 빌 비트로 내려갔을 적이 생각나네.

제국의 병사라곤 쉽사리 생각하기 힘든 껄렁한 자들, 그런 그자들이 감히 들어가지 못하는 높은 첨탑이 세워진 마을.

과연, 책을 읽고 나니 그 모든 것들이 다 이해가 되는구나.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산등성이 너머로 사라져간다.

슬슬,

캠프로 돌아갈 시간이다.

* * *

캠프에 돌아오기 무섭게 날 반겨준 것은,

안나 아주머니였다.

두건으로 머리를 싸매고 팔짱을 낀 채 모닥불을 쬐고 있던 그녀는 날 보곤 옆에 앉으라며 손짓했다.

그런 그녀의 손짓에 이젠 너무나 익숙한 모습으로 다가가 그 옆에 앉는다.

“슬슬 시작하려나 봐.”

내가 앉기 무섭게, 안나 아주머니는 커다란 천막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무엇을요?”

“큰 거 한방.”

“큰 거 한방?”

“계절마다 여기저기서 모은 정보를 바탕으로 큰일을 치르는 거야, 곧 가을이 다가오고 있으니까.”

그러면서 안나 아주머니는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순탄하게 여름과 작별했으면 좋겠구나.”

그 말에,

난 직감적으로 그녀가 말하는 것이 굉장히 위험한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때문에,

“저도요.”

위로를 담아 그녀에게 대답했다.

그렇게 한참 안나 아주머니와 나란히 앉아 모닥불을 쬐는데, 거대한 천막 안에서 한 남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맥… 레인?”

“씨를 붙여야지, 씨방새야.”

말도 없이 사라졌다가, 말도 없이 나타났네.

“언제부터 캠프에 계셨던 거죠?”

“해 떨어지고 나서부터.”

사실, 왜 나를 먼저 보러오지 않았냐 묻고 싶었지만.

그런 걸 물었다간 비아냥만 들을 것 같아 난 서둘러 입맛을 다셔야만 했다.

그래, 이런 비슷한 감정.

세공소에서도 짤막하게나마 느껴본 적이 있지.

날 사준다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드디어 내가 가치 있었음이 증명되었을 때.

겪었던 고통만큼 크게 느껴졌던 성취감 같은 거.

그러니까 지금은,

당신에게 내가 얼마큼 성장했는지.

내 성취를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었단 말이야.

그리고 당신이 감탄하길 기대하고 있었는데.

막상….

그의 얼굴을 보니 감탄은커녕 욕이라도 안 얻어먹으면 다행이겠구나 싶다.

마음속 뭔가가 팍 식어버린 느낌.

“왜 갑자기 혼자 풀이 죽어있어?”

맥레인이 내게 쏘아붙이듯 말하자,

“맥레인, 네가 똥 씹은 표정으로 디안을 쳐다보니까 그렇지.”

안나 아주머니가 되받아쳤다.

“그럼 웃기라도 할까?”

이에 질세라, 맥레인이 억지스러운 웃음을 짓는다.

안나 아주머니는 결국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홀로 남은 나에게 맥레인은.

“따라와.”

천막 안으로 들어가며 내게 턱짓했다.

그 말 한마디에,

팍 식었던 마음속이 또 뜨거워진다.

헐레벌떡 일어나 그의 뒤를 따라 천막 안으로 들어서자.

제법,

과열된 공기가 내 안면을 두들긴다.

맥레인, 보스, 매튜.

엔제이, 포키스, 재키.

케니와 안드레, 촙까지.

캠프 내 굵직한, 그러니까 존재감이 확 다른 사람들이 천막 안에 둥글게 모여 앉아 있었다.

그런 그들 사이에 내가 끼다니.

“맥레인?”

“너도 들어야지, 같이 해야 할 일인데.”

꿀꺽.

그의 말에 괜히 진지한 표정으로 팔짱을 껴본다.

곧,

보스가 천막 안에 모인 이들을 한 명 한 명 바라보다가 낮고 근엄한 말투로 운을 뗐다.

“자 그럼, 시작해 보자고. 우선 포키스.”

“서쪽, 아빈에서 오는 화물이 있어. 낙오된 귀쟁이를 노예로 팔아 거부가 된 시도르망 상단의 물건이지.”

그의 말에 맥레인이 품에서 연초를 꺼내 들며 묻는다.

“경호는?”

“엔트로피 급 길드에서 고용된 용병이 두 명, 나머지는 볼 거 없어.”

“존나 빡세겠는데?”

포키스의 말에 맥레인은 눈썹을 찌푸리며 감색 연기를 크게 내뱉었다.

이어 매튜가 단 안경을 고쳐 쓰며 옆에 놓인 양피지를 꺼내 들어 말을 잇는다.

“자료를 조사해 봤는데, 화물의 규모가 꽤 커. 우리 쪽에서 마차를 여러 대 준비해야 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엔제이가 히죽 웃으며 맥레인에게 말했다.

“맥레인, 솔직히 너 혼자서도 그쪽 놈들 경호를 싹 다 걷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리고 네가 싼 똥을 밟아 거하게 넘어지겠지.”

“조용.”

묵묵히 있던 보스가 서둘러 그 둘의 말을 자른다.

“경로랑 우리가 덮칠 동선까진 모두 계산해 놨어, 이걸로 결정한다면 케니와 촙이 곧바로 인근 마을 경비를 매수해서 빠져나갈 구멍도 마련할 수 있고.”

이어지는 매튜의 말에 보스가 고개를 살짝 저으며 엔제이를 바라보았다.

“일단 다 들어보자고, 나도 시도르망 새끼들이 예전부터 아니꼽긴 했지만 맥레인 말대로 엔트로피 쪽 용병이 걸려. 만에 하나 그들 중 하나가 맥레인이나 포키스가 아닌 다른 사람을 노리고 든다면 일이 걷잡을 수가 없어져.”

이내 말을 마친 보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엔제이가 벌떡 일어나 말을 이었다.

“안드레랑 사냥을 나갔을 때 얻은 소식이야, 북쪽에서 내려오는 원정대랑 마주쳤는데 그놈들이 레드 로핀을 사냥하기 위해 내려왔다더군.”

그 말에 기둥에 껄렁하게 기대있던 재키가 묻는다.

“규모는?”

“40명 남짓.”

“레드 로핀을 잡는데 고작 40명?”

“바꿔 말하면 우리가 껴들어도 몫이 제법 크다는 거겠지, 일단 뒷맛이 깔끔한 일이기도 하니까.”

약속이라도 한 듯, 매튜가 또 옆에서 양피지 하나를 꺼내 든다.

“엔제이가 말해서 조사를 해두긴 했는데, 에트두돈 산맥에서 내려온 레드 로핀 하나가 마을 두 개를 작살 냈다나 봐. 놈의 트로피에 걸린 현상금만 금화 이백 개고.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놈은 털끝부터 발톱까지 모조리 값비싸지.”

매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키가 비아냥거렸다.

“원정대 새끼들은 믿을 만한 놈들이 아니야, 놈들과 같이 일하면 분명 위험부담이 큰일을 우리에게 몰아줄걸. 그러다 누구 하나가 죽어버리면 본인들 몫이 생기니까. 끝엔 다 뒤질 때까지 몰아세워서 뽕이란 뽕은 다 뽑고 사냥감도 지들끼리 다 처먹을 거다.”

재키의 비아냥에, 대부분이 동의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자 보스는 곧장 맥레인을 지목했다.

“맥레인.”

“티바르 쪽 병사들이 구석진 마을 하나를 삼켰어, 문제는 그 구석진 마을에 금광이 있다는 거고.”

이어 매튜가 손에 든 양피지 뭉치를 넘기며 꽤 씁쓸한 표정으로 운을 뗐다.

“마을에 노인과 어린아이를 모아다가 산채로 태워 죽였다고 하더군. 금을 내놓지 않은 것에 대한 보복이겠지. 아쉽게도 첨탑을 세울 만큼 힘 있는 마을이 아니라서 금세 군인 놈들이 점거해버렸어.”

그 말에 안드레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그 씨발새끼들.”

“다음 재키.”

보스가 마지막으로 재키를 지목하자 재키는 곧바로 자세를 바르게 하고 숨을 골랐다.

“라이튼의 국경도시 앰바르그에서 보름 뒤에 구름 하나가 떠, 그 구름에 타고 있는 게 누군지 알아? 바로 앤서니 트와드야. 군수업체 앤서니 트라이던트의 수장! 그 새끼가 가족을 데리고 여행을 떠난다더군.”

재키의 말에 맥레인이 꼬집듯 되물었다.

“확실한 정보야?”

“확실해, 내가 확실하지 않은 걸 씨불인 적 있나?”

“많지.”

“이런 씨발, 맥레인. 이건 진짜라고.”

이제 보스는 아예 이마를 짚은 채 모두에게 큰소리쳤다.

“그만 좀 해라! 매튜?”

“정보 하난 확실해, 근데 여행을 목적으로 구름을 탄 건 표면적인 이유야. 사실은 북쪽 지대 샤히르에 차세대 무기를 넘기기 위해서라고 하는군.”

“그건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건데?”

“시몬, 정보라는 건 거미줄 같은 거야. 가장자리에서부터 진득이 파고들면 어느새 중심부에 도달하기 마련이지. 뭐 덕분에 디안이 얻은 목걸이를 아직도 팔지 못했지만.”

매튜는 말을 마치며 내게 살짝 윙크해 보였다.

“시몬, 만약 샤히르에 그 물건이 넘어간다면 거기도 얼마 안 있어 큰 피바람이 불겠지.”

“그래서 그 무기라는 게 뭔데?”

“인챈트 된 물건이야. 그것뿐이겠어? 놈이 타는 구름 안엔 온갖 값비싼 물건이 천지일걸.”

인챈트.

그 말에 모두의 표정이 급변했다.

“공인된 난쟁이가 한 거야?”

“당연하겠지, 앤서니 트라이던트가 설마 열화된 인챈트를 했을까?”

도무지 못 따라가겠다.

슬쩍,

맥레인을 바라보니, 내 눈길을 알아차린 그가 반응한다.

“왜.”

“구름은 뭐고, 인챈트는 뭔데요?”

“구름은 구름이고, 인챈트는 인챈트야.”

아하.

계속되는 내 눈길에 결국, 맥레인은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 숙여 내게 속삭이듯 말을 이어갔다.

“구름은 비행선을 말하는 거야, 바람기름 잔뜩 처바른 배 같은 거지. 그리고 인챈트는…. 그래, 마법사가 부리는 마법 같은 거야.”

“마법…?”

“그만큼 존나게 대단한 힘을 발휘하는 물건이란 뜻이지.”

맥레인의 설명을 들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려는 찰나,

보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모두에게 들리도록 소리쳤다.

“시몬 바스티유는 지금부터 앤서니 트와드를 턴다, 굉장히 위험하겠지만, 반대로 위험한 만큼 그 보상도 크지. 물론 조직원 중 누구든 위험에 처할 것 같으면 바로 발을 뺄 거다. 그러니까 모두 준비 단단히 해.”

그리곤 모두와 눈을 차례로 마주치면서,

“전쟁의 광기가 우릴 만들었다, 그리고 우린 그 광기를 부수기 위해 모였지. 구름을 습격하는 그날 역시 우리는 틀림없이 그 광기를 부수게 될 것이다.”

괜히 나까지 뜨겁게 만드는,

그런 멋진 말을 포효하듯 내뱉었다.

그렇게 여름을 작별하면서,

다가오는 가을의 안녕을 위해.

조직의 중대사가 결정되었다.

“아직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 그런 널 위해 아주 괜찮은 조언 하나 해줄까?”

이제 다들 흩어지는 와중, 맥레인이 나를 불러세웠다.

“그게 뭐죠?”

기대감에 찬 내 물음에,

맥레인이 싱긋 웃으며 대답한다.

“처신 잘하라고. 안 그럼 작업 중에 뒤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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