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작은 것부터
이른 아침.
제법 쌀쌀해진 날씨.
부랴부랴 일어나 모닥불 맡에 쪼그려 앉는다.
짧지만 여름의 끝에 서성이던 그 뜨거움에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그리 차가운 바람도 아닌데 불어올 때마다 몸이 슬슬 떨린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손에 묻은 차가움 얼른 가져가라고 불 앞에 내밀어 삭삭 비벼 본다.
오늘 숲엔 맥레인이 와 있을까?
한껏 달라진 내 모습을 보면서 어떤 말을 할까.
혹, 그가 내게 새로운 걸 가르치려 들지도 모르겠다.
마음 단단히 먹어야겠군.
그렇게 모닥불 앞에 한참 동안 멍하니 있던 내게,
촙이 다가왔다.
“디안, 오늘은 나랑 같이 움직여야 할 거야. 보스가 시킨 게 있거든.”
참, 그렇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지.
“그래, 무슨 일인데?”
“정확히는 매튜 아저씨가 시킨 일이야, 구해야 할 물건이 있거든.”
“좋지, 안드레는 같이 안 가?”
내 물음에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고개를 젓는 촙.
“안 좋아, 매우.”
“무슨 일인데?”
그러고 보니 근래는 아침에 눈을 뜨기 무섭게 숲에 나가 저녁에 돌아왔으니 캠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구나.
촙은 한참을 망설이다 이마 위로 삐죽 튀어나온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말했다.
“최근에 그놈이 술에 꼴은 상태로 케니한테 고백했나 봐.”
“그래서?”
“내가 왜 안 좋겠다 했겠어.”
“그렇군….”
“어쨌든 준비하고 나와.”
“알겠어, 금방 나갈게.”
설마 텐트 안에서조차 그 모습을 보기 힘들었는데, 그런 사정이 있었을 줄은.
조만간 그의 곁에 진득이 붙어 위로를 건네줘야겠다.
그건 그렇고,
정말 간만의 외출이네.
맥레인과 빌 비트를 다녀온 지가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참 빠르다.
그 빠르게 지난 시간 속에서,
아주 많은 게 변했지만 말이야.
그리고 그 많은 변화 탓일까?
이번 외출은 뭔가 좀 더 여유로움이 넘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아무래도 동행하는 사람이 내 또래인 촙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곧바로 모닥불에서 일어나 안드레의 텐트로 향한다.
그곳에서 매튜 아저씨가 주신 작고 낡은 가죽 가방을 메고 캠프 바깥을 향해 걷는데,
“지금 나가는 거냐? 몸조심하고.”
방금 막 천막 안에서 나온 매튜 아저씨가 내게 인사를 건넨다.
“그래, 다녀오는 건가? 웬만하면 일찍 돌아오도록 해.”
그 뒤로 천막 안에서 부스스한 머리로 일어난 시몬도,
“적어도 저번처럼 호구 새끼마냥 당하지 마라.”
그리고 캠프 바깥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만난,
감색 연기를 내뱉던 맥레인까지.
모두에게 인사를 받고 보니 새삼,
내가 진짜 그들의 가족이 되었구나 싶다.
“이제 제법 무법자 태가 나는데?”
능숙하게 내 말에게 바람기름을 바르려 하는데,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촙이 씩 웃는다.
“최근에 말 타는 연습을 좀 했다며?”
“그래 봤자 조금이야.”
“조금이라도 아예 안 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지.”
말발굽에 바람기름을 능숙하게 바르던 촙은 이내,
단숨에 날아오르듯 말 위에 올라타고서 내게 선포하듯 말한다.
“실력 좀 볼까? 안트레이 삼거리까지 쉬지 않고 달릴 거야, 잘 따라와 보라고.”
“뭐? 잠깐만!”
허둥지둥하는 내 반응이 재밌다는 듯, 깔깔 웃던 촙은 곧장 고삐를 휘둘러 달려나가고.
이제 막 부랴부랴 안장 위에 올라탄 나는 그를 놓칠까 바삐 뒤따랐다.
* * *
다그닥 다그닥.
바람 위에서 내려온 말이 사납게 땅을 치댄다.
간신히 촙의 뒤를 쫓으며 이동하기를 삼십 분.
그의 뒤를 쫓느라 주위 풍경조차 신경 쓰지 못했던 난 그제야 우리가 큰 길목에 당도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오, 제대로 쫓아 왔네?”
“몇 번이나 놓칠 뻔했어.”
“킥킥, 하지만 놓치지 않았잖아?”
“그래서, 우리가 가려고 하는 곳이 어딘데?”
바람 위를 달리던 탓에 그에게 하지 못했던 질문을 이제야 내뱉는다.
“센트리우스.”
“센트리우스?”
“중립 지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도시.”
“도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진짜야?”
“그래, 진짜야.”
“빌 비트 같은 마을이 아니고?”
“그런 코딱지만 한 마을과는 비교조차 안 되지.”
이윽고 촙이 킥킥거리면서 뒤돌아 날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세상이란 어떤 곳인지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느끼게 될 거야. 그러니까 눈과 귀, 코를 모두 열고 진득이 경험해보도록 해.”
그의 말에 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책에서 말하길 중립 지역의 거대 도시들은 그 위상이 각각 독립된 하나의 국가와 같다고 했다.
이전에 들렀던, 그리고 보았고 경험했던 것들과는 그 느낌이 아주 다르겠지.
촙의 말대로,
지금 나는 진짜 세상을 마주하려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천천히 말을 몰아 거대한 길목에 들어서자 슬슬 울창했던 주위 숲이 듬성듬성해졌다.
때깔 좋던 구름도 이 길목 위에선 군데군데가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윽고 한번 굽이진 길을 따라 쭉 이동하자,
길 끝에 거대한 무언가가 내 눈에 들어왔다.
“자, 잘 봐라. 저기가 바로 센트리우스야.”
드높은 흑색 장벽.
그 너머로 뿜어져 나오는 잿빛 연기 기둥이 하나 둘…, 셀 수 없이 많다.
도시로 들어가는 입구 주위엔 좌판을 켜놓은 상인들로 문전성시.
곳곳엔 크게 실랑이를 벌이는 자, 거나하게 취해 아무 곳에나 구토하는 자, 죽었는지 살았는지 가늠하기 힘든 미동 없는 자까지.
서서히 느껴지는 복잡하고 요란한 소음에 순식간에 머리가 어지러워 온다.
“왜 저 상인들이 도시 밖에서 물건을 파는지 알아?”
“…왜?”
“이 도시가 정한 규칙에 어긋나는 물건을 팔고 있기 때문이야.”
“하지만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장사를 하고 있는데?”
“그야, 벽 바깥은 엄연히 도시 밖이니까. 말 그대로 ‘무법 지역’이니 장사해도 누구 하나 제재하지 않는 거지.”
“이런 세상에.”
출처를 알 수 없는 짐승의 생고기,
음산한 기운이 넘실대는 귀금속.
흙탕물에서 갓 건져 올린 듯 금방 부러질 것만 같은 무기들.
그리고….
철장 우리에 갇힌 사람들, 귀 큰 자들.
그런 그 사이를 비집고 유유히 도시로 향하니 복잡미묘한 감정이 요동친다.
설상가상,
도시 입구를 지나치기 무섭게 엄습하는 무시무시한 악취에 하마터면 말 위에서 욕지기를 내뱉을 뻔했다.
“우… 윽….”
“킥킥, 놀랐냐? 이게 바로 진짜 세상이 풍기는 냄새다.”
도시 초입, 길 양옆으로 뚫려 있는 하수도는 보기에도 역겨운 오물들로 가득 차 있다.
건물 대부분은 관리가 되질 않아 낙후되었고, 서로를 실로 연결하듯 건물과 건물 사이는 빨랫줄이 거미줄처럼 여기저기 뒤엉켜 두 눈이 돌아갈 지경이다.
길을 따라 좀 더 안으로 들어가 보자.
바깥 시선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길목엔 아이에게 젖을 물린 채 동냥을 하는 여인이 우리 앞길을 막았고.
그 주위엔 갑옷을 거의 넝마처럼 걸친 늙은 용병들이 술에 꼴은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부디 우리에게 자비를.”
촙의 앞을 가로막은 여인이 팍 삭아버린 목소리로 읍소하듯 말하자.
그는 콧방귀를 끼며 고삐로 그녀를 위협했다.
“저리 꺼지지 못해?!”
그의 말에 여인은 곧바로 그 뒤에 있는 내게로 다가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표정과 함께,
“부디 우리에게 자비를….”
내게 흐느끼며 구걸한다.
그런 그녀의 간절한 외침에 난 어쩔 줄 몰라 망설이기만 할 뿐.
“놈들을 동정하지 마, 얼른 가자고.”
보다 못한 촙이 몸을 돌려 내 말의 고삐를 잡고 끌어버리는 바람에 순식간에 그 거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디안, 네가 상냥한 사람이란 건 잘 알아.”
“…미안. 무법자에겐 어울리지 않는 짓이었지.”
“아니, 무법자라고 상냥해지지 말란 법 있어? 여긴 무법지대야. 네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며 살아가면 되는 곳이라고.”
“고마워….”
“널 위로한답시고 하는 말이 아니야. 자고로 무법자들은, 그것도 시몬 바스티유의 일원이라면 법에 외면받는 약자들을 도와야 하는 법이지.”
촙은 이내 내 말의 고삐를 놓더니 느긋한 말투로 내게 설명했다.
“다만 방금 우리 앞길을 막은 그 여자는 법에 외면받는 약자가 아니야.”
“그럼?”
“자기 자신을 스스로 잡아먹은 부류들이지. 패배자들.”
“패배자라니…?”
“여자의 검지와 엄지에 굳은살이 잡혀 있었어, 딱 봐도 카드노름을 하면서 생긴 거였지. 또 자세히 보면 코 주위에 하얀 반점이 올라왔거든, 그건 약에 절어 사는 중독자란 소리야.”
“세상에….”
“그 여자에게 자비란, 손에 카드를 쥘 최소한의 판돈을 의미하는 거야. 젖을 물린 아이는 그저 앞서 말한 ‘자비’를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이라고.”
“난 아무것도… 몰랐어.”
“그래, 하지만 지금은 적어도 그런 부류에 대해서 알게 됐잖아? 매튜 아저씨는 세상을 동화 같은 이야기로만 알려주고, 맥레인 아저씨는 그냥 모든 게 좆같은 거라 일러주지. 결국에 세상을 바로 알려면 지금처럼….”
“직접 마주해야 하는구나.”
“맞아, 너에게 그걸 알려주고 싶었어. 그럼 너 스스로 존나 나쁜 무법자 새끼지만, 그럼에도 상냥한 구석이 있는 놈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사실 매튜 아저씨의 이야기도,
맥레인의 그 매서운 위협도.
지금의 내겐 커다란 의미다.
하지만 지금,
촙이 해준 이야기는.
그런 내가 가지게 된 의미를 더욱 곱씹게 해주었다.
“촙, 고마워. 정말로.”
“가족끼리 그런 말 하는 거 아냐.”
정말 내가 너의 가족이라 불려도 될 만큼 의미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무튼, 각설하고 진짜 세상의 첫 페이지가 좀 지랄 맞았지? 다음 페이지부턴 흥미로운 것투성이니까 눈 크게 뜨고 잘 보라고.”
곧이어 촙이 고삐를 경쾌하게 놀리며 날 이끌었다.
“조금만 방심해도 세상에 깔려 죽을지도 모르니까.”
그래,
온몸으로 밤하늘을 각인했던 그때처럼.
내 모든 감각으로 이 도시의 모든 것을 새기리라.
* * *
완만한 오르막으로 되어있는 도시 중앙 길을 따라 한참을 더 올라가니.
도시 입구에서 봤던 광경과는 정반대의 풍경이 펼쳐졌다.
여기저기서 새의 지저귀는 소리 마냥 울려 퍼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두 젊은 남녀 사이를 오가는 달콤한 밀어.
방금 막 불꽃 아래서 풍성하게 피어오른 빵 냄새.
울퉁불퉁한 도로를 할퀴는 무거운 마차 소리.
파이프를 입에 물고 한가로이 신문을 보는 노인과 그런 그에게 한 잔의 차를 건네는 아리따운 종업원.
무엇보다,
길가에 설치된 기둥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은은하고 가벼운 향까지.
내 상상 속에서나 그려지던 진짜 도시의 그림이 바로 이곳에 펼쳐져 있다.
그저 두 눈이 휘둥그레져 주변을 살피기에 바쁜 내 모습에,
촙은 이따금 킥킥거리면서 웃기 바빴다.
“그러고 보니 이런 말이 있지.”
그러다 작은 대장간을 이제 막 지나치던 촙이 등을 돌려 내게 말했다.
“난쟁이 셋이 모이면 하나는 광물을 만지고.”
그러면서 대장간을 향해 턱짓하는 촙.
그런 그의 턱짓을 따라 대장간을 살펴보니 정말 그 안에선 난쟁이가 쇠를 두들기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보석을 만지고.”
그 대장간 바로 옆, 보석상을 연이어 턱짓한다.
그러자 정말 보석 가게 안에 난쟁이처럼 보이는 보석상이 눈에 들어왔다.
“나머지 하나는 엉뚱한 것을 만진다.”
이윽고 마지막으로 저만치 떨어진 건물에 턱짓하는데,
그가 가리킨 작은 건물 지붕엔 구름이 걸쳐져 있었다.
“대체 저게 뭐야?!”
“구름으로 만든 솜사탕을 파는 곳이지, 애들이 좋아 죽어. 비질라도 엄청나게 좋아하더라고.”
가게 앞은 아이들로 북적거렸고, 그 아이들 사이에서 머리 하나만 빼꼼 튀어나온 난쟁이가 정신없는 얼굴로 동전을 내민 아이들에게 조각구름을 나눠주고 있었다.
“천둥 구름 맛, 먹구름 맛, 여우비 구름 맛. 별 개 다 있어.”
“이따가 캠프로 돌아갈 때 비질라 것을 하나 사가는 게 좋겠다.”
이어지는 내 말에,
촙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시간도 넉넉할 것 같은데.”
그는 결심을 굳힌 듯 씩 웃으며 내게 말했다.
“조금만 즐기다 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러니까… 네가 모르는 것들도 좀 알려줄 겸 해서.”
그 말에 이번엔,
내가 대답 대신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