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본격적으로
잠을 설쳤다.
내가 나에게,
나로서 내게 확신을 주었고 다짐받았던 어제 그 일 때문에.
아직도 마음이 붕 떠 있는 것만 같다.
사실 정확히 뭐라고 정의를 내릴 순 없다.
무엇을 확신했는지, 무엇을 다짐했는지.
그걸 떠올리기 위해 밤잠을 설친 걸 수도 있겠다.
하지만 결국 새벽이 다가오고 난 뒤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딴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그 확신과 다짐으로 인해 변한 내 마음이, 그 심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크허억.”
내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던 안드레가 크게 뒤척이는 바람에 퍼뜩 상체를 일으켰다.
그에게선 아직도 지독한 술 냄새가 풍겨왔다.
맥레인이 이야기해준 대로라면 분명 내 생각 이상으로 많은 술을 들이켰을 거다.
한계를 거세당한 사람이 취할 정도라면 말이지.
얼결에 상체를 일으킨 덕에 나는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곧바로 작게 지펴져 있는 모닥불로 향하니 늘 그렇듯, 안나 아주머니가 날 반겨주었다.
“일어났니?”
“네, 안나 아주머니는요?”
“나야 늘 똑같지.”
안나 아주머니는 그루터기에 걸터앉은 채 딱 보아도 능숙한 솜씨로 옷을 짜고 있었다.
실처럼 얇은 바늘 두 개를 이용해 어제 나와 촙이 구해 온 옷감을 촘촘히 엮는데 보기만 해도 절로 탄성이 나올 정도다.
내 넋 놓은 표정을 본 안나 아주머니는 웃으면서 말했다.
“비질라가 그림을 정말 잘 그려준 덕에 금방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아. 물론 너와 촙이 정말 좋은 물건을 가져온 덕도 있고.”
이어지는 그녀의 포근한 미소에,
괜히 내 입꼬리가 슬슬 올라간다.
“지금 내가 꿰고 있는 옷감이 바로 말레드레의 옷감이란다.”
안나 아주머니는 말을 마치기 무섭게 곱게 짜놓은 옷감을 모닥불 위에 올려놓았다.
이에 난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지만,
모닥불 위에 한참이나 얹어져 있었음에도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는 옷감에 더 놀라야만 했다.
“말레드레는 불 먹는 거미의 이름이야, 그리고 그 거미가 뽑아낸 실로 만들어낸 게 이 옷감이지. 보다시피 이 옷감은 열기에 누그러지지 않고 오히려 끌어안아. 한번 끌어안은 열기는 사흘이 지나도 식지 않고.”
말을 마치기 무섭게 그녀가 옷감을 집어 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느껴진다.
옷감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후끈한 열기가.
“우리 ‘가족’이 크게 성공해서 터를 잡게 된다면 말이야, 디안.”
“네.”
“난 모두에게 이런 고급스러운 옷감으로 만든 옷을 만들어 입혀주고 싶어.”
그녀의 눈이 일순간 반짝였다.
“그게 바로 내 이상이자 꿈이란다.”
불운한 과거로부터 도망쳤을 뿐인데, 도망자 신세가 되어버린 안나 아주머니는 따듯함을 꿈꾸고 계셨구나.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내가 밤잠을 설치며 했던 생각들이 결국 다 틀렸었구나 싶다.
기저가 없는 확신과 다짐은 속 빈 강정인 거였어.
그저 막연한 고양감으로 가득 찬 마음가짐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
“디안?”
“아, 네.”
안나 아주머니가 멍한 내 얼굴을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괜찮니? 내가 너무 옷감을 모닥불에 절였나? 뜨겁지?”
“아니에요, 굉장히 따듯하네요.”
아주머니가 말씀한 그 꿈 얘기보단 덜하지만요.
“뭐야, 또 둘이서 새벽부터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나눠?”
큰 천막이 확 젖히며 그 안에서 불쑥 튀어나온 덩치 큰 사내.
맥레인이 자연스레 품에서 연초를 꺼내 입에 물고 모닥불 근처로 다가왔다.
“조심히 다뤄 안나, 그거 우리 조직이 전 재산을 털어 산 거니까.”
“입조심 해 맥레인, 여기 그 누구보다 옷감 만지는 건 내가 더 잘하니까.”
안나의 으름장에 맥레인이 장난스레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연초를 입에 문 채 고개를 숙여 모닥불로 불을 붙인 맥레인은 금세 감색 연기와 함께 내게 말을 걸어왔다.
“해가 뜨기 시작할 때쯤 숲으로 와라.”
드디어 그에게 보여줄 수 있겠구나.
“알겠습니다.”
내가 얼마나 변했는지를.
내 의기양양한 모습에 맥레인은 되려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물고 있던 연초를 모닥불에 던졌다.
그리곤 벌떡 일어나 숲으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맥레인, 뭐라도 먹고 가지그래?”
안나 아주머니의 물음에 맥레인은 대답 대신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렇게 멀어져가는 맥레인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나는,
문득.
알아차렸다.
내가 그에게 ‘변화’를 보여주고 싶어 한다는 것을.
등잔 밑이 어둡다 했던가.
그는 내가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 변화의 초석이야.
그래, 이젠 확신할 수 있어.
그리고 다짐도 할 수 있지.
* * *
해뜨기를 얼마나 고대했던가.
식은 어스름이 사라지고, 밝은 푸름이 하늘에 묻어나기 무섭게 난 숲을 향해 달려갔다.
그가 내게 준 녹슨 검을 들고서.
그렇게 익숙한 장소에 들어서자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껄렁하게 기대앉아 있는 맥레인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보여줄 시간이다, 내 몸에 일어난 변화를, 성과를.
바로 달려나갈 준비를 하는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뭐 하려고?”
“늘 그랬듯 뛰어야죠.”
“됐어, 이제 뛰는 건 그만해도 돼.”
“제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가늠해 봐야….”
“이제 그딴 건 좆도 상관없어.”
대체 무슨 말이야.
“후퇴가 없는 몸이라면 지금쯤 바람처럼 달릴 수 있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발전? 아니 미안한데 그건 그냥 ‘순리’야.”
그가 표독한 얼굴로 날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지금부턴 또 다른 걸 배우게 될 거고, 그것 역시 순리대로 적응할 거다.”
“뭣…!”
그에게 채 말대답을 하기도 전에,
갑자기 내 시야가 하얘졌다.
핑핑 도는 머리, 그리고 뒤이어 따라오기 시작한 끔찍한 이명.
잃어버린 초점을 슬슬 찾은 두 눈에 보이는 건,
하늘.
이윽고 맹렬한 통증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
“꾸… 억….”
입 밖으로 토해내듯 뱉어진 신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감히 가늠조차 할 수가 없다.
이어서 울렁거리는 귓가에 맥레인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이젠 그 통증에 익숙해져야 할 거다.”
그 말에 나는 아랫입술을 씹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 가슴을 친 겁니까?”
“응, 주먹으로.”
내 물음에 맥레인은 친절하게도 무식하게 단단한 자기 주먹을 내보이며 실실 웃었다.
사실,
하나도 보질 못했다.
그가 주먹을 내질러 내 가슴을 강타했다는 그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조차 못했어.
“왜, 달리기 다음에 뭔가 바로 극적인 걸 배울 것이라 생각했나? 아니면 당장 잘 달린다는 그거 하나만으로 인정받을 생각이라도 했을까?”
내 속을 엉망진창으로 꼬집는구나.
매섭다.
“설마 달리기 몇 번 했다고 본격적으로 검을 휘두를 것 같았어?”
“확실히 그런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미안한데 그런 네 생각, 존나 다 틀렸어.”
그는 다시금 주먹을 쥔 채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사실 달리기를 시작하면서부터 넌 검을 배우기 시작한 거야. 사람이고 귀쟁이고 난쟁이고 착각하는 게 하나 있어, 곧바로 검만 주야장천 휘두르면 누구나 다 대단한 검사가 될 거라 착각하지.”
뒤이어 또다시 그의 주먹이 내 왼쪽 어깨에 꽂혔다.
한참 뒤로 나뒹굴고 나서야 내 눈에 그가 휘두른 주먹의 잔상이 아른거렸다.
“검 아니, 비단 검뿐만이 아니야. 모든 건 탑을 쌓는 것과 똑같아.”
그는 잠시 쥐었던 주먹을 풀고서 내게 설명을 이어갔다.
“탑을 무너지지 않고 튼튼하게 지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밑에서부터 튼튼하게 쌓아 올려야겠죠.”
“맞아, 정확히는 탑의 가장 밑단을 책임질 반석이 제일 중요하지. 그 뒤론 하나하나 차곡차곡 네가 허락하는 순리 안에서 탑을 쌓아야 해.”
맥레인은 이내 손가락 하나를 치켜세워 하늘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 탑의 가장 꼭대기를 장식하게 될 층이, ‘검’이 되는 거다. 자 그럼 다시 질문하겠다, 넌 검이란 탑을 쌓고 싶다면 어느 높이까지 쌓고 싶나?”
“가능하다면 가장 높이.”
적어도 당신만큼.
“그렇다면 그건 꽤 높이가 있는 탑이겠군. 자, 그럼 다시 질문. 높은 탑을 짓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그만큼 큰 기반을 준비해놔야겠지요.”
내 대답에,
맥레인이 처음으로 호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정답이다.”
그리고 다시 표독한 표정으로 돌아온 그가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해서, 지금 이 모든 것이 그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거다 애송아.”
이번엔 눈에 제대로 담았다.
그의 주먹이 정확히 내 오른쪽에 꽂히는 것을.
“흐… 학…!”
욱신거리는 통증을 부둥켜안은 채 한참이나 뒤로 구른 나는 한동안 일어서지 못했다.
“세 번 만에 눈으로 좇기 시작하다니, 확실히 집중력은 재능이 있군.”
그가 다시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세공소에서 겪었던 고통을 생각해 봐, 넌 그곳에서 살기 위해 그 고통을 다 견뎠잖아?”
그리곤 아직 바닥을 뒹굴고 있는 내 앞에 멈춰 서서.
“그렇담 이 고통도 다 견뎌보라고, 네가 본격적으로 검을 휘두르게 됐을 땐 이 고통조차 그리워질 테니까.”
내 멱살을 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꼭 명심해, 하루만 지나면 이 모든 더딤이 사라지는 너에겐 더욱 중요한 거니까. 고통에 무뎌지지 마, 오히려 기억해라. 날이 무뎌지면 검으로서 끝장나는 것처럼, 너도 고통에 무뎌지는 순간 끝을 마주하게 될 테니까.”
그 말에,
난 이를 깍 깨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번엔 그의 주먹이 정확히 내 배에 꽂혔다.
“끅…!”
알겠다.
그가 하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그의 말 대로 이 모든 고통은 내겐 하루면 사라지는 연기 같은 것.
그래서 기억해야 하는 것.
내게 이점으로만 작용할 줄 알았던 게,
사실은 내게 가장 치명적인 약점일 수도 있단 걸,
그는 알려주고 있는 거다.
이제야,
내가 이 세상을 보는 시야가 좀 넓어진 것 같다.
난 그렇게 몇 번이고 그의 주먹에 나뒹굴어야 했지만,
아득바득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맥레인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뜨며 내게 말했다.
“확실히, 뭔가 달라지긴 했군. 제법 표독한 표정도 지을 줄 알고.”
그러거나 말거나,
난 당장 입안에 고인 걸쭉한 피가 거슬려 바닥에 뱉어낼 뿐이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도록,
난 그 앞에서 바닥을 굴러다녔고, 끝내 맥레인의 숨이 슬슬 거칠어지기 시작할 때쯤에야.
모든 것이 끝날 수 있었다.
사실 그의 완력이라면,
주먹질 단 한 번만으로 날 혼절시켰을 테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정말 완벽한 완급조절로 날 두들겨 팼다고 해야 할까.
해서 아직도 내가 의식을 차리고 있는 거겠지.
“기분이 어때.”
맥레인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 물음에 난,
“씁쓸하네요.”
마찬가지로 무덤덤하게 대답했고,
그 대답에 맥레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게 바로 네가 내게 보여줄 ‘변화’인 거야.”
그리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캠프 쪽으로 유유히 걸어가는 맥레인.
그런 그의 뒷모습을 사라질 때까지 바라본 나는,
입가에 식은 웃음이 자연스레 걸쳐졌다.
* * *
“맥레인, 무슨 일이라도 있나? 왜 그렇게 울적한 표정이야?”
말없이 캠프 쪽으로 걸어온 맥레인을 지켜보던 매튜가 넌지시 묻는다.
그 물음에 맥레인은 천천히 매튜쪽으로 다가가 푸념하듯 대답했다.
“그냥 씁쓸해서요.”
“무엇이?”
“자신의 몸에 생긴 이변 탓에, 누구에게나 비정상적인 일들이 자신에겐 정상적인 일들이 됐을 때. 그게 굉장히 비참한 거잖아요.”
그 말에 매튜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속삭이듯 말을 잇는다.
“자네만큼 그 비참함을 절절하게 느껴본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