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본격적으로 (2)
솔직히 말하자면,
놀랍다.
무서울 정도로.
놈의 재능은 뛰어나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중립지역의 난다긴다하는 놈들을 숱하게 만나봤지만 그런 놈들조차 비교가 되질 않아.
굳이 비교할 대상을 끄집어낸다면….
그래, 내가 ‘그곳’에 몸담고 있었을 적에 몇 번밖에 보지 못했던….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녀석들과 비슷하다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놈은 거기에 더해 경이로운 회복력을 자랑하는 육체까지 가지고 있다.
그뿐인가?
학대에 기인해 생긴 듯 보이는 집중력은 경악할만하다.
세상은 놈을 처참하게 버렸지만,
놈이 다시 세상을 억척같이 쥐고 일어서려 하고 있어.
참 아이러니하군.
그래 아이러니하다.
그 아이러니함의 가장 큰 이유는,
평생 느낄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어떤 ‘성취감’이 그놈으로부터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성취감의 기저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나도 모른다.
그래서 딱히 뭐라 정확히 설명할 순 없지만, 확실히 놈이 하루가 다르게 전진하는 모습을 보면.
설령 아무리 무지한 자라고 한들 나와 같은 성취감을 느낄 것이다.
이제 놈은 내가 휘두르는 주먹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두 눈에 담아내고 있었다.
아마 마음만 먹었다면 내가 내지르는 주먹조차 손쉽게 피할 수 있겠지.
하지만 녀석은 그러지 않았다.
내 주먹이 녀석의 몸에 닿을 때까지 그저 묵묵히 두 눈으로 담아내기만 할 뿐.
녀석은 정말 내가 말한 그 약점을 어떻게든 극복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거다.
내가 주는 고통을 자기 신경에 각인이라도 시키려는 듯,
그래서 그 고통을 언제든지 기억해낼 기세로.
해서 난 그 기세에 열렬히 보답해 주었다.
주먹의 강도는 점점 강해졌고, 어쩔 땐 나도 모르게 발길질이 나가기도 했다.
여기저기 나가떨어지고, 흙바닥을 구르고, 피가 잔뜩 섞인 단내나는 침을 게워내고.
근데 그 모든 과정에서,
이제 청년의 자리를 넘보려 하는 그 위태위태한 소년은 단 한 번의 비명조차 내지르지 않았다.
무던히, 담담하게, 굳은 표정으로 다음 주먹을 기다릴 뿐.
정말 웃긴 건,
이 모든 일이 불과 이틀 만에 일어났다는 거지.
놈은 한 번 만개하고서 그치는 꽃봉오리 따위가 아니야.
놈은, 디안은 숲이야.
대지 한 편에 뿌리를 박고서 수백 년 녹음을 흩뿌릴 그런 숲.
* * *
“오늘은 여기까지.”
맥레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자기 주먹을 매만지며 툭 던지듯 말했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캠프를 향해 걸어간다.
오늘도 몸 가누기 힘들 정도로 두들겨 맞았다.
하지만,
그 무수한 두들김 속에서 난 본능적으로 절대 상대에게 내줘선 안 될 급소를 파악할 수 있었다.
유독 맞을 때 그 고통이 심해 숨조차 쉴 수 없었던 부분들이 내 몸에 각인된 듯 욱신거렸으니까.
반대로 제법 맨몸으로 맞기 수월한 부분들도 여러 곳 찾아낼 수 있었다.
“끄…윽….”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썩은 그루터기에 등을 기댔다.
짧게 숨을 내쉬었을 뿐인데 몸속 이곳저곳이 찌르르 저려 나도 모르게 표정이 일그러졌다.
콧속엔 녹슨 쇠를 처박아 놓은 듯 피비린내가 진동했고, 힘이 풀린 턱에 활짝 열린 입에선 걸쭉한 피가 실처럼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건 내 약점이다.
“이건 내 약점이야.”
멍하니 있다가 혼잣말을 지껄여 본다.
내 몸에 깊숙이 새겨진 이 고통은 하루가 지나면 마르는 물 자국처럼 감쪽같이 사라지겠지.
그래서 더더욱 기억해내야만 해.
지금 내 몸에 내려앉은 고통을, 그 느낌을.
회복이라는 탈을 쓴 무지에 목숨을 잃을 순 없으니까.
그러니까 기억해내야 해.
한참 동안,
양팔로 몸을 감싼 채 몸에 내려앉은 고통을 암기한 이후.
난 삐그덕 거리는 몸을 겨우 일으켜 세워 캠프로 향했다.
* * *
캠프에 도착하기 무섭게 첫날과 마찬가지로 매튜가 날 치료해주었다.
독한 술로 적신 솜을 내 코에 쑤셔 박고, 말린 과일과 함께 한 모금의 술을 먹는 게 다였지만.
그 투박한 처방전이 그리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질겅질겅.
과일이 꽤 달짝지근한 것도 맘에 들고 말이야.
“디안, 이번 큰 거 한 방에 네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것 같아.”
짤막한 처방이 끝난 직후, 매튜는 특유의 온화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말했다.
그의 손엔 꽤 많은 분량의 종이뭉치가 들려 있었다.
“포키스가 구름과 관련해서 여러 정보를 모아왔는데, 생각보다 일이 좀 어려워졌거든.”
“무슨 일인데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매튜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뭉치를 내게 건넸다.
“우리가 털어야 할 구름에 대한 정보가 단 하나도 없어, 아니 없다기보단 도저히 구할 수가 없었지.”
매튜 아저씨가 저런 말을 할 정도라면 정말 구할 수 없는 것일 테지.
“구름의 설계도는커녕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오리무중이야. 그래서 아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보려 해.”
“어떻게 말이죠?”
매튜는 곧장 단 안경을 벗고서 찬찬히 말을 이어갔다.
“혹시 조이를 아나? 조이 크레비디?”
조이 크레비디.
그래, 그라면 알고 있다.
맥레인과 아주 오래된 동료였다는 사실 하나뿐이지만.
“일전에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어요.”
“그렇군, 쉽게 말하자면 조이는 우리 조직을 바깥세상과 연결해주는 고리 같은 존재야.”
“정확히 어떤…?”
“그는 비테시안 기사단의 종자이기도 하고 아무람므 사교계의 이름난 유명인사기도 하지. 남쪽 어딘가에선 실력을 인정받은 연기자이기도 하고 또….”
그저 솜씨 좋은 수완가인 줄 알았는데, 실상은 더욱 어마어마한 사람이었구나.
“굉장한 사람이군요.”
“그래, 맞아. 하지만 그는 뼛속까지 우리 시몬 바스티유의 일원이자 가족이란다.”
“그래서, 조이를 이용해 구름에 접근할 방법을 마련하신 건가요?”
내 물음에 매튜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답이야. 결정적으로 조이가 일러준 방법이 가장 위험부담이 적기도 하고.”
이내 매튜는 내게 건넨 종이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내가 앤서니 트와드라는 이름을 말하기 무섭게 조이가 먼저 말하더군, 이번에 아주 큰 구름이 뜬다고 말이야.”
“이미 그쪽 방면엔 다 알려진 사실이란 거군요.”
“그래, 가족 여행이니 차세대 무기를 판다니 하는 것은 무성한 소문 가운데 굵직한 줄기였을 뿐이었던 거지. 실상 그 구름이 뜨는 진짜 목적은 어떤 은밀한 ‘경매’ 때문이야.”
“경매?”
“응, 앤서니 트와드가 주최하는 아주 은밀한 경매. 법적으로 거래가 불가한 물건을 낙찰받을 수 있는 유일한 경매이기도 하지.”
“어떻게 법을 어기고 낙찰받을 수 있다는 거죠?”
그 말에 매튜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 구름이 정확히 중립지역 상공에 멈춰.”
“아.”
“지상에선 날파리가 꼬이기 마련이니까, 아예 하늘에서 안전하게 경매를 할 생각인 거야.”
“그래서 그 경매에 아예 위장 형식으로 참여한다, 이건가요? 조이 크레비디의 인맥을 통해?”
매튜가 건넨 종이의 첫 장을 넘기며 넌지시 묻자, 그는 대뜸 내 손에 들린 종이에 손을 얹으며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디안, 너는 이해가 참 빠르구나. 맨날 엔제이나 맥레인같은 녀석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내 골통에 가뭄이 든 것 같았는데.”
그의 말에 난 배시시 웃어 보였다.
덕분에 코에 박았던 솜 하나가 헐겁게 빠져버렸지만.
“어쨌든, 결론은 네가 말한 대로 우린 정식으로 그가 주선하는 경매에 참여할 거야. 물론 그건 무늬만이고 실상은 찰나의 기회를 엿봐서 물건들을 모조리 털고 내빼는 거지.”
“그리고 그 경매의 참여인이 바로 저라는 소리네요.”
세 번째 장에 특정 인물에 대한 행동 양식이 쓰여있는 것을 보니 아마 내가 연기해야 할 것들임이 틀림없을 거다.
“애석하게도, 우린 누가 봐도 무법자처럼 보이지만 넌 누가 봐도 무법자처럼 생기지 않았잖니. 그리고 걱정하지 마, 너 혼자 참여하는 것도 아니니까. 항상 네 뒤에 우리가 있을 거다.”
“할게요, 그저 제가 소화해내야 할 역할이잖아요?”
조직, 아니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어떤 역할을 부여받는다는 그만큼 날 신뢰한다는 뜻이니까.
덤덤한 내 대답에 매튜는 다시 새로운 솜을 독한 술에 적셔 내 코에 조심스레 집어넣으며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달도 채 안 됐는데, 벌써 너에게서 무법자의 향기가 폴폴 나는구나 디안.”
그 모습이 제법,
내겐 소중한 것이어서.
나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 * *
‘빈센 다르마야’
아주 먼 동쪽, 크리티야 대륙을 주름잡는 가문 가운데 그 위상이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다르마야 가문의 셋째 아들.
그 성격이 불같다가도 차갑기 그지없어 망나니에 가깝고,
취향은 까탈스러워 늘 수행원이 그때그때 달라질 정도.
그러나 그 괴팍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모래 속의 금이라 불리는 가문의 별명답게 아주 빼어난 용모를 가지고 있어 늘 사교계의 중심에 있는 인물.
이것이 바로 내가 연기해야 할 인물에 대한 정보.
제법 이곳과 거리가 먼 땅의 인물이라 생소하지만, 그 가문의 이름이 명실상부 대단한 것이어서 눈 높은 자들이라면 다 알 수밖에 없다.
그 애매한 선상에 걸쳐져 있는 인물을 용케 생각해낸 것을 보면,
조이 크레비디란 사람도 맥레인과 마찬가지로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걸 상기할 수 있었다.
이미 구름에 접촉할 물밑 작업은 조이가 시작했다고 했으니 난 그저 때가 됐을 때,
빈센 다르마야라는 사람이 되어있으면 돼.
매튜에게서 필요한 서류들을 받아들고 천막을 나서자, 이미 해는 기울어 제법 날이 어둑해져 있었다.
몸은 아직 구석구석 욱신거려 이따금 절뚝거리며 걸을 수밖에 없었지만, 전보다 훨씬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난 곧바로 비질라에게 찾아갔다.
작은 천막에서 상체만 툭 튀어나와 호롱불에 의지해 책을 읽고 있던 비질라는,
내가 낸 인기척에 그 큰 눈을 반짝이며 활짝 웃었다.
아니, 활짝 웃다가 내 몰골을 보자마자 금방 당황한 표정을 지어버렸다.
“디안 오빠? 괜찮아?”
“안녕, 비질라.”
“짐승이라도 만난 거야? 심각해 보여!”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운동 같은 걸 했어.”
확실히 물리적인 자극이 가해진 운동이긴 하지.
근데 자극을 한 네 배 곁들인.
“무슨 운동인진 모르겠지만, 너무 자주 하진 마. 알겠지?”
벌떡 일어나 내가 앉을 자리를 내주는 비질라는 진심으로 걱정 어린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어여뻐서 나도 모르게 덜컥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손에 든 종이는 뭐야?”
비질라는 곧 눈을 반짝이며 내 손에 들린 종이뭉치를 가리키며 물었다.
“오늘은 내가 비질라에게 읽을거리를 좀 가져왔지.”
“정말?!”
작은 강아지처럼, 그대로 엎드려 내게 불쑥 다가오는 비질라.
“사실 너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해서.”
“당연히 도울 수 있다면 도와야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비질라는 내 손에 들린 종이를 뺏어 들었다.
“크리티야라는 대륙을 알아?”
금방 종이에 적힌 글들을 무아지경으로 읽어내려가는 비질라에게 넌지시 묻자,
그녀가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동쪽, 세로로 줄 세우듯 나열된 여덟 개의 굵직한 산맥을 품은 땅이야. 사계 중 세 계절을 빼앗긴 땅이기도 해서 늘 건조하고 더워. 나부끼는 바람엔 항상 모래가 곁들여져 있고.”
금방이라도 소설 속의 한 문장을 읽은 것처럼 거침없이 말을 이어간다.
“하지만 그 수많은 모래 속에 잠들어 있는 사금이 굉장해서 그로 인해 부유해진 사람들이 많아, ‘아티잔’ ‘다르마야’ ‘온비옴’ 같이.”
그렇게 벌써 마지막 장을 훑던 비질라가 시선을 내게 집중했다.
“다르마야 가문은 아티잔 가문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아.”
“그래? 왜?”
“아주 오래전부터 두 가문이 ‘금의 전쟁’을 벌여왔거든. 지금은 소강에 접어들었지만.”
“서로 금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응, 금과 불꽃이란 책에서 그렇게 말했어.”
다시 종이를 내게 건넨 비질라는 그 얼굴의 흉터가 무색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그러니까 오빠가 빈센 다르마야를 연기할 땐 자연스레 아티잔에 대한 비난을 섞는 게 좋을 것 같아.”
“고마워, 비질라. 다음에도 도움이 필요하면 와도 될까?”
내 말에,
그 작은 소녀는 제법 늠름한 표정으로 답한다.
“당연하지!”